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성서본문 : 시편 33,4-9
4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올바르며, 그 하시는 일은 언제나 진실하다. 5 주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온 땅에 가득하구나. 6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지으시고, 입김으로 모든 별을 만드셨다. 7 주님은 바닷물을 모아 독에 담으셨고 그 깊은 물을 모아 창고 속에 넣어 두셨다. 8 온 땅아, 주님을 두려워하여라. 세상 모든 사람아, 주님을 경외하여라. 9 한 마디 주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생기고, 주님의 명령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견고하게 제자리를 잡았다.
들어가며 : 우리에게 삶의 이상을 보여주시고 삶의 기준을 잡아주시며 삶을 길을 함께 걸어주시는 어버이이신 하나님께서, 믿고 의지함으로 그 길을 기쁨으로 나아가는 사랑하는 자녀들, 성도들에게 크신 은혜와 사랑, 자비와 용기로 채워주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분만실 앞에 4명의 남자가 부인의 분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간호사가 나와서 첫 번째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축하합니다. 귀여운 쌍둥이 아빠가 되셨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놀라워하며 말합니다. 정말 우연의 일치인가 봅니다. 나는 쌍용정유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되돌아간 간호사가 다시 나와 두 번째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세 쌍둥이 아빠가 되셨습니다. 그러자 역시 그 남자도 놀라며 말합니다. 정말입니까? 나는 삼성에서 일하고 있단 말입니다.
잠시 후 세 번째 남자에게 간호사가 찾아와 말했습니다. 어머, 선생님은 기네스북 감입니다. 일곱 쌍둥이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이 남자도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설마 했는데, 나는 칠성 사이다에서 일합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곁에 있던 네 번째 남자가 기절을 했습니다. 잠시 후 정신이 든 후, 간호사가 물었습니다. 왜 그러세요? 뭐가 잘못 되었나요? 이에 이 남자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뭐가 잘못 되었냐구요? 나는 "119구조대"에서 일한단 말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에든지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들어가서 : 여러분은 고백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또 고백을 해보신 적도 있으실 것입니다. 고백을 할 때나 고백을 받으실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저는 중매로 결혼을 해서 그런지 딱히 무슨 사랑고백을 하면서 프로포즈를 한 기억이 없네요. 그래서인지 아내는 항상 아쉬워합니다. 고백은 진정을 담기 마련입니다. 진정을 담은 고백은 평생에 그 마음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설령 그 고백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해도 말입니다. 고백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고백을 마음에 없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백이 아니라 주문 외우기, 횡성수설이겠죠. 마음을 담은 것이 아니라 그냥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고백은 한 글자 한 글자를 마음에 새기듯이 진지하고 진솔하게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은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하는 소위 신앙고백은 그동안 사도신경을 외워서 무슨 주문 외우듯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단어들을 당연하게 읊어왔습니다. 그것은 고백이 될 수 없지요. 자기가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입만 움직이는 그냥 암송일 뿐입니다. 그렇게 읊어댄 신앙고백에서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올 리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품 고백을 하였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한 소리였기에 곧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는 치욕적인 꾸중을 듣게 되었습니다.
