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니 드 멜로 지음 / 김상준 옮김 / 분도출판사
이 시대 잊혀진 영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영성을 소개합니다. 깨어있는 성도도 성숙하기 위하여 연재하는 이 글을 통해 영성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1040-1003
침 묵 3
한 태생 소경이 내개 와서 묻습니다. “녹색이라는 게 뭔가요?” 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에게 어떻게 녹색을 설명할까요? 우리는 유비를 이용하죠. 그래서 나는 말해 줍니다. “녹색은 부드러운 음악과 같죠.” “오, 부드러운 음악 같은 거로군요.” “예, 싱그럽고 부드러운 음악이죠.” 두 번째 맹인이 와서 묻습니다. “녹색이 뭔가요?” 나는 부드러운, 매우 부드럽고 촉감이 좋은 공단 같은 것이라고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튿날 보니 그 두 맹인이 병으로 서로 머리를 때리고 있습니다. 한 맹인은 “이게 음악처럼 부드러운 거다”, 다른 맹인은 “이게 공단같이 부드러운 거다” 하면서 계속 때리고들 있는 겁니다. 둘 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죠. 안다면 입을 다물었겠죠. 그처럼 고약한 노릇입니다. 게다가 이를테면 어느 날 보니 그 장님이 정원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걸 보고 “아, 이제는 녹색이 무엇인지 아시는군요” 하자 “맞아요. 오늘 아침엔 녹색 소리를 좀 들었죠!” 한다면 더욱 고약한 노릇이죠.사실은 하느님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하느님에 대해 “아노라”기 때문에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못 보게 하는 마지막 장벽은 하느님 개념입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놓칩니다. 그것이 종교와 관련하여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이 복음서에서 “아노라”는 종교인들이 예수를 제거한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최고의 앎은 하느님을 알 수 없는 분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은 그걸 지겨워합니다. 깨달음은 너무 적습니다. 사랑은 너무 적습니다. 행복은 너무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말들도 사용하지는 맙시다. 환상, 오류를, 집착과 난폭을 떨쳐 버리는 일이, 깨달음이 너무 적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겁니다. 종교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어쩌면, 종교란 깨달음이, 깨어남이 없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입니다. 우리가 어느 지경에까지 떨어졌는지 보십시오. 도처에서 사람들이 종교 때문에 서로를 죽이고 있는 걸 보십시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모른다.” 무릇 모든 계시란 아무리 신성하더라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상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동양 격언에 “현자가 달을 가리킬 때 모든 바보들이 보는 것은 현자의 손가락이다”라는 말이 있죠.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