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 무엇을 보고 있나요?

by 좋은만남 posted Apr 2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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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5일 부활절 제4주일 좋은만남교회 낮예배 설교

'이 봄, 무엇을 보고 있나요?'

이관택


본문: 누가복음 10장 21~24절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쁨에 차서 이렇게 아뢰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22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아들 밖에는, 그리고 아버지를 계시하여 주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 밖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따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지난 주간 지방의 한 목사님께서 모친상을 당하셔서 충청도 홍성에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 이미 서울은 벚꽃이 만발하였다가 지는 중이었는데,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만나는 들녘 마다, 또 산등성이마다 가득 메운 벚꽃, 개나리꽃, 진달래꽃 등이 만개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걸작품 가득한 이 세상의 놀라움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황혼의 들녘! 여기저기 눈발처럼 날리는 벚꽃들의 향연! 자동차 창밖으로 느껴지는 고향의 냄새! 이 모든 것이 조화로운 삶의 향기가 되어 완연한 봄이 온 것을 나에게 총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올해는 이상기후로 인해 ‘소빙하기가 왔다.’라는 불안감 섞인 소식들도 들려오고 있지만, 또 ‘아직도 약간은 쌀쌀하다’라는 말들을 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의 총천연색으로 만발한 생명들을 대할 때, "이제 완연한 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봄'! 참 그 단어가 정겹습니다. '봄' 따뜻한 느낌이 나기도 하고요! 뭔가 새로움을 가득안고 있는 새싹들이 움트고, 그 안의 신비의 생명력이 움찔움찔 거리는 느낌입니다. 보통 ‘봄바람이 참 싱그럽다!’라는 이야길 하지요? 사실 봄바람은 주로 황사일 확률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봄바람의 이미지는 싱그러움입니다. 가능성 가득한 계절, 꿈 많은 소년 소녀의 싱그러움을 간직한 계절 그것이 바로 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봄'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펴보니, 다름 아니라 '본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명사형태가 바로 '봄'이었습니다. 봄! 과연 무엇을 보길래 봄이라고 할까요? 봄이 봄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두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봄입니다. 여러분 1,2월의 황량한 황무지 땅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 아무런 생명도 찾아볼 수가 없는 그 땅,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그 황량한 땅 밑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수많은 생명들이 저마다 싹을 틔우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세균이며, 벌레며, 씨앗이며 저마다 싹을 틔우기 위해 보이지 않는 그 땅 속 깊숙한 곳에서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 있겠습니까? 생명의 신비는 그 곳에서 이미 가장 치열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요! 다시 말해 '봄'이라는 계절이 되어야만 우리는 그 생명의 신비를 우리의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봄에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바로 생명의 신비를 봅니다.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수많은 아름다움들, 싱그러운 봄기운이 바로 그 생명의 신비를 온 천하에 드러내고 보여주는 증거알니까요? 

 봄이 오지 않았다고, 우리 눈에 보여지지 않았다고, 그 생명의 신비가 황량한 땅에 가려져 있다고 그것이 없는 것,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봄은 그 생명의 신비 자체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 우리로 하여금 더욱 희망차고 새로운 싱그러움들을 맛보게 하는 것이지요. 또한 그 생명의 열매를 기대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열심히 땅을 일구고 생명을 가꾸게 만듭니다. 본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그런 힘이 있지요. 이 봄날의 계절에게는 뭔가 기대하게 하는 힘, 뭔가를 소망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결국 땅 밑에서 움튼 생명은 싹을 틔우고, 하늘을 향해 자라고, 푸르른 잎을 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를 온천하에 드러내고자,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다시 말해 알쏭달쏭해서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절대로 알기 힘든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하나님의 뜻,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의 삶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제 2의 아담되는 예수를 통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할지, 사람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 성서를 통해 우리는 두 눈으로 이미 보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봄'! 우리 신앙인에게 ‘봄’은 바로 예수님의 존재 자체, 또 그의 삶과 그의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바로 '봄'입니다. 생명의 신비, 구원의 신비는 바로 '예수'의 존재를 바라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 봄,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나요? 오늘 주보 맨 앞장을 보시면 이런 말이 써 있습니다. "4월이 되니 만물이 눈을 뜹니다. 눈을 뜨지 못 하는 것은 사람 뿐입니다." 그 밑에는 약간 귀신 같은 사람이 눈을 뜨고 있네요 뭔가 보아야겠는데, 부시시하죠? 이 화창한 봄날에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또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오늘 성서의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따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이 말씀 아름답지 않습니까? 또 궁금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제자들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길래~ 신령한 예언자도,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조차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는 것을 제자들이 지금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 성서본문의 이전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이 구절의 앞부분은 칠십인의 전도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명령으로 제자 70명이 모든 성읍과 지역으로 2명씩 짝을 지어 나아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회개하라고 소리칩니다. 병든 자를 고치는 이적도 일으킵니다. 70명의 제자들이 모두 이러한 이적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1절을 살펴보면 이 일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크게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 자신과 함께 신앙의 여정을 동행하던 제자들이 자신이 선포하던 복음을 선포합니다. 평화를 빌어줍니다. 소외된 이들과 함께 눈물 흘려줍니다. 불의한 곳에 가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 경고합니다. 그 시대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을 깨끗하게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행하던 사역들을 그의 제자들이 지금 각 지역과 성읍에서 떠들썩하게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론 어떤 제자들은 실패하기도 했을 겁니다. 문전박대당하기도 했을 겁니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울먹이고, 자신의 사역에 불평하던 제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난 왜 이것 밖에 안 되지?라고 절규하던 제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역을 하는 과정은 그렇습니다. 예수 따라 산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인생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실패를 다시금 돌아보았을 겁니다. 소외된 이들의 친구였던 우리의 스승 예수님, 하지만 때론 도망가시기도 했지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에 의해 궁지에 몰리기도 수차례였습니다, 이적을 행하시고도 뭐가 두려운지 한시바삐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예수님의 모습을 그 동안 두 눈으로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길 가시는 것 보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실패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비록 절망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의 삶 속에서, 내 말 속에서 생명의 기운이 지금은 보여지지는 않을지라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보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예수님! 

