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6일 성령강림절 제2주/ 평신도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나의 몫소리'
이관택
본문: 욥기 42장 1~6절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4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여정, 특히나 그 사람의 신앙 여정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저는 두 가지가 생각납니다. 저 사람과 함께 하신 하나님, 나와도 함께 하시는 구나! 그러면 그 동안 나의 신앙 여정은 어떠했지? 라고 하면서 그 동안 나와 관계 맺었던, 또 내 삶의 특별히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존재가 조금 더 애틋하고 가깝게 느껴지곤 합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저 사람이 만난 하나님과 내가 만난 하나님은 참 다르네’라는 생각입니다. 사람마다 삶의 자리가 다르고 살아 온 역사가 다르기에 느껴지고 고백하는 하나님이 다른 것이 당연하건만 조금 놀랄 때가 있지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오늘 복 있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나눈 오호숙 권사님의 신앙여정 가운데 여러분 각 자는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바라건데 우리들의 너무나 귀한 인생의 길, 그 신앙여정 가운데 여러분과 함께 하셨고 지금도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가슴깊이 느끼셨길 바랍니다. 또한 여기 있는 우리 모두 함께 가는 길, 어떤 사람은 조금 느리게 걷고 어떤 사람은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걷고, 또 어떤 사람은 잠깐 낮잠을 자기도 하는 이 길, 조금씩 방식은 다르지만 그래도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함께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옆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가슴 벅찬 좋은만남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아차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 욥의 이야기입니다. 참 험난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잘 섬기고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가족을 잃고, 결국에는 건강까지 잃어버린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 바로 욥이지요. 더군다나 친한 친구들이 그러한 욥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와서는 욥이 이러한 어려움을 당한 이유는 욥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네가 지금 너무 어렵고 힘들지? 우리도 안타깝게 생각해. 그러게 욥아 좀 잘 살지 그랬냐!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욥의 죄 때문에 벌을 내리신거라 말합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욥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원망과 불신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이를 어쩝니까? 욥이 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뿐이었는데, 그것조차 완전히 부정당합니다. 욥기 42장 중 대부분은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알길 없는 인간들의 말다툼과 논쟁이 지루하리 만큼 길게 길게 욥기 전반에 걸쳐 다루어집니다. 각자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각 자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각 자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참으로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럴수록 욥은 더욱 더 미칠 노릇입니다.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등장합니다. 욥과 하나님이 대면하는 순간입니다. 그 동안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하나님, 살아오면 수많은 사람에게서 들었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장님 코끼리 만지듯 더듬거리며 자신의 말을 확신했던 욥은 이제야 비로서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너무나 확신했던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며 자신의 상상보다, 자신의 이성보다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존재를 가슴 가득 만났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메시지는 결국 인간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정확히 정의내릴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욥의 신앙여정을 통해 불안해 하는 모습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신앙인을 봅니다.
가끔 자신의 신앙을 너무 확신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지요. 조금 무섭기도 합니다. 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요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기총이라는 곳에서 얼마 전 조선일보에 그 드라마 상영을 금지 시켜야 한다고 대문짝만한 광고를 냈습니다. 이유는 그 드라마에 동성애자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것은 신앙에 위배되고, 동성애가 마치 전염병처럼 이곳저곳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라는 식의 확신은 결국 나와 다른 신앙 나와 다른 성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의 존재마저 부정합니다. 참으로 무섭지요.
하지만 신앙은 보이지 않고, 표현 불가능한 신비에 대해 인정하는 과정입니다. 나침반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제대로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어떴습니까? 북극을 가리키는 초침이 계속 흔들거리지요 한 곳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쩔줄 몰라하고 망설이는 듯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고장난 나침반은 정지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의 신앙을 너무 확신하다가 하나님을 보지 못한채로 말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 앞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전도사인 제가 아마도 그럴 경우가 가장 많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욥처럼 더욱 하나님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겠지요
오늘은 감리교 교회력상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 주일’은 1979년 3월16일 감리교 총회 결의에 따라 교회의 성장과 성숙, 사회와 민족 구원을 위해서 쓰임 받는 성도가 되도록 평신도의 정체성과 사명을 재인식하고 결단을 촉구하는 주일로 지키고자 탄생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좋은 취지로 정해진 주일이지요. 하지만 저는 ‘평신도’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평신도’라는 말이 좀 이상하지요? 평신도는 과연 누구입니까? 단어의 맥락상 평범한 신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평범한 일반 신자를 가리키는 것이겠는데요 그렇다면 평범한 신도가 아닌 비범한 신도도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바로 소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목회자들이 자동적으로 이 비범한 신자에 해당합니다. 과연 저와 방현섭 목사님만이 우리 좋은만남교회에서 비범한 신자일까요? 앞서 우리에게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신 오호숙 권사님은 평범하고, 지금 말하고 있는 저는 비범한가요?
사실 ‘평신도’라는 말은 지극히 목사 중심적인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교회에 목회자가 기껏해야 1~2명일 텐데 그 목회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도들을 평신도로 칭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목회자와 목회자가 아닌 신도를 구분 짓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단독자로 서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각기 비범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가 개신교도인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제가 가톨릭의 단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가톨릭교회는 사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바로 아뢰면서 회개할 수 없지요.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고해성사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 받을 수가 있습니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마틴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죽음을 불사하면서 얻어낸 것이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누구도 없고, 하나님과 내가 직접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에는 사제를 통해, 교회를 통해, 기독교의 전통을 통해 하나님과 만날 수 있었던 신앙인들은 이제야 비로서 ‘내가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존재성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전에 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맘껏 부르지 못하는 존재였다면 이제는 내가 맘껏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의 죄를 아뢰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몫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은 목소리라고 하지만 목소리 큰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듯이 이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 노예, 여성 등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고 하지요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한다는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 존재의 소리, 내 생명의 소리를 뜻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몫소리라는 말은 생명과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지금 힘들어서 일을 도저히 못하겠다고 외치는 목소리, 나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목소리! 이 소리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 달라는 외침입니다. 저는 성당뿐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목회자가 아닌 신도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다고 느낍니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를 함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좋은만남교회는 어떻습니까? 저는 소망합니다. 우리 좋은 만남교회에서는 모든 성도님들께서 목사 전도사 장로 집사 성도 청년 어린이를 막론하고 모두 저마다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길 바랍니다. 각 사람의 존재성이 이 교회를 통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재능과 은사가 교회 울타리를 넘어 삶의 자리 곳곳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몫소리를 내되, 그 이야기만을 확신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이야기에 대한 성찰 그 과정이 바로 기도일 것인데요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하고 응답을 받는 과정을 갖는 것은 바로 자기가 내고 있는 목소리에 대한 책임일 것입니다.
함께 신앙생활하는 저희들이 욥과 욥의 친구들처럼 서로의 이야기만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반목과 불화를 일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직접 마주하는 경험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이 신앙여행의 동행자로서 멋진 만남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만남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사항으로 좋은만남 매일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알아가는 것은 어떨까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