외워서 하는 것이 아닌 진심을 담은 고백을 위해 우리는 좋은만남 신앙고백문을 만들어 우리의 마음과 우리 자신의 고백을 우리의 언어에 담아 매주일 하나님께 말 그대로의 고백을 하는 것이고 제가 계속해서 좋은만남 신앙고백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단어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며 제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오늘은 사랑과 정의(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이시다 혹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신화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알아듣기 쉽게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가치와 정의와 가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가치, 최고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라고 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결코 포기되어서도 안 되고 결코 훼손되어서도 안 되는 가치가 바로 사랑과 정의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주님이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언급하며 ‘주님의 사랑이 온 땅에 가득하구나’라고 이어가다가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늘과 별, 바닷물과 땅, 그리고 모든 것을 만드신 원리가 바로 정의와 공의, 그리고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이라는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정의는 신앙의 기본이자 목적이 되어야 하며 이 세상을 채우고 움직이는 원리는 사랑과 정의의 원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권고하신 내용은 다름 아닌 ‘사랑과 정의를 이루면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명을 위해 우리가 부름 받은 것이고 또 각자의 능력과 자질을 받은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라는 것과 정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가르침은 많이 들어서 다 아실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만화영화를 보면서 자랐습니다. 지금 보면 참 조잡하기 짝이 없는 70년대 일본산 만화영화이지만 지구를 정복하려는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정의의 사도 마징가, 그레이트 마징가, 그랜다이저, 짱가, 마린보이 등등을 가슴 졸이며 보면서 자라났었지요. 저의 윗세대에게 최고의 악당은 오로지 공산주의였고 그에 맞서 싸우는 미국이 정의의 화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 지금은 악당이 누구인지 불분명한 시대가 돼버렸습니다. 정의의 감각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둔해간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흔들립니다. 그러니 신앙인이 마음에 품어야 할 하나님의 정의는 더욱 요원한 문제가 된 듯합니다.
요즘은 책을 잘 보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인문학은 거의 죽었다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인문학 책이 사회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책은 하버드대 교수인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입니다. 그의 강의도 EBS에서 방영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정의라는 것이 단순하게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정의의 사도와 악당으로 나눌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둘 중 하나의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정의를 기독교 교리와 동일시하면서 기독교 교리를 절대화하든지 아니면 정의라는 문제에는 무관심하면서 그저 사랑이라는 주제를 절대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리한 정의개념이 별로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은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정의라는 것은 사실은 무슨 특별하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에 채워지기를 바라는 정의라는 것이 하바드 대학교의 저명한 어떤 교수의 강의를 들어야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만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내재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양심을 주셨습니다. 이 양심은 우리에게 정의감을 갖게도 하고 죄책감을 갖게도 합니다. 이 양심을 통해 무엇이 바른지 무엇이 그른지를 느끼게 합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무엇이 바르고 옳은지, 무엇이 그르고 어긋난 것인지를 태생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속의 울림을 따르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럼에도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거짓에 익숙해지고 탐욕에 길들여지면서 이 감각을 잃고 양심에 불도장, 화인을 맞은 상태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 역시 사랑과 분리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가 얼마나 단호하고 비정합니까, 반면에 정의가 없는 사랑이 얼마나 맹목적이고 파괴적입니까? 정의는 사랑을 기반으로 삼을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또 사랑은 정의를 기반으로 할 때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건강하고 긍정적인 사랑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사랑과 정의를 분리된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믿음과 행함을 별개의 것으로,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듯이 사랑과 정의를 배치된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정의의 하나님은 무서운 분으로, 사랑의 하나님은 자애로운 분으로 그리면서 상반된 하나님의 모습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좋은 부모가 바르고 의로운 마음 없이 무작정 사랑만 하겠고 또 사랑하는 마음 없이 의로운 것만 강요하겠습니까?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것은 바르면서도 자애로운 것이고 또 자애로우면서도 올바른 것입니다.
오늘날 정의와 사랑이 온통 혼동돼 있습니다. 정의도 없고 사랑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 없이 냉혹한 정의만 있거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구분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제 주위 사람들 챙기기에만 급급한 위인들도 있습니다. 요즘 논쟁 중인 보편복지의 문제도 여기에 맞물려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어설프게 교리수호 한답시고 온갖 교권자들의 비리를 은폐하고 보호해주고 그에 따른 내부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잘못을 감싸주고 은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비리집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신자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리한 정의의 개념을 갖되 사랑으로 정의를 세우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나가며 : 신앙의 목적은 복 받고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일 수 없습니다. 신앙은 나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 명령을 ‘제가 제대로 알아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하나님을 사랑과 정의로 고백한다면 우리 삶에서 사랑과 정의의 열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미 주신 하나님의 선하신 형상인 양심을 따라 정의롭게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우리 좋은만남 성도들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