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니 드 멜로 지음 / 김상준 옮김 / 분도출판사
이 시대 잊혀진 영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영성을 소개합니다. 깨어있는 성도도 성숙하기 위하여 연재하는 이 글을 통해 영성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1025-0620
몽유병
성서는 항상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깨어날 때까지는 성서가 이야기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성서를 읽고 성서를 근거로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깨어나야 합니다. 정녕 깨어날 때 그 뜻을 알아듣습니다. 현실도 마찬가집니다. 현실을 말로 옮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무언가를 행하는 게 낫다고요?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단지 부정적 감정들을 제거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동에 뛰어들었다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합니다. 사랑에서가 아니라 부정적 감정들에서 출발하는 까닭입니다. 죄, 분노, 증오에서, 불의에 대한 의식 등등에서. 행동하기 전에 자기의 “존재”를 확인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잠들어 있는 사람이 행동에 나설 때는 한 난폭을 다른 난폭으로, 이런 불의를 저런 불의로 대체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또 그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말합니다. “네가 구원받게 (혹은 깨닫게, 혹은 표현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되는 것은 너의 행동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너의 존재에 의해서다. 네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네가 행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네가 무엇이냐에 의해서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가 주고 하는 것들이 여러분에게 어떤 득이 될까요?
바울로의 말을 상기하십시오. “내 모든 재산을 희사하고 내 몸마저 내주어 불사르게 한다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중요한 것은 행동들이 아니라 존재입니다. 그 다음에 행동에 뛰어들 수도 있겠죠.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겠죠. 깨어날 때까지는 그걸 결정할 수 없는 겁니다. 불행히도, 세상을 바꾸는 일에만 모든 강조가 집중되고 깨어나는 일은 거의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깨어날 때 무얼 하고 무얼 하지 말지 알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어떤 신비가들은 퍽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저 사람들에게 보내지지 않았다. 바로 지금 내가 할 일을 할 뿐이다.”와 같은 말씀을 하신 예수 같은 분이 그렇습니다. 어떤 신비가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신비스럽게도 어떤 신비가들은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어떤 신비가들은 봉사에 나섭니다. 우리는 결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들 자신에 대한 법칙인 겁니다. “전투의 열기 속에 뛰어들되 너의 마음은 신의 연꽃 발치에 머물게 하라”라고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