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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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5일 강림절 제2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거스르는 신앙'

이관택

본문: 마가복음 3장 1~6절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4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5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6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어제 이 예배당에서는 토마토학교 수료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수료식은 교사들과 아이들 그리고 학부모님들이 함께 10주간 활동했던 토마토학교를 돌아보고 서로 수고했다고 상도 주고, 선물도 주고, 이야기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제는 특히 지현이라는 아이가 나와서 리코더로 공연을 하였는데, 물론 중간에 한 번 틀리기도 하고 했지만 얼마나 감동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교사 선생님들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감을 발표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참 사람들이 만나서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나누는 일,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는 일,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고, 결국 서로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 주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어제 수료식을 진행하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이 이런 것 아닐까? 서로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이 삶이 아닐까? 아무것도 아닌 내가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당신 때문에 너무 행복했다고, 당신이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는 고백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는 거 아닌가! 서로에게 더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또 있어주는 것만으로 감사한 것!

어제 소감을 발표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또 당신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제 한 학부모님께서 우리 교회의 표어를 보시고 자신은 비록 신앙인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이웃과 소통하는 좋은만남'이라는 문구를 보면서 이 곳이 진짜 '좋은만남'이 있는 곳이라고 얘기해주신 것을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이 곳에 앉아 있는 우리도 얼마나 특별하고 좋은만남인지 모릅니다. 토마토학교가 의미있는 이유는 서로 전혀 만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만났기 때문입니다. 장애아동과 비장애 대학생들. 어찌보면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만났을 때가 가장 감동적입니다.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어 전혀 이루어 질 것 같지 '사랑'을 만들어 가는 연애이야기가 감동적이듯, 만왕의 왕, 구원자라고 예언되었던 예수님이 갈릴리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만났을 때가 감동적이듯 서로 전혀 만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만남 속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이 좋은만남 공동체 또한 얼마나 특별한지 모릅니다. 저희 역시 서로 전혀 만날 것 같지 않은 사람들 아닙니까? 옆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보세요. 그리고 어제 토마토학교 선생님들이 고백했던 것 같이 이야기 해볼께요. "미안합니다" 그리고 3초후 "감사합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말만하지 마시고 속으로 내가 이 사람에게 왜 미안할까? 잠시 생각해 보시고, 감사합니다 얘기하면서도 잠시 감사한 이유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사람이 고마운 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거여 라고 말 하듯 사람이 살면서 '미안해 하고' '고마워 하는 것' 만 잘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이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 모릅니다. 길 가다 작은 잡초하나를 우연히 밟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풀아 미안해' 할 수 있는 감수성! 밥을 먹으면서 진심으로 밥에 대해 고맙습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는 마음! 소박하고 소소한 것에 미안해 할 줄 아시고, 또 감사할 줄 아는 비밀을 터득한 사람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안해 하고, 고마워하는 일 결코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신앙생활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부분들, 승복하는 부분들을 다시금 돌이켜 보면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거스르는 신앙'입니다. 저는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시간들로 만드는 첫 번째 관문이 바로 이 '거스르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는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보니까 크게 3가지 입장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손이 오그라든 사람,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이야기가 매우 중요한 이유는 결국 예수님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 즉 바리새파 사람들, 헤롯 당원들에게 죽을 수밖에 없는 빌미가 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죽음을 감수하면서 까지도 소중한 한 생명을 진심으로 만나고 그의 병을 치유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뤄가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율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율법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를 신경쓰지 않습니다. 다만 힘들어 하고 아파하고 고통가운데 신음하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회복되고 치유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이 사건은 매우 일상적인 일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을 구원하는 특별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일은 그토록 미워하던 예수를 시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눈에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은 안중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죽는 일은 그들의 관심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만 달성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수를 죽일 수 있는 빌미를 잡았다!가 그들의 소득입니다. 예수를 죽이는 것이야 말로 자기들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 장애인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그 생명의 자리!, 기적의 자리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동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만을 연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현장에 있으면서도 생명의 신비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존에만 급급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신경전에 귀를 쫑끗 세운 한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죠. 이 사람은 안타깝게도 그 상황에서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합니다. 어차피 이 사회에서 장애인의 삶이라는 것이 애초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애처로운 눈빛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소서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결국 이 손 오그라든 사람은 이 날 예수님께 치유를 받습니다. 이날은 이 사람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자신의 손을 보며 저주했던 그 불행한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이 예수님에게 과연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노하시고 탄식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묻는 것은 니들이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데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좀 니들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봅니까? 그들의 눈 앞의 실제적 목적, 실제적 이득 외에는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사람의 생명도 그들에게 안중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탄식하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안타까움입니다.

