거북이와 장애인 / 갈라디아서 3 : 23~29

by 좋은만남 posted Apr 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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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8일(부활절 제3주 / 장애인선교주일) 좋은만남교회 낮예배 설교


'거북이와 장애인'

이관택


본문: 갈라디아서 3장 23~29절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24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25 그런데 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개인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27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입니다.


여러분!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한다고 합니다. 과연 누가 이길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토끼가 이긴다고 할 것입니다. 또는 어떤 사람들은 ‘토끼와 거북이’라는 동화를 떠 올리면서 ‘혹시 거북이가 이기지 않을까?’ ‘토끼는 분명 어디선가 낮잠을 잘거야.’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습니다. 과연 진짜로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한다면 둘 중에 누가 이길까요? 정답을 맞추시는 분에게는 작은 선물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토끼와 거북이가 ‘과연 어디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느냐’가 빠져있지요. 동네 운동장 같은 곳에서 100m 달리기 시합을 한다면야 당연히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거북이보다는 토끼가 훨씬 빠르겠지만, 시합을 하는 장소가 만약 드넓은 동해바다 그 속이라면 이야기가 사뭇 달라집니다. 우리가 보통 ‘느림보 거북이’라고 생각하던 그 거북이가 과연 바다 속에서도 느림보일까요? 아마도 그 어떤 짐승보다도 날쌘 자태를 선보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디에서라는 전제’가 빠져있는 세상에서 거북이는 느림보입니다. 하지만 거북이는 원래 느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땅에서는 느립니다. 하지만 바다에서는 빠릅니다. 거북이는 느림보인가요? 아니지요.

오늘 제가 왜 이런 알쏭달쏭한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느냐 하면 바로 오늘이 우리 감리교 교회력 절기상 장애인선교주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내일 모레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거북이와 장애인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러분 팔이 하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장애인이죠. 그렇다면 눈 한 쪽이 잘 안 보이는 사람은 과연 장애인인가요? 여기 안경 쓰신 분들 중에 혹시 안경을 벗으면 잘 안보이시는 분 계신가요? 00 성도님 혹시 시력이 얼마나 되세요? 시력이 -10 정도 되어서 현재 안경을 벗으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을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부를 수 있나요? 이 곳에도 안경을 쓰고 계신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은데 장애인이라고 하면 혹시 기분이 나쁘실까요? 아마도 시력이 -10정도인 사람이 불과 300년 전에 태어났다면, 그 사람은 시각장애인이었을 겁니다. 안경이 없는 시대, 또는 안경 기술이 발달하지 않는 시대에서 눈이 나쁘다는 것은 곧 보이지 않는다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300년 전에 시각장애인, 맹인이라고 불리워졌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 시대에 뽕하고 나타난다면 안경을 쓰거나 라식수술을 받거나 해서 장애인이 아니라 그저 눈이 나쁜 사람정도로 생각되게 될 것입니다. 놀랍네요 시대에 따라서 장애인이 되느냐 마느냐...

그렇다면 앞을 볼 수 없다면 다 장애인일까요? 미국 뉴잉글랜드 보스턴 남부에 있는 ‘마서즈 비니어드’라는 어려운 이름의 섬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이 섬은 약 절반정도의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청각장애인 즉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섬은 당연히 공용어로 말 대신 수화를 사용합니다. 건청인, 즉 듣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도 당연히 학교에서 수화를 배우고 수화를 일반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청각장애인’ 단어가 매우 생소합니다. 그저 듣지 못하는 사람일뿐이죠. 듣지 못하는 것이 별로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이 섬에서는 듣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그리 불편한 일도 아닙니다.

여러분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무조건 장애인입니까? 다리가 하나 없다고 무조건 장애인입니까? 그렇다면 거북이는 무조건 느림보 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거북이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느림보가 될 수도 날쌘돌이가 될 수도 있듯이 다리가 없는 사람들도 거리낌 없이 휠체어를 타고 그 어디라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세상, 엘리베이터가 모든 건물에 잘 설치되어 있고 길 가다보면 종종 만나게 되는 작은 턱들이 없어서 그 어떤 휠체어라도 불편 없이 다닐 수 있는 세상에서는 ‘휠체어 장애인’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다리가 불편한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가 흔히 정상인이라고 얘기하는 비장애인은 그 사회에서는 그저 걸어다닐 수 있는 사람이겠지요.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천지차이입니다.

