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니 드 멜로 지음 / 김상준 옮김 / 분도출판사
이 시대 잊혀진 영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영성을 소개합니다. 깨어있는 성도도 성숙하기 위하여 연재하는 이 글을 통해 영성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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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종교 - 깨닫지 못함의 정반대 4
반드시 자신의 어딘가 공중에 떠돌고 있는 것처럼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얘기를 대강 이해하기 위해 한 노련한 운전사를 상상해 봅시다. 차를 몰면서 그는 뒷자리에 앉은 사람의 말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토론까지 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완벽하게 도로 표지판들을 인식합니다. 곤란한 어떤 일이라도 벌어지거나 어떤 소리, 굉음뿐 아니라 어떤 잡음이라도 들리면 즉각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뒷문 잘 닫았나?” 라고 묻게 되죠.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요? 계속 의식하고 있는 겁니다. 방심하지 않는 거죠. 주의의 초점을 대화 혹은 토론에 모아져 있지만 의식은 더 널리 확산되어 있는 거죠. 온갖 사물을 수용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건 정신 집중이 아닙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명상법들이 정신 집중을 가르치지만 나는 그걸 경계합니다. 거기에는 사나운 강요가 들어 있고 나아가 자주 조종과 제약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건 깨달음이고, 그건 정신 집중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정신 집중은 하나의 집중 조명이죠. 의식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어떤 것에라도 열려 있고 그래서 그런 것에 의해 산란해질 수도 있죠. 하지만 깨달음을 실천하고 있다면 열려 있으면서도 결코 산란해지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작동되어 있을 때는 혼란이란 다시는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항상 그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 나무들을 보고 있는데 또한 무슨 근심도 하고 있다고 합시다. 내가 혼란해질까요? 내가 나무들에 정신을 집중할 생각일 경우에만 혼란해지죠. 그러나 내가 심란하다는 것도 깨닫고 있으면 그것은 전혀 혼란이 아닙니다. 주의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그저 깨닫기만 하십시오. 어떤 일이 염려스럽게 되거나 곤란한 일이 생길 때 즉시 경계하게 됩니다.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 의식 속에 부정적인 감정이 유입되는 순간 경계하게 되죠. 저 노련한 운전사처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자기를 자기 자신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은총을 하느님께서 주셨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어린이의 말을 들어 보면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두 살 난 아이가 “토미는 오늘 아침 밥 먹었다” 합니다. 제가 토미이면서도 “나”라고 하지 않고 “토미”라고 삼인칭으로 말하죠. 신비가들도 그렇게 느낍니다. 그들은 자신과 구별하였기에 평화롭습니다.
이것이 성녀 데레사가 말한 은총입니다. 이것이 동양의 신비가 스승들이 우리에게 발견하도록 촉구해 마지않는 “나”입니다. 또 서양의 신비가 스승들도! 그 가운데 한 분으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꼽을 수 있죠. 신비가들은 “나”를 발견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