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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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Put yourself in the place!

성서본문 : 누가복음 19:1-6
1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2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3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4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6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들어가며 :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적셔주시며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을 건강하게 하시는 하나님 어버이의 사랑과 자비가, 오늘 봄기운이 완연한 이 좋은 날에 그 앞에 나와 머리 숙여 예배하는 이들에게 충만하게 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설교제목을 영어로 잡아본 것 같습니다. 설교라기보다는 무슨 영어 강좌 같은 느낌이 듭니다. 만 2년 넘게 용산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군생활을 했다고 하면 제가 영어를 아주 잘 하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운전병이라서 영어를 할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운전병이 쓰는 영어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이지요. 운행과 관련된 말과 차량 정비에 관한 말이 대부분입니다. 그래도 현직 장성 혹은 퇴역 장성 등 고위급 인사들을 주로 태우고 다녀서 나름대로 영어를 좀 준비했습니다. 주로 많이 사용하는 말은 ‘어디로 모실까요?’, ‘언제 모시러 올까요?’입니다. 이 말을 고급스럽게 잘 준비했지요. ‘Where would you want to go to, sir?’, ‘What time do you want me to come, sir?' 문법에도 맞는 것 같고(맞나요?) 제법 경어를 써서 작문을 하여 외웠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고참들이 하는 것을 보니까 그냥 ‘Where to, sir?’, ‘What time, sir?’ 이더군요. 참 싱거워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는데 좀 우스워 졌습니다.

들어가서 : 오늘 설교제목은 ‘Put yourself in the place’로 put on이라는 숙어를 사용하는 영어입니다. 원래는 ‘put oneself in one's place'라는 숙어로 ‘누구를 누구의 자리에 놓아보아라’ 즉 ‘누구의 입장이 돼봐라’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과 소통하는 좋은만남’이라는 주제어구를 정해놓고 소통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런데 소통이라는 것이 말은 쉽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소통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에 비로소 소통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Put yourself in the place’라는 이 말을 매우 중요하며 또한 성경적인 말씀입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지요. 어떤 사람인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주일학교에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름이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관장이었던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지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고 싶었습니다만 키가 작아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길가의 뽕나무에 낑낑대며 올라갔습니다. 그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예수님이 그 길을 지나가시다가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 앞에서 멈춰 서십니다. 그리고는 뽕나무 위의 삭개오를 올려다 보시고는 ‘내려와라, 오늘은 너희 집에서 머물겠다’고 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전혀 뒤바뀐 낯선 광경을 보게 됩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항상 다른 사람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삭개오를 볼 때 항상 내려다 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입장이 바뀌어서 예수님이 삭개오를 올려다보고 계십니다. 삭개오를 올려다보시는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항상 사람들을 올려다보고 또 항상 사람들의 내려다보는 시선을 받으면서 살아온 삭개오의 마음을 느끼시지는 않았을까요? 저는 분명히 예수님이 삭개오의 입장이 되어 삭개오의 아픈 마음을 온 마음으로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성서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인이라는 성에서 나오는 장례행렬을 보면서 외아들을 잃은 과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가엾게 여기셨다고 합니다. 또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려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못하고 그저 땅바닥에 뭔가를 쓰시다가 ‘누구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죄 지어 끌려 나온 여인의 입장에 서 보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바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성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바로 예수님의 정신이 있고 우리가 마땅히 배워야 할 신앙의 태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선포하시면서 특별하게 돌보아야 할 존재들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이방인을 학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그네와 이방인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들도 과거에 이집트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이었던 적이 있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했지만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고 당장 눈앞의 것만 생각하는데 입장 바꿔 놓고 보라는 것입니다. 종살이 하면서 고생했던 이스라엘이 떠돌이 나그네, 이방인의 입장을 헤아려주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참지 않으신다고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어린 아이들을 한 번 생각해봅니다.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면 재미있는 경험을 합니다. 이야기를 해주면 마치 자기가 그 이야기 속에라도 있는 것처럼 눈이 휘둥그래지고 초점이 멍해집니다. 이야기는 어느새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됩니다. 특히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면 마치 그 자리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돌오돌 떱니다. 밥이 되어 잠자리에 들면 들었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꿈에서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어린이들이 ‘Put yourself in the place’, 상대방의 입장에 자신을 세워보는 것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어린 아이들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어린 아이 같아짐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대북사업을 하는 단체에 몸담고 있으면서 참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북한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돈 좀 있고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고 우리 입장에서 북한을 불쌍하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이 별로 없었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 전방위적 봉쇄로 고립된 상태에서도 오직 자존심 하나로 오늘까지 버텨온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존심을 배려하지 못하고 ‘굶어 죽는 놈들이 자존심은 무슨 밥 먹여주냐’고 말하기 일쑤였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자리에 서보지 못하는 이상 이 민족은 통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통일을 해도 오히려 더 큰 일이 될 것입니다.

요즘 천안함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냉전주의자들의 언행과 행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민군합동조사단은 인양 바로 다음날에 어뢰가 분명하다고 확신에 차서 발표하였습니다. 어떤 정부 관계자라는 사람은 서해상에서 우리 군함에 어뢰를 쏠 나라가 북한 말고 누가 또 있느냐고 말합니다. 또 북한의 소행이라는 100%의 증거가 없다 하다라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겠다고 합니다. 보수적 일간지는 확인되지도 않은 정보에 기대 북한이 무슨 교육장에서 ‘인민군이 남조선에 뽄때를 보여주었다’고 말했다고 보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제는 2백 명이 임진각에서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짓고 규탄하는 대회를 열기도 했답니다. 여기에 미국 일간지 타임즈는 ‘천안함이 증거인데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냐’고 떠들어 댑니다. 여기저기서 당장 전쟁준비하고 북한으로 쳐들어 올라가자고 난리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 북한의 심정은 어떨까요? 만에 하나라도 우리의 착오였다면, 북한의 입장이 되어 조금만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얼마나 섣부른 행동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원인이 밝혀지고 능거가 확보된 다음에 마음껏 떠들어도 달라질 것은 없을 텐데 섣불리 죽이네 살리네 할 때 그 말을 듣는 이들의 심정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결국 더 큰 대립과 갈등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2008년 전국은 촛불로 뒤덮였습니다. 촛불의 난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통령이라는 이가 소통하고 국민들의 입장에 서서 국민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명박산성이라는 컨테이너 박스로 소통의 통로마저 차단해버렸습니다. 왜 국민이 미국산 쇠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하고 왜 불안해하는지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국민들이 빨갱이들의 선동에 넘어가서 괜한 트집을 잡는다는 투였습니다. 역시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큰 다툼과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신앙적으로 질문을 받고 도전을 받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가며 :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만든 이유입니다. 그렇게 살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바로 다른 이들의 입장에 서서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교회에 잘 나오고 교회행사에 잘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행복하고 평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모든 사람의 인생을 경험할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고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고자 할 때에 우리 사는 세상은 바로 하나님 나라, 천국이 될 것입니다. ‘Put yourself in the place’ 영어 숙어 하나 외우시면서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신앙의 결단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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