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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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6일 주현절후 제5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행복하세요?'

 

이관택

본문: 누가복음 6장 21~26절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24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5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여러분 지금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세요?" 제가 전에 다니던 정릉교회에 한 전도사님께서는 만나는 사람에게 매번 이렇게 인사를 하시곤 하셨습니다. 얼굴에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행복하세요?" "행복하시죠?"라고 인사하던 모습이 아직도 제 기억에 선명합니다. 행복하냐는 그 분의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는 좀 어리둥절했었습니다. "내가 지금 과연 행복하긴 한건가?" "행복이란 뭘까?" "이 사람은 왜 이런 질문을 하지? 자기는 행복한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행복'이라는 말!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이미 행복해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나를 이미 행복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말은 삶의 열매라고, '행복'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우리 삶의 분위기들은 점차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번 옆 사람 보면서 인사해보겠습니다. "행복하세요?"

지난 주간에 구정명절을 지냈습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덕담을 주고 받고, 윷놀이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번 설에 충격적인 일이 있었는데, 작년까지는 새뱃돈을 받았었는데, 이번 설부터는 아무도 제게 새뱃돈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새뱃돈을 받고 안 받고 여부를 떠나 이번 명절 또한 별일 없이 행복하게 잘 보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번 명절에 행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행복'은 모든 이들의 관심입니다. 신앙생활을 왜 합니까? 학교는 왜 다닙니까? 돈은 왜 벌고 있습니까? 자식은 왜 낳습니까? 이유를 쫒고 쫒다 보면 결국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새해가 시작되는 날, 서로 복 받으라고 덕담을 주고 받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는 어쩌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들을 다시금 돌아보고 내 삶의 상태를 점검해 보라는 말일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복의 문제, 즉 행복의 문제는 우리 인생과 삶 전반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 행복을 위해 하시는 것이 맞으시죠? 뭐 딴 것 위해서 하시는 것 아니죠? 자칫 주객이 전도될 수 있는 우리 삶을 다시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함께 나눌 이야기의 주제는 행복과 불행, 절망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제는 거창하지만 내용은 단순합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참 '행복 강박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말로는 행복하다고, 말로는 감사하다고 이야기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지선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분 계십니까? 그 분의 신앙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아름다운 미모의 여대생이었던 이지선 씨는 어느 날 불의의 사고를 당해 전신 8도에 해당하는 화상을 입게 됩니다. 그 고왔던 얼굴이, 그 고왔던 피부가 화상의 흔적으로 모두 일그러졌습니다. 하지만 이 분은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통해 자신이 당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너무 행복하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금의 모습으로 사용하시는 거라고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본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지선씨의 이 같은 신앙고백은 한 때 신앙의 아이콘으로 불릴 만큼 화제를 낳았습니다. 마치 참신앙인의 전형적인 모델처럼 회자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극복한 이들이 주는 감동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단순히 '대단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지선 하면 "아! 화상 입었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죠. 그녀는 사실 지금도 얼마나 큰 고민와 질병으로 인한 어려움 가운데 처절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 갈 텐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욥처럼 고통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찾아야지'라고 쉽게 말합니다.

갑자기 찾아 온 절망스러운 일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길 강요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기독교 신앙이 나에게 찾아온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마술인 것 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지선'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겉껍데기에 불과한 외모에 집착하는 외모지상주의를 바라보지 못할까? 왜 사람들은 '장애인'을 바라보는 자신의 편견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못할까? 이지선씨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꾼 마법같은 이야기는 철저하게 믿으면서 이지선씨의 불행 속에서 모두가 함께 공유할 만한 '희망의 단서'는 왜 찾아내지 못할까?

아쉬운 부분은 온몸으로 자신을 향한 편견과 싸워나가는 이지선씨의 인간적인 고뇌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누가복음 말씀에서 도발적인 말씀을 전하십니다. 복 있는 사람과 화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죠.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24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5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이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복에 대한 아주 선명하고 도발적인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가난하면 복이 있고, 부자면 화가 있다'라는 단순한 논리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지선은 신앙의 상징이야'라고 단순하고 쉽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사람들과 만나고 있는 지역은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유대의 북쪽에 해당하며, 사마리아보다도 더 북쪽에 위치합니다. 당연히 예루살렘과도 엄청나게 떨어져 있구요. 지금도 그렇듯이 수도와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낙후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라시고, 사역하신 곳은 바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갈릴리였습니다. 또 그곳은 로마의 식민지배에 대항하여 싸웠던 독립투사들의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하고, 독립투사들이 모여있는 곳! 한 가정 걸러 로마와 싸우다가 죽어나간 형제들이 있는 곳, 한 가정 걸러 굶주림에 고통 당하다가 하나 둘 죽어가는 그러한 땅이 예수님께서 살던 곳입니다. 죽음의 땅이라고 할 만 한 그 곳에서 예수님은 인생의 대부분을 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의 개념과 그 시작이 다릅니다. 여러분 가난한 지금에 만족하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의 형제가 로마의 군사들에 의해 죽어가지만 그것에 감사하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불행이 곧 행복으로 바뀔 것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 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가난하시죠? 하지만 그것이 이미 행복입니다. 지금 배고프시죠? 그것이 이미 행복입니다. 지금 피눈물 흘리고 계십니까? 그것이 이미 행복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여러분은 배부르게 될 것이고요. 분명히 여러분은 웃게 될 것이고요. 분명히 기뻐 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인적인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시지 않습니다. 그 불행의 상황 가운데 모두가 함께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의 씨앗에 주목합니다. 지금 가난 하지만, 지금 불행하지만 그것 안에 보여지는 희망의 싹을 보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희망의 싹을 자신의 가장 일상적인 모습들 속에서 찾아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난 부자들은 이스라엘의 종교권력입니다. 예수님이 만난 부자들은 로마의 식민 지배세력입니다. 불의한 세상 그 세상의 구조 틈바구니에서 부를 쌓는다는 것만으로도 비판 받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예수님 같은 분이 희망의 빛을 보이시지 않으셨다면 그 죽음의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의 불행은 절망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희망을 품은 불행과 희망이 없는 절망 속에서 맞이하는 불행은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 바로 밑에도 도발적인 이야기를 두 가지 더 던지십니다, 그 하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이고요. 다른 하나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과 바로 이어지는 이 본문들을 통해 오늘 보이신 희망의 싹을 열매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시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개인의 불행과 행복의 차원을 이야기 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행이 행복이 되어가는 과정을 세심하게 체계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구호나,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위키 백과사전을 보면 행복(幸福, Happiness)은,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 하거나 또는 희망을 그리는 상태에서의 좋은 감정으로 심리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행복은 복잡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진짜 행복입니다. '희망'을 품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최근에 개봉한 글러브라는 영화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청각장애인 야구단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것인데요. 그 영화에서는 청각장애인들이 얼마나 고군분투를 하는지 모릅니다. 단 1승을 위해 비장애인에 비해 몇 배의 훈련을 하고, 호흡을 맞추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정말로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결국 그 팀은 1승도 올리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장애를 뼈저리게 절감하고 절망합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구나! 좌절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 과정 자체가 희망 그 자체라는 것을 말입니다. 또 승패가 중요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희망이고 행복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아님 지금 불행하십니까?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있는 그 곳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싹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나도 모르게 조금씩 넓혀 가는 것! 그것으로 여러분은 이미 충분히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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