 지금 나의 모습에서는 실제로 보여지지 않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스승 예수께서 가시는 길, 그 길, 그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황량한 들판, 그 밑에 움트기를 기다리는 생명의 움직거림의 존재와 같이 나 자신은 비록 지금 실패 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지만 내 안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계획, 생명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제자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지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그 눈은 복이 있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감춰져 있는 진리를 깨닫고 그렇게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내게 있는 절망, 불만, 불평, 다른 사람들의 시선, 나의 위치, 돈, 명예가 보이십니까? 하지만 그 밑에 움직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능력, 희망, 기대, 사랑, 소망, 신비는 보이지 않으십니까?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내 안에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그 눈이 있는 분, 상대방의 모습에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능력을 발견할 수 있는 그 눈이 있는 분! 예수님께서는 지금 복되다고, 그 눈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헬렌켈러를 아시지요? 3중고 시각, 청각, 말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헬렌켈러는 자신 쓴 수필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젊었을 때 단 몇 일간 만이라도 자신의 시력이나 청력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축복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의 연속인지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헬렌켈러는 좀 전에 숲에 다녀온 친구에게 묻습니다. 니가 다녀온 숲에 대해 이야기해줄래? 너무 궁금해서. 그러자 그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그런데. 평상시랑 비슷해"라고 말이죠. 헬렌켈러 그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내가 단 3일만 볼 수 있다면,   

" 첫째 날, 친절과 우정으로 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준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손으로 만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적인 천성까지도 깊숙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을 모두 보고 싶습니다. 오후가 되면 오랫동안 숲속을 산책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흠뻑 적시고 싶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둘째 날, 새벽 일찍 일어나서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가슴 떨리는 시간의 기적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으로 가서 손끝으로만 보던 조각품들을 보면서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예술을 통하여 사람의 영혼을 탐색해 보고 싶습니다. 그날 저녁, 영화나 연극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자 합니다. 내 손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알지 못한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싶습니다.

마지막 셋째 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내고자 합니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일상생활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도시의 여기저기에서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눈여겨보며 그들이 어떻게 일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고 싶습니다. 저녁이 되면, 다시 연극회관으로 가서 인간의 정신에서 우러나오는 희극의 함축된 의미를 감사하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는 헨렌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가슴 떨리는 시간의 기적”을 매일 매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저 지겨운 일상으로 생각되어 버리고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모든 순간은 찬찬히 살펴 볼 때 매우 놀라운 기적의 연속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헨렌은 이미 눈이 보이지 않지만, 헨렌의 눈이 보고 있는 그 눈은 복됩니다. 삶의 모든 순간을 감사할 수 있는 그 눈, 모든 생명을 신비롭게 느낄 수 있는 그 눈 모든 것에 희망을 가지고 기대할 수 있는 그 눈 그것이 진정한 '봄' 아닐까요?
 
위대한 유대교 신학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당연합니까? 나를 만나주고 있는 내 옆의 사람이 당연합니까?

여러분 이 봄,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들 중에 당연한 것이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당연하게 멍하니 생명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겨울에도, 그  황량한 들판을 보면서 그 속의 생명들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충만히 느껴야 하건만, 하물며 생명의 신비가 우리 앞에 깨어나는 이 봄에도 그것을 알라채지 못하는 삶! 얼마나 우리는 죽어 있는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하나님께서 이미 충만한 잠재력과 기대를 간직하고 바라보고 계시는 나의 가족을, 나의 친구들을, 또 나의 동료들을 아무런 설렘과 기대 없이 바라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다시 물어 보지요? 여러분은 이 봄, 무엇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하나의 글을 살피면서 말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지난 목요일 홀로 교회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목사님의 둘째 아들 혁이가 갑자기 사무실에 종이 한 장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혁이는 글쓰기가 하고 싶은데, 전도사님 옆에서 그냥해도 되나요? 하고 되묻더군요. 나는 누가 숙제를 내주거나 글쓰기를 하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스스로 하고 싶어서 글쓰기를 한다고 이야기 하는 혁이를 보면서 아주 그냥 신기하게 보면서 마음껏 글쓰기를 하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글쓰기의 주제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아 진짜 놀랍지요? 어찌 이런 신동이... 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여간 혁이가 완성한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생명에 글. 생명은 하나님께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작은 것으로부터 커진 다음 죽게 된다. 그 때 동안 즐기는 것이 인생이다. 이게 내가 살아 본 인생이다."

 여기 그림도 넘 이쁘고, 혁이의 생각도 너무 아름답지요 하지만 결국 결론은 혁이가 살아본 인생이라는 겁니다. 혁이가 본 인생 여러분 이 봄에 무엇을 보십니까? 여러분이 본 인생은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잘 보십시오! 복된 눈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세밀하게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