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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4일 성령강림절 제6주 및 맥추감사절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무지개 꿈을 그리며'

이관택

본문: 창세기 9장 11~16절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다.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및 너희와 함께 있는 숨 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13 바로 무지개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둘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가 될 것이다. 14 내가 구름을 일으켜서 땅을 덮을 때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나면, 15 나는, 너희와 숨 쉬는 모든 짐승, 곧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날 때마다, 내가 그것을 보고, 나 하나님이,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 곧 땅 위에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세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혹시 영화 '시'라는 작품을 보신 분이 계십니까? 윤정희라는 여배우가 나오는 영화인데요. 나이가 예순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소녀의 감수성을 발휘하는 그 배우의 매력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흐르는 시간의 무게를 무색하게 만듭니다. 지난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영화 '시'에서 윤정희씨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점점 기억과 삶의 감각을 잃어가는 60대 여인 '미자'역으로 나옵니다. 손에 들고 있는 이 전화기가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미자의 병세는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미자는 우연히 동네 문화원에서 진행하는 '시 쓰기' 강좌를 듣게 됩니다. 그녀는 비록 시에 대해 무지랭이였지만, 금새 시 쓰기에 푹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녀는 일상에서 지나쳐버린 소소한 것들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냥 지나친 꽃 한 송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 조각, 시는 그야말로 그녀를 둘러싼 모든 생명과 존재, 그 하나하나에 저마다 의미를 부여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병으로 인해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지고 이제 마지막을 향해 치달아 가던 그녀의 인생에 '시'는 전에 없던 새로운 삶의 희망들을 볼 수 있는 눈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영화에서 미자는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익숙했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잃어버리게 되지만, 결국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존재를 신비롭게 바라보고, 그로 인해 더 큰 세상을 알게 됩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미자는 하물며 시를 쓰면서도 세상의 신비를 보는 눈이 생겨나는 데, 알츠하이머라는 절대적 한계상황에서도 삶의 절망을 이겨내고 희망을 타진하는 가능성들을 발견하는데,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내 삶은 과연 어떠한가? 라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신앙은 마치 시를 쓰듯, 나와 마주하는 온 생명들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닐까?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의 얼굴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순간 포착해 내고 그 미소에 담긴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지금도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냥 소소하게 존재하고, 당연한 듯 지나가는 객관적인 '사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기적과 같은, 나를 위한 '사건'으로 고백되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난 주 수요성서대학에서는 목사님께서 시를 써오라는 숙제를 내 주셨죠. 그래서 참여하신 성도님들이 각 각 저마다의 고백이 담긴 시를 한 편씩 써 오셔서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인 랭보는 이 세상에 시 만큼 위대한 삶은 없다고 얘기했는데요, 과연 그 말대로 지난 수요일 우리 교인들이 써온 시 낭독을 들으면서 각 자의 시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과 삶을 성찰하는 그 모습들이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편을 소개하자면 일단 저작권 때문에 제가 쓴 시를 간단히 낭독해 볼 까 합니다.

존재의 흔적따라

                                                                       이관택

세상 모든 생명을 존재케 하는 힘

보이지 않는 몸부림에 주목하고,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표현 불가능한 존재

그 존재는 지금 이 순간도 세상을 창조하며, 구원의 발길을 내달린다.

하지만 그 내달림의 흔적은 어디에.

표현 불가능함은 곧 침묵이니 하나님의 흔적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남대문 지하상가 곰팡이 가득한 한쪽 귀퉁이에 앉아 있는 주름 많은 한 남자에게서

포크레인 앞에 무릎 꿇고 더는 갈 때가 없다고 탄식하는 젖먹이를 등에 진 여인에게서

전쟁이 싫다고 소리치다가 경찰 여섯 명에게 끌려가며 몸부림치는 젊은이에게서

급식비 보조 받아야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는 선생님의 사무적 언질속에 고개를 푹숙인 아이에게서

거기서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라나

도대체 언제까지 그 흔적 좆기만 해야 하나

세상 모든 생명을 존재케 하는 힘

보이지 않는 몸부림에 주목하고,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표현 불가능한 존재

이 존재는 분명히 지금도 있을 곳에 편만하게 있으며, 충분히 존재한다.

흔적을 찾게 하소서.

희망의 갈피를 보이시어 울먹이지 않게 하시고, 억울함에 몸부림치지 않게 하소서.

그 흔적의 존재, 이미 보이셨기에, 곧 보이실 것이기에

숨 쉬는 것이 당연하듯 존재에 대한 감사도 당연한 것

하나님의 흔적은 또 다시 아래로 흐른다.

