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0일 성령강림절 제20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악마의 유혹'
이관택
본문: 누가복음 4장 1~8절
1 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득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에는 시장하셨다. 3 악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4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5 그랬더니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6 그리고 나서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 7 그러므로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8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요즘 한 가지 사건이 교계를 매우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서울의 한 대형교회 목사가 여자 성도를 성추행했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는 그 동안 '한국교회를 이끌 차세대 영적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었습니다. 1만명이 넘는 청년들이 그 목사로 인하여 구름 떼처럼 모였습니다. 그 목사가 강조했던 영적인 순수성과 강도 높은 도덕성은 많은 청년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한 목사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나. 어떻게 목사라는 직분을 이용하여 한 여성을 성적으로 유린할 수 있었나. 참으로 당혹스럽고,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어느 한 목사의 타락상이 아닙니다. 이는 한국교회의 현재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또 지금 우리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저 말로만, 거룩하자. 말로만 사랑하자. 말로만 기도하자. 말로만 예배하자 이야기 했던 우리의 모습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되게 몸으로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근본적인 가치관으로 삼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그 목사와 얼마나 다릅니까? 결국 우리 역시 겨자씨 만큼의 유혹도 뿌리치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성서를 보면 결국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던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 극심하게 타락하는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권력 앞에 무너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이 그러합니다. 자신의 정욕 앞에 무너진 다윗이 그러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 사람들의 인기와 명예 앞에 그 신앙의 순수성을 다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모습 보시면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실까요? 우리 이 시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의 모습 보시면서 안쓰러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길 소망합니다.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한편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도,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무력감에 사로잡힙니다. 우리 자신 역시 갖가지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 땅에서 첫 번째로 겪게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광야에 가서 악마로부터 시험을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유혹을 당하는 일! 가만 보니 인간의 삶은 유혹의 연속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유혹으로부터 무력한가? 그것은 어떤 상황을 만날 때, 그것이 유혹인지, 유혹이 아닌지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유혹'이라는 것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그것이 유혹이라고 알아차리기만 해도 80% 이상은 극복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유혹 당하고 있구나!를 인식하면서 바람피는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지금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 있구나!를 인식하면서 회사 공금을 빼돌릴 수 있나요? 내가 지금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고 있구나!를 인식하면서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을까요? 사실 많은 경우 유혹을 당하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일단 유혹에 넘어가고 나면 일이 커지게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진짜 열심히 믿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예언자들이 들풀처럼 일어나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경고를 아무리 해도, 너희들 지금 가는 길! 잘못됐다고! 돌이켜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 믿고 있는데 무슨 소리야? 이런 겁니다. 그러면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바알도 열심히 섬기고, 아세라도 열심 섬긴 거죠. 근데 그게 우상인지 몰랐습니다. 예언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나를 향한 이야기인지 몰랐습니다. 결국 그러다 나라가 바벨론에게 홀라당 망하죠. 망하고 나서야, 포로로 끌려가면서, 그제서야 정신 번쩍 차리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가 그러한 배경 가운데 씌여진 성서입니다. 나라 망하고 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조의 고백을 다시금 하고 있는 것이 창세기입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아 내가 유혹에 빠졌구나 그래서 하나님 앞에 범죄했구나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유혹에 미혹되어 후회하는 순간들이 있습니까? 그나마 다행입니다. 회개와 반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악마에게 3가지 유혹을 받게 됩니다. 사실 우리 신앙인들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이 3가지 유혹에 너무 쉽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잠시 한 가지씩 살펴보죠.
첫 번째 유혹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보라'는 유혹입니다. 악마는 우리에게 생명 아닌 것으로 생명을 만들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여러분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 수 있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과연 하나님의 질서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드는 것을 용납합니까? 빵은 밀을 가지고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밀은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신명기 11장에 보면 성서기자는 하나님께서 봄비와 가을비를 철따라 내려주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맞게 내려주시는 분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만 만들 수 있습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요즘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생명복제를 하는 시대에 이르렀습니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다양한 품종을 개량하는 시대입니다. 생명 없이도 달결을 만들어내고, 우유를 만들어 냅니다. 마치 바벨탑을 쌓는듯한 이러한 시대! 우리는 우리 생명의 근본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현주 목사님께서는 이 부분을 해석하시면서 여기서 말하는 돌이 ‘누런 돌’ 바로 금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금은 곧 돈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결국 돈으로 하나님의 능력까지 살 수 있다는 착각이 악마의 첫 번째 유혹인 것입니다. 요즘은 돈을 가지고 빵을 사기도합니다만 돈이 빵을 실제적으로 생산해내지는 못합니다. 돈으로 생명까지도 살 수 있다는 악마의 유혹에 요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신앙인들조차 돈의 가치로 많은 것들을 판단하려드니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돈이 생명보다 우선시 되는 시대! 다시 말해 돈이 하나님 보다 우선시되는 시대! 그것이 바로 맘몬이고!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악마의 두 번째 유혹은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악마에게 절한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은 인간의 명예와 인기를 이야기 합니다. 결국 자신의 출세와 명예를 위해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사는 것! 악마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믿고 있다고 착각하면서도 우상을 섬기는 생활을 했듯이 요즘 우리 신앙인들의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교회는 다니는데, 마치 하나님 없는 것처럼! 자신들의 욕망과 탐욕을 위해서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착각하는 신앙!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신앙이 이 시대 교회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악마의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 보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진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마치 배우자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람이 그 사람을 의심하고, 집착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께서 계획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뭔가 특별한 기적을 체험하려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만 믿으면 모든 욕망이 채워질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 믿는 다는 것은 바로 나의 욕망을 들여다 보고, 그 욕망을 점점 신앙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거늘. 하나님 믿을수록 이상하게도 욕망이 점점 커집니다.
