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십시오] 좋은 종교 - 깨닫지 못함의 정반대 3

by 좋은만남 posted Apr 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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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드 멜로 지음 / 김상준 옮김 / 분도출판사

이 시대 잊혀진 영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영성을 소개합니다. 깨어있는 성도도 성숙하기 위하여 연재하는 이 글을 통해 영성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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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종교 - 깨닫지 못함의 정반대 3

 아무튼, 테이프를 듣고 나가지도 선생은 더 평할 것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내가 호감을 느꼈던 오십 대의 한 신부가 말했습니다. “토니, 한 가지 사적인 질문을 해도 되겠소?” “그러십시오.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않겠습니다.” “면접한 그 여자, 예쁩디까?”
 솔직히 그때 난 누구의 외모에 마음 쓰지 않는 그런 발육 (혹은 미발육) 단계에 있었다구요.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리스도의 양떼 중의 한 마리 양이었죠. 나는 목자였고, 나는 도움을 베푼 거라구요. 훌륭하잖아요? 우리가 훈련받은 대로. 그래서 난 말했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던 게로군요?” “뭐라고요?!”
 내가 어느 개인을 좋아하고 말고가 내게 절실했던 적은 없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사람을 싫어한 기억은 있지만 내 태도는 대체로 중립적이었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그 테이프 때문이오.” 우리는 테이프를 또 들었습니다. “당신 목소리를 들어 봐요. 어느 정도나 부드러웠는지 살펴보세요. 화가 나 있었잖아요?” 나는,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러고도 내가 그녀에게 말하고 있던 것이 비지시적이었다고? “다시는 오지 마시오”라고 말하고 있었던 셈인데, 그걸나는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그 사람은 여잡니다. 알아차렸을 걸요. 언제 다시 만나기로 돼 있지요?” “다음 주 수요일.” “내 짐작으로는 다시 안 올 것 같군요.” 그녀는 오지 않았습니다. 한 주일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또 한주를 기다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죠. 스스로 내 규칙 한 가지를 어긴 겁니다. 구조자가 되지 말라는 규칙을.
 나는 전화로 말했습니다. “테이프를 강의에 활용하도록 허락해 주신 일 기억하게요? 큰 도움이 되었어요. 동료 수강자들이 나에 대해 여러 가지를 지적해 주었거든요. (무엇을 지적당했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우리 면담에 어느 정도 나은 효과가 있을 것 같군요. 다시 오실 의향이 있다면....” “좋아요. 가죠.” 그녀는 다시 왔습니다. 싫은 감정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가시지는 않았어요. 방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깨달아 알고 있으면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깨달아 알고 있지 못하면 그것이 사람을 마음대로 합니다. 깨닫지 못한 것에 노예가 되게 마련입니다. 무엇을 깨달을 때 그것에서 해방됩니다. 그것은 여전히 거기 있지만 그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조종되지 않죠. 속박되지 않죠. 그게 다른 겁니다.

 깨달음, 깨달음, 깨달음, 깨달음. 그 과정에서 우리가 훈련받은 것은 참여적 관찰자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다소 도식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런 얘기죠. 내가 너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그 장면에서 벗어나 너를 바라보고 나는 바라본다. 내가 너의 말을 들을 때, 나로서는 너보다 나에게 귀 기울이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물론 너에게 귀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귀 기울이는게 더 중요하다.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으면 네 말을 듣고 있는 게 아니다. 혹은 네 말을 모두 왜곡하고 있는 거다. 나 자신의 조건화에서 비롯해서 너를 만나고 있는 거다. 내 불안정, 너를 조종하려는 내 욕구, 성공하려는 욕망, 노여움, 아마 내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감정들에서 유래하는 온갖 수단들도 너에게 반응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내가 네 말을 듣고 있을 때 내가 나에게 귀 기울인다는 건 그처럼 중요한 거다. 이것이 깨달음을 얻는 일을 우리에게 훈련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