나도 그 흔적 따라 아래로만 갈 수 있다면

예 다른 분들의 시들도 홈페이지에 올렸으니 한 번 감상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우리 가끔 시를 썼으면 좋겠습니다. 또 시를 쓰듯 신앙생활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시만큼 위대한 삶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큼 위대한 시도 없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직장을 가기 위해, 때론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오늘도 내가 살아있구나'라는 감격으로 하루를 시작 할 때가 그리 많지 않지요.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죠슈아 헤셀이라는 히브리 신학자는 우리 인간의 삶이 불행하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과 습관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항상 깨어있으라!”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바로 오늘 이 시간, 또 바로 이 곳에, 내가 '살아있음'을, 또 '존재'하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내가 살아있구나'라고 깨달으며 안도감을 느낀 사건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종합검진을 받으면서 느꼈구요, 다른 하나는 유명 연예인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여러분이 혹시 환자복을 입고 수면 내시경 검사를 하기 위해 입에 호스를 꼽고 목에 마취를 하고 누워서 20분 동안 아무도 없는 공간에 움직이지 못한 채로 방치되어 있게 된다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실수를 했는지, 아님 환자들이 밀렸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 20분 동안에 별별 생각이 다 들더라구요. 혹시 마취가 안 되면 어떡하나? 마취는 되었는데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검사 결과 암이 발견되면 어쩌나? 그 순간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절실해 지는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접하면 어떻습니까? 그 동안 나 역시도 마치 죽어있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그저 해치우듯이 산송장처럼 살았으면서, 아무생각 없이, 나의 욕망만을 쫓아가는 좀비처럼 살았으면서도, 이런 일이 터지면, 그 사람 얼마나 힘들었을까 연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레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혀를 끌끌 차지 않습니까? 산다는 것 당연한 것 같아도 당연한 것 아닙니다. 내가 사는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 아닙니까?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하나님이 내게 주신 바로 이곳이 정말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곳에서 우리 함께 예배 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합니까? 뭔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나요? 마음 한구석이 절절합니까? 마치 감동 없는 시처럼, 느낌 없는 아침 햇살처럼. 살아있음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산송장처럼. 함께 예배드리는 교우들이 당연한 장면과 그림으로, 또 이 설교가 그저 당연한 울림으로, 느껴지지 않은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그저 당연한 이론적인 지식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힘이 없는 이유! 바로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내 삶이 항상 잠들어 있기 때문이고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을 보면서 힘주는 의미로 인사해보시죠. "당신 때문에 내가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의 방주 사건 이후 하나님이 노아와 그 자손들에게 다시는 이 땅에 홍수로 너희를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는 장면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온 세상이 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한다는 사실을 알고 열심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 믿음과 실천 때문에 모든 생명이 홍수로 심판받을 때, 방주에서 살아남게 되지요. 40일 동안 비가 내리면서 온 세상은 물에 잠깁니다. 하나님이 선별한 것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생명이 심판을 받게 되지요. 비가 그친 후에도 온 세상이 물바다이기 때문에 150일이나 배를 타면서 노아와 가족들의 심경은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산들이 모두 물에 잠기는 그 광경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다고 무조건 감사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이러한 비극과 기적을 체험하면서 최후까지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은 아마도 살아있음에 대한 이유를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왜 나를 살려두셨을까? 왜 나를 선택 하셨을까? 이제 이 방주를 나가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고민과 알 수 없는 두려움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무지개를 주시며 오늘 본문과 같이 약속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는, 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을 멸하지 않겠다! 지금 구름에 가려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에 무지개가 있으니, 구름이 아무리 땅을 덮어도 결국 그 안에 무지개를 보며 나와의 약속을 기억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나는요. 하늘 위를 가득 덮은 구름밖에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구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무지개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구름이 걷힐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믿는다면, 보이는 구름과 같은 힘든 현실에 절망할 수 없습니다. 그저 낙담할 수 없습니다. 요즘 들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갑니다. 사실 엄밀히 이야기 하자면 자살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 타살에 의해 우리 문화가, 가치관이 사회 분위기가 이미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형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살이라는 현상은 그러한 죽음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 뿐이지요. 먼저는 한 사람의 영혼이 완전히 죽어버린 상태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요즘의 유명 연예인들이 자살하는 횟수가 많은데요 그렇다고 하면 요즘 연예계가 과거에 비해 더욱 삭막한가? 아님 요즘 사람들이 더욱 심적으로 약한가? 아님 먹고 살기 편해져서 그런가? 그런 것 아니고요. 지금 시대가 사람들을 더욱 죽음으로 극렬하게 몰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극도의 경쟁이 우리를 휘감고 있구요. 돈과 부동산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성공이 사회의 전반적 언어로 통하고 있기 때문에, 또 사람의 외부적 조건을 저울질 당하면서 끊임없이 평가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것 이면에 진짜 소중하고 중요한 가치들. 사람다움, 인간적인 것, 사랑과 평화와 정의로 상징되는 모든 이가 수긍하는 가치들은 아무도 평가하고 있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아닙니까? 뭔가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 같지만 사실 별로 만족감이 없습니다. 남을 밟고 어딘가에 우뚝 올라서서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 주기는 바라지만 그 가슴 속에 진정으로 뜨거운 열정과 꿈이 없지요. 하고 싶은 것 별로 없습니다. 그저 좀비처럼 내 욕망에 이끌리어 살다가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주저 앉고 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악한 현실에 내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 그들을 덮고 있는 구름 뒤에 있는 무지개를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바램입니다. 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저는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사건을 접할 때 얼마나 큰 책임감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믿고 구름 뒤에 조만간 보여 질 무지개를 기다리며, 어떻게 하면 구름이 걷힐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또 기도하며, 삶으로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것입니다. 최소한 이야기 합시다. 지금 비가 오고 있다면 이 비가 멎기를 저 구름 뒤에 무지개는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고, 또 그 무지개는 분명히 존재하고 곧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혹시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이런 것 해보셨나요? 스크레치라고 하던가요? 도화지에 무지개 색색깔로 먼저 그림을 그리지요 그 위에 검정색으로 완전 까맣게 칠하는 겁니다. 보기에는 완전 까맣죠. 하지만 어떻습니까? 연필이나 송곳으로 그 까만 부분을 긁어내면 그야말로 무지개 색을 드러내며 아름다운 미술작품이 탄생하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한 무지개 약속의 이미지가 이 미술작품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우리 삶의 순간 순간이 얼마나 예술적이며 하나님의 큰 작품인지 마치 시처럼, 마치 스크레치 그림처럼 하나님과 약속 가운데 진행되는 삶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신앙여정이라는 점을 말씀 드렸습니다. 다음 주에 저희는 진짜 중요한 행사를 합니다. 한여름밤의 꿈 시즌 2를 진행합니다. 우리교회는 전교인 수련회를 한 여름밤의 꿈이라고 하거든요. 함께 꿈을 꾸어보자는 것이 취지인데요. 이번에 주제는 특별히 '무지개 꿈'입니다. 그냥 꿈도 아니고 무지개 꿈이라.