사실 우리 신앙인들은 앞에서 말한 악마의 유혹들을 상당히 경계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악마의 유혹은 그 속성자체를 '알아차리기' 매우 힘듭니다. 예수님이 악마에게 유혹 당하는 모습을 보면, 일단 지금 예수님 상태가 어떻습니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신실함이 가장 가득했을 때 아닙니까? 아! 내가 지금 세례를 받았다. 이제 나의 사역이 시작이구나! 자신감이 가득할 때입니다. 악마는 이 때, 유혹을 하지요. 교만함과 자신감은 한 끝 차이입니다. 자신감은 결국 유혹의 조건이 됩니다. 유혹에 빠지는 즉시 자신감은 교만함이 되어버립니다. 교만함은 곧 죄를 행하게 되는 씨앗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로 인해 자신감이 가득 차 있을 때 있잖아요? 아 내가 이건 좀 잘했다 싶을 때! 그 때가 악마의 유혹을 가장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타락할 확률이 높을까요? 부자가 타락할 확률이 높을까요? 내가 좀 힘들고, 뭔가 상실되었을 때는 누군가에게 상처 줄 수 있는 확률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왜냐면 본능적으로 눈치를 살피게 되니까요. 나의 몸짓과 말씨 하나에 엄청 신경씁니다.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고 조심스럽지요. 하지만 자신감에 충만한 사람은 그만큼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해 신경쓰기 어렵습니다. 결국 그 틈에 악마의 유혹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이 때 악마는 그 첫 번째 유혹을 하는 겁니다.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보라" 이 얼마나 적절한 유혹입니까? 배고픈 사람에게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라니. 유혹의 속성은 매우 달콤합니다. 입에 쓴 것은 우리의 정신을 번쩍나게 해도, 입에 단 것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합니다. 일단 사고가 멈춰버리는 겁니다. 유혹의 속성은 우리로 하여금 분별력과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성서를 보면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몇 명 있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사울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던 사울은 어쩌다 그렇게 망가져 버렸는가? 많은 사람들이 경고를 하고, 예언을 해도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몇 번의 기회를 주었는데도, 그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분별력과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자신의 권력욕을 이어가기 위해 그 어떤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비참하게 죽어갔던 그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반면 다윗은 어떻습니까? 밧세바라는 여인을 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드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습니다. 강간죄, 살인죄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나단 선지자의 말을 정확히 분별합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고 침상을 다 적실정도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혹은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유혹을 당하고 난 이 후가 더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유혹을 분별하고 견뎌내기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혹에 빠진 이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예수님처럼 이러한 악마의 유혹을 분별해 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 원하는데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2가지만 살펴보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먼저 “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라는 시편36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주님의 빛에 이끌리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매혹되어 사는 것입니다. 내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한 프랑의 아벨 피에르 신부님은 자신을 매혹하는 것으로 “부드러운 성스러움, 예수의 작은 친구들이 갖는 성스러움, 어린 아이들과 소박한 사람들과 아주 겸손하고 작은 사람들이 갖는 성스러움, 그것이 나를 매혹한다.”고 고백합니다.
이현주 목사님께서는 신앙생활 하는 것이 마치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태양을 바라보고, 태양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은 절대 그림자를 볼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빛을 등지는 사람에게 그림자는 크게 보이되, 빛을 향하는 사람에게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유혹의 그림자는 하나님의 빛 아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한 순간 한순간 하나님의 빛을 간구하고, 그의 빛 안에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매혹되어 사는 한 유혹의 그림자는 우리 삶에 틈타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 안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수행을 하고 있는데,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스승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요? 그러자 스승님이 이야기 합니다. 개구리 소리가 시끄러운 이유는 “니가 노래를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혹에 혹한 이유는 우리 삶 속에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보시길 부탁드립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악마에게 유혹받지 않는 것! 비록 어렵겠지만, 참 자유한 신앙인은 결국 유혹으로부터 자유한 사람! 하나님 빛 안에 거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현재 여러분은 어떤 유혹의 상황에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유혹합니까? 돈의 유혹 앞에 무력해 질 때가 있습니다. 나의 명예를 위해 거짓말을 서슴치 않게 될 때가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 앞에, 가족의 안위 앞에, 비굴해 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유혹을 이겼을 때 맛보게 될 참 자유함, 그리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이 신앙의 진수를 몸으로 체득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