‘손상’이라는 말과 ‘장애’라는 말의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뭔가 좀 부족한 것 때문에 살아가기 불편한 사회, 손이 하나 없다고 해서 저 사람은 병신이야! 장애인이야! 라고 할 수 있는 사회! 그것은 정말 수준이 낮은 형편없는 사회입니다. 왜냐면 이 사회의 진정한 능력은 혹시라도 돈이 없어서 불편한 사람들, 여성이라서 불편한 사람들, 나이가 많고 병 때문에 아프고, 다리가 하나 없어서 불편한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 품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보시기에 좋은 세상 아닙니까? 세계 경제 12위라고 큰 소리 치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생계형 자살이 넘쳐나고, 삶의 비전을 주지 못해 절망에 빠진 사람이 넘쳐나는 이 곳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희망을 봅니까? 사실 너무나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사회에서 거북이는 무조건 땅바닥을 길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당연히 거북이는 느림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거북이가 바다에서 헤엄칠 수 있다는 상상을 아무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회에서 듣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청각장애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듣지 못하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이들이 수화를 배울 수 있다고 그 누구도 상상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화는 또 하나의 언어이건만 그 누구도 수화 따위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말씀에서 바울이 이방인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목 놓아 이야기하는 과정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상상을 하는 과정입니다. 과거부터 전통적으로 이방인들과는 함께 밥을 먹지도 말을 섞지도 않았던 유대인들, 그것이 정결한 것이고 하나님께 불신앙하지 않는 것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었습니다다. 마치 거북이는 느림보인 것 처럼 유대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방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당시의 편견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였습니다. 오죽하면 바울도 자신을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설명해 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선교가 중요하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지요.

그 때에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불결하고 가까이해서는 안 될 죄인들과 가까이하고,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등 그들이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당시로서는 상상불허의 일들을 행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결국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지요. 하지만 이 문제는 쉽사리 고쳐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이 후에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 이방선교를 하면서 끊임없이 유대인 크리스찬들과의 마찰을 빚어왔습니다. 이는 율법의 범주에서 제외된 새로운 문화의 이방인 크리스챤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서 계속 생겨나는 또 다른 마찰입니다. 돼지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방신에게 제사지낸 음식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할례를 받았나? 받지 않았나? 이방인의 문화 속에 스며든 고정관념들, 유대신앙의 전통들, 생활 행태들과 기독교 신앙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 점을 극복하고 오직 예수 안에 모든 이들이 하나로 연합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은 그 동안의 편견을 철저히 깨어 부숩니다. 율법으로 대변되던 유대인의 구원관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이가 구원받을 수 있고 이는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별하지 않고 종과 주인,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일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연합의 모습이며 서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어디에 있느냐?”라는 전제가 중요하다고 했지요?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집니다.

저는 이방인이라는 말이 참 불편합니다. 사실 이방인의 사전적인 의미는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이방인’이라는 말, 요즘 그 비슷한 말로 ‘불신자’라는 말이 있지요 이 말 또한 참 불편합니다. 마치 단어 자체에서 불교를 믿는다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뜨거운 지옥불에 들어가야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미 2000년전에 예수님과 바울에 의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 허물어 졌듯이 지금도 신자와 불신자의 벽을 좀 허물 필요가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신자라고 다같은 신자가 아니고 불신자라고 다같은 불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와 비슷한 개념 중에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말이 있지요 누가 정상인인가요? 누가 비정상입니까? 굉장히 모호한 개념인데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입니다. 솔직히 여기 모인 우리 중에 정상인의 기준으로 봤을 때 흠 없는 정상인이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남자 키 180센티 미만은 루져라고 하던데? 그럼 저도 루저이고 비정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치명적인 결점이 있기 마련인데말입니다. 하여간 저는 정상/비정상의 구분 같은 것은 기독교 신앙하고는 조금 먼 듯한 개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 스스로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것! 이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 아니겠습니까?