무지개 꿈의 첫 번째는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구름 뒤에 가려진 무지개를 소망하는 꿈,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망하는 꿈이 바로 무지개 꿈이지요.

무지개 꿈의 두 번째는 '다양성'입니다. 여기 제 팔찌가 무지개 모양의 팔찌인데요. 이는 다양성을 뜻합니다. 서로 다른 색깔이 모여야 비로서 아름다운 무지개를 이루듯이 각 자가 다른 생각, 다른 가치관, 좀 다른 사람들이 모여야 그 공동체는 더욱 아름다워 질 수 있습니다. 정원에 호박만 일열로 심겨져 있는 것이 아름답겠습니까? 다양한 꽃과 나무, 그리고 풀과 곤충들이 엉키성키 함께 모여 있는 것이 아름답습니까? 호박밭에 심기워진 호박은 효율성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효율보다는 조화의 하나님이시기에 더욱 다양한 이들의 만남과 조율을 기대하시겠지요. 이번 한여름밤의 꿈을 통해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더욱 의미있는 서로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의견차이가 있으면 토론을 하기도 하고, 다르지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내 생각의 틀을 넓혀가는 시간이 되는 그런 꿈을 꾸었으면 합니다.

무지개 꿈은 세 번째로 '희망의 상징'입니다. 무지개는 결국 비 온 후에 맑게 개인 날씨를 보여주는 상징아닙니까? 실상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조금씩 일구어 가는 구체적 실천을 보여야 합니다. 무지개 꿈은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들, 힘겨워 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상징으로 하나님의 뜻을 함께 나누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이 땅에 흘러넘칠 것이라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보이는 가장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꿈입니다. 신앙공동체는 다른 사람들, 특히 지금 현실이 너무 힘들어 막다른 길에 다다른 이들에게 희망의 근거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좋은 만남교회가 어떻게 하면 무지개와 같은 희망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함께 꿈꾸면 좋겠습니다.

무지개 꿈을 우리 함께 그려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삶 속에 예술적으로 무지개와 같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무엇을 원하실까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살아있음을 느끼며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뭐지? 라고 질문한 것과 같이 여러분이 이 좋은 만남공동체에 있는 이유를 한 번 일주일 동안 질문해 보시고 다음 주 토요일 함께 모여서 유쾌하고 즐겁고 감동적인 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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