영상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 영상의 힘은 현실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바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장애인의 현실이 암담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다시 한 번 잘 살펴보면, 아니야 희망은 있어! 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숙제인 것입니다. '거스르다'라는 말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파의 통념을 거스른다 즉 반대한다. 또 하나의 의미는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금 곱씹고 자세히 살펴본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안식일'이라는 그 사회의 통념을 거스릅니다. 그 사회의 율법을 반대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 사건은 '생명'의 사건이, 치유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안식일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만들고 일구신 후에 안식하셨던 창조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실상 생명을 창조했던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한 날 아닙니까?

이스라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들이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모양이지만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을 만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유월절에는 무교병, 즉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고 초막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할까 합니다. 윌리엄 폴 영이라는 사람이 쓴 소설 [오두막]이라는 책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단란한 가정이 있었는데, 가족 나들이를 갔다가 유치원생 쯤 되는 막내 딸이 연쇄 살인범에게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가족들이 힘들어 하면서 몇 년이 지났습니다,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언니는 아예 그 날 이후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동생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 맥에게 편지가 한 장 옵니다. 막내 딸이 살해당했을 것이라 추정된 그 오두막으로 오라는 편지입니다. 맥은 화가 나기도 하고, 두렵고 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렵게 용기를 내어서 그 오두막으로 가게 됩니다. 맥은 그 곳에서 3일간 성부, 성자, 성령을 만나면서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맥이 그 곳에서 만난 하나님의 모습들입니다. 앞치마를 하고 요리를 만드는 옆집 흑인 아주머니의 모습이 맥이 만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또 못생긴 아랍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성령님은 지혜로운 사라유라는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신학대학교 까지 나온 맥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깨고 새로운 하나님들을 만나게 됩니다. 요리하고, 산보하고, 수다떨고, 별을 보는 것이 하나님과 맥이 3일 동안 한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맥은 어떻게 나에게 이런 고통이 일어날 수 있냐고 분노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분 하나님은 그 때마다 맥을 사랑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맥이 오두막에서 세분 하나님과 함께 했던 시간 3일은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하기 전 무덤에서 지냈던 3일, 요나가 물고기 뱃 속에서 지낸 3일을 의미하는 듯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그 3일! 3일 동안 맥은 딸이 억울하게 죽었던 그 사건의 고통에서 비로서 해방됩니다. 이 3일의 과정 역시 거스르는 과정이었습니다. 먼저 기존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거슬렀습니다. 그저 고백의 대상이었던 하나님, 신앙의 대상이었던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나와 이야기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나를 위해 요리를 준비하고, 산책을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또 그는 자신의 고통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회피하려고만 했던 그 일을 차근차근 되짚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고통의 문제가 있을 때, 저는 단연코 기도하시라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잘 거슬러 보시길 바랍니다.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하는 기도에는 반대합니다. 진짜 수다스럽고 촐싹 거리는 하나님!, 나를 위해 많은 것들, 아니 이 모든 것들을 부단히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나의 문제를 하나님과 함께 풀어간다면 그 과정 또한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어렸을 때 '미로 찾기' 할 때, 잘 안 풀리면 시작이 아니라 끝점부터 푸는 것이 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의 문제를 지금의 나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상황 속에서 푸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가다보면 하나님에게까지 가겠지요. 창조의 그 때까지 갈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보는 겁니다.

처음에 이야기 했지만 서로 사랑하고,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살고, 누군가에게 고마워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실을 조금만 거슬러봅시다. 이 현실에게 나는 반대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에 다시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손 오그라든 자의 손이 펴지고, 구겨진 나의 인상이 밝아지고, 삭막한 세상이 아름다워 집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나에게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변하면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시각도 바뀌고, 실제로 하나님의 손길이 닿고 있는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스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욕망을, 이 세상의 논리를, 거스러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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