다음은 지난주에 우리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그린 토마토의 그림입니다. 과연 어떤 토마토가 정상 토마토이고 어떤 토미토가 비정상 토마토 인가요? 모두 조금씩 다르지만 저마다 훌륭하고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예전에 제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십니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한 장애인 분을 만나서 함께 식사를 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그분은 어릴 때부터 크리스챤이셨습니다. 청소년기에 어떤 사고로 휠체어 장애인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분의 고백을 듣다가 “명백히 말하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십니다!”라고 소리치는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저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장애인이었던 저로서는, 또 차별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격한 반응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그분의 이야기가 마치 신성모독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시다는 이야기를 하며 어떻게든 그 분을 설득해 보려 하였지만 결국 설득하지 못하였고, 그 분의 아픔과 상처, 차별 당하는 그분의 일상을 나누면서 오히려 제 가슴 깊은 곳에 “혹시 하나님이 진짜로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품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까? 아니면 차별하시는 분입니까? 저는 이제와서 다시 고백하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고 확신합니다. 다만 이 시대 인간의 탐욕과 서로에 대한 편견이 힘없는 이들을 차별하는 시대 인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한 3년 정도 “토마토학교” 라는 곳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토마토’는 ‘토요일 마다 토닥토닥’이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토마토학교는 매주 토요일마다 발달장애 아동들과 만나서 나들이도 가고, 함께 빨래도 하고, 미술프로그램도 하고, 요리도 하는 일종의 주말학교인데요. 저는 그 곳에서 대표교사로 한 3년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 지난 주 저희 고난주간 금식 헌금도 여기 토마토 아이들의 간식 후원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토마토 학교 활동을 하다 보니 저는 발달장애 아동의 부모님들과 대화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장애 당사자인 아이들이야 의사소통이 거의 안 되기 때문에 주로 부모님들과 아이들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머니들의 가장 큰 걱정은 그겁니다. 자기가 늙거나 병들어서 죽으면 홀로 남겨질 아이 때문에 지금부터 너무나 두렵고 불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어머니는 자기 소원은 이 아이보다 단 하루만이라도 더 사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아이에 대한 걱정을 호소합니다. 이들이 장애아동을 키우면서 가장 힘겨운 점은 바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라고 합니다. 장애아동이라는 사람들의 눈빛 때문에 몇 년간 집밖에 거의 나오지 않은 부모님도 계셨습니다.

사실 효율성, 경쟁력, 세계 1등, 최고, 킹왕짱을 외치는 시대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오로지 돈을 잘 버는 것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와 기준이 된 시대에서 짐짝 같은 존재로 치부되어 버린 존재들. 요즘 같이 빛의 속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생활방식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감히 버텨낼 수 없을 정도로 그 속도 자체가 장애인들에게는 위협적입니다. 거리의 신호등 건너기가 두려워집니다. 지하철 한번, 버스 한 번 타는 것 너무나 힘겹습니다. 지난 2001년부터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라는 것이 있었지요? 지나다니는 길을 막고 장애인들이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버스를 타고 싶다.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 차가 막혀 오도가도 못 하게 되어 화가 난 한사람이 차에서 내려 장애인들에게 항의를 합니다. 그러자 장애인 중 나이가 지긋한 한 분이 그에게 말합니다. “여보세요! 당신은 이 곳을 지나려고 30분을 기다렸겠지만, 저는 30년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바울은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이들이 하나라고 얘기 하는데 이것을 저는 교리적인 고백을 넘어 하나님의 마음 안에 들어있는 모든 존재,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자연은 하나같이 소중하고 서로 존재를 찬양하고 연대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차별한다는 것이 뭘까요? 꼭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는 떡을 두 개 주고 누구에게는 떡을 한 개 주는 것이 차별이 아닙니다. 그저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는 차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기 위해서는 딱 2가지만 조심하면 됩니다.

첫째는 우리의 시선입니다. 지하철에서 장애인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불쌍과 시혜 모드로 그를 바라보게 되지요? 마치 나보다 훨씬 못한 존재인양, 알 수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바라보게 됩니다. 사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 아무것도 없음에도 그를 무시하고, 나의 삶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나는 그나마 다행이야 따위의 안도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둘째는 내 안에 떠오르는 궁금증입니다. 사람의 궁금증이 얼마나 사악한지, 자신도 모르는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 바로 알 수 없는 궁금증 안에 들어 있습니다. 장애인을 만나면 왠지 꼭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의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이 그의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 놓고 그로 인해 다시금 안 좋은 기억을 떠 올리게 하고, 수치감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아닐진대 차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것을 미쳐 감지해 내지 못합니다.

거북이는 느림보가 아니라는 사실, 장애인 또한 영원히 장애인은 아니라는 사실

하나님께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기도제목이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갈 희망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