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누구신가? / 출애굽기 3:13-14, 요한복음 3:8 - 방현섭 목사

by 방현섭 posted Jul 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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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은 누구신가?

성서본문(1) : 출애굽기 3:13-14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성서본문(2) : 요한복음 3:8

8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7)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들어가며 : 한없이 크고 넓은 사랑, 우리는 미처 깨닫거나 알아차리지도 못할 깊은 자비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이 자리를 감사드립니다. 기쁨과 감사로 이 예배에 참예하며 새로운 결단으로 참 삶의 발걸음을 옮기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 중에 광고를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갑자기 박아무개 장로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같이 유족을 위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광고를 마치고 사회자의 멘트가 이어집니다. ‘그럼 찬송가 252기쁜 소리 들리니를 부르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존재 자체로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입니다. 존재하지 않음으로 기쁨을 주는 존재도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기쁨과 감사를 드리게 되는 존재로 서로에게 마주할 수 있는 좋은만남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들어가서 : 우리는 매주일 마다 신앙고백을 합니다. 특히 좋은만남 신앙고백문을 만들어 그 것으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대신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는지 궁금합니다. 그저 교회 예배 순서의 하나이기 때문에 하라니까 하는지 아니면 정말 그 고백의 의미와 내용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마음을 열고 고백하는지 말입니다.

보통 신앙고백은 사도신경으로 하지만 어떤 교단은 사도신경을 인정하지 않기도 합니다. 어떤 신념 있는 사람은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특정 부분은 입을 꾹 다물고 고백하지 않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고백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마음으로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저는 주일낮예배 설교를 우리가 함께 마음을 모아 만든 좋은만남 신앙고백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들으시고 또 교회 공동체에 제안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지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고백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는 하나님을 하나님, 주님, 여호와 등등의 표현으로 뒤섞어 씁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도 별다른 생각 없이 하나님, 여호와, 주 등의 표현을 뒤섞어 사용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the God 혹은 a god 이라고 쓰는데 대문자 God의 경우에는 성서에 나오는 특정한 어떤 신인 이스라엘 백성이 믿었던 바로 그 신을 의미하지만 소문자 god은 그냥 신, 온갖 잡신 들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성서에 나오는 어떤 특정한 바로 그 신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이 그 신의 이름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들 간에 하나님이 맞냐, 하느님이 맞냐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이는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한반도에 1600년대에 들어온 천주교가 이미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선점했는데 1800년대에 들어온 개신교, 천주교를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개신교가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일신을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채용하여 번역을 하였지만 사실 그 원문이라는 것이 하나님이나 하느님이나 다 영어로는 god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 불필요한 다툼이나 논쟁이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성을 특히 강조한 호칭이라면 하나님은 유일하심을 강조한 호칭이겠지요. 하느님이라는 호칭이라고 해서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전지전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무엇이 맞느냐고 다투는 것보다는 우리 마음에 그 분을 어떤 분으로 모시고 있는가 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하나님이건 하느님이건, 그 신도 나름대로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알이나 아세라, 몰렉 따위의 우상도 이름이 있는데 그 전지전능하고 유일하신 분이 없겠습니까? 그 이름은 여호와, 야훼, 야웨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이름은 임시적이고 보류적인 것입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야훼, 혹은 야웨 등등으로 부르는 근거는 바로 오늘 읽은 출 3,14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혹은 나는 나라고 밝히셨습니다. 히브리어의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나는 되고자 하는 대로 될 나라는 뜻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싸울 것도 아니고 또 여호와도 아니라 나는나님이나 스스로있는자님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요? 그런데 왜 여호와라고 부르느냐하면 히브리어에 자음이 없던 시절에 쓰여진 단어인데 그 음(YHWH)이 불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매우 불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음도 잊혀졌고 모음도 없었는데 후에 히브리어에 모음이 생겨서 거기에 적당한 모음을 붙여 만든 것(YeHoWah, YaHWe)이 여호와, 야훼 등으로 발음이 된 것입니다.

그럼 주님이라는 표현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할뿐만 아니라 그 얼굴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다보니 성서를 읽다가 여호와라는 부분이 나오면 그냥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야훼라는 부분은 쓰여있기는 야훼라고 쓰여있지만 읽기는 아도나이, 즉 나의 주님이라고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을 사용하다보니 주님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이 되고 야훼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을 부르는 표현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고 성서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죽 들어보시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으신가요? 별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호칭에 관한 것으로 사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태도를 알게 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야훼냐 야웨냐 하는 따위의 문제들로 논쟁하고 다투고 미워하고 정죄하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의 지평과 우리 인간의 지평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고작해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하나님을 이런 저런 모습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포기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자신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다지만 우리 자신이 바라보는 시야의 넓이에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가 그만큼 커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팔레스타인 혹은 시내 광야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고작해야 하나의 부족의 신이나 혹은 전쟁을 관할하는 신 정도로밖에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야가 국제적인 무대로 넓어지게 될 때 국제적인 틀에서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자신들을 파괴시킨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심지어는 그리이스 로마제국까지도 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나라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틀 안에 하나님을 고정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어쩌니 저쩌니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사고의 틀을 보다 넓게 하고자 하는 시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한국에 방문하여 보수주의자들이 개최하는 평화기도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행한 부시의 연설도 문제이지만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가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산당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공산당을 없애 달라는 통성기도를 하기도 했답니다. 과연 하나님이 공산당을 싫어하실까요? 공상주의자들은 하나님과 관계 없이 이 세상에 나타난 무리들입니까? 공산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 마귀가 창조한 존재들일까요?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물도 아니기에 모조리 쓸어 없애버려야 하는 존재들입니까?

그건 한국이라는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아귀다툼하며 사는 작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 결코 하나님의 생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시야가 그렇게 짧고 좁으니 하나님의 모습도 자기를 좋아하는 이들만 좋아하고 그들에게만 잘해주고 자기에 반대하는 이들은 가차 없이 쓸어버리는, 굿판에서 무당이 불러내는 온갖 잡신과 진배 없는, 조잡하고 치졸하고 너그럽지도 않고 제물만 밝히는 그런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뭣하러 믿습니까? 오히려 죽여버려야지요!

나는 청년시절에 도무지 하나님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조차도 별로 감흥이 없었지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인간들의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개념이나 논쟁조차도 뒤어 넘어 계시는, 인간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그 너머에 계신 존재라는 생각을 하면서 큰 자유로움과 기쁨, 그리고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무의 하나님이라는 역설도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깨달음이 나의 신앙을 좀더 크게 해주었고 그에 따라 그만큼 더 크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나가며 : 하나님은 누구시냐고요? 저는 목사이긴 하지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넓이와 깊이만큼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집스러우면 하나님도 그렇게만 여겨집니다. 우리가 한반도라는 틀에서만 생각하고 사는 한 우리 하나님은 한반도의 크기만큼만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스스로 있는 분, 되고자 하시는 대로 되실 분이라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제대로 기억하고 그 앞에 겸손하게 머리 숙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고 우리 삶이 하나님의 넓이 만큼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 자신의 참된 고백이 될 수 있도록 넓고 깊은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간구와 고백에 응답하실 줄로 믿으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