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0일 주현절후 제7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위대한 밥상'
이관택
본문: 마가복음 2:13-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다. 무리가 모두 예수께로 나아오니, 그가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15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따라왔던 것이다. 16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17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물고기는 무엇일까요? 이 물고기는 제 평생에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입니다. 제가 작년 이맘 때 필리핀으로 워크캠프를 갔었습니다. 그 곳은 태풍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집을 잃고, 전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타이산이라는 마을이었습니다. 타이산은 나가시라는 조금 큰 도시에서 약 1시간 가까이 떨어진 시골 마을이며, 태풍피해민을 위한 재이주단지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의 마을회관 같은 곳에 머물렀는데, 일주일 동안 머무르면서 마을회관에 페인트칠을 하고, 마을 청소와 아이들 교육 봉사를 담당하였습니다. 낮엔 열심히 일을 하고, 밤엔 가가호호 방문하여 그 곳 주민들을 만나서 그들의 속사정을 듣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태풍으로 인해, 화산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 일자리가 없어서, 또 통근할 수 있는 차비가 없어서 주중에는 도시에 나가 노숙을 하며 일을 하고, 주말에만 집에 돌아오는 사람들. 통기타를 매우 잘 치는 소녀, 레이디 가가 춤을 완벽하게 소화했던 꼬마들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타이산 마을 주민들은 항상 여유 있는 모습들이었습니다. 넉넉한 인심, 밝은 미소, 적극적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언제라도 어울릴 수 있는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 그들의 그러한 마음씨 때문에 함께 간 어떤 사람은 이 곳이 정말 파라다이스 같다 라고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
마을 떠나기 전날 마지막 밤에는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잠은 마을회관에서 잤는데, 마지막 날이니 만큼 잠도 각 각 필리핀 마을 주민들의 집에서 자게 된 것입니다. 저는 제프리라는 친구의 집에서 묶게 되었답니다. 제프리는 우리가 마을회관 페인트칠을 할 때, 가장 많이 도와주었던 친구였으며, 저와는 나이가 같은 동갑내기여서 특별히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 친구 샬리와 함께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아직 마땅한 일자리를 갖고 있진 않았습니다. 저는 그 전날에도 제프리집에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정말 가난하다! 너무 누추했던 것이 그 집에 들어 간 제 첫인상이었습니다. 지저분하기도 했구요. 살림살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집이었어요. 하지만 홈스테이를 하기 위해 제가 제프리의 집에 들어가고 나서 깜짝 놀란 것은 침대였습니다. 그 전날까지도 없던 침대가 생겼더라구요. 제프리가 저를 위해 직접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제프리와 저, 그리고 샬리는 침대에 누워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물론 제가 영어가 부족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요. 잠자기 전에 제프리가 제게 내일 아침식사를 기대하라고 하였습니다. 낼은 특별히 피시 프라이를 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생선 튀김이라 맛있겠다!라고 속으로 되내이며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제프리와 샬리가 분주하게 식사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침식사라고 하면서 제 앞에 쟁반을 들이밀었습니다. 쟁반에는 밥그릇과 손가락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 물고기는 제 밥그릇에만 있습니다. 제프리와 샬리는 제가 그것을 먹는 것만을 빤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제가 그 물고기를 한입 먹자 너무나 기뻐합니다. 가난해서 결혼도 하지 못하고 있는 제프리와 샬리는 그 식사 내내 제가 그 물고기를 다 먹는 것을 흐믓하게 지켜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밥상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저는 제프리의 집에서 먹은 아침식사였습니다. 비록 작은 물고기 한 마리였지만 그 물고기 한 마리 안에 들어있는 사랑의 마음, 환대의 마음, 또 그 식사를 함께 했던 제프리와 샬리라는 사람의 삶이 온전히 들어 있는 식사였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밥상은 무엇이 있습니까? 또 그 밥상에서 함께 밥을 나누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기독교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종교입니다. 또 기독교는 예수가 보여준 하나님을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자세히 살펴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예수의 삶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실천 할 수 있는 소소하지만 매우 위대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보여주는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예수 공동체를 밥상 공동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레위를 만나고, 그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레위는 당시에 죄인이라 여겨졌던 세리였습니다. 예수께서 레위를 제자로 삼고 나서 레위의 집에 가서 많은 제자들과 또 이를 흥겨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나누십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세리였던 레위의 친구들인 또 다른 세리들이 함께 하였고, 당시 죄인이라 여겨졌던 가난한 이들도 이 잔치에 참여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고깝게 보는 시선들이 많았다는 데 있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은 술꾼이요, 먹보라고 놀리고 비아냥하기도 했는데요. 그것은 그저 방탕하고, 놀기 좋아한다는 비아냥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밥상 나눔이라는 것은 단지 지금처럼 그저 친교를 나누고, 허기를 채우는 그런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밥상 나눔 안에는 엄격한 종교적인 규율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
여러 가치들 중에 핵심적인 가치를 우리는 보통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핵심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돈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지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핵심적 가치는 어쩌면 돈일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핵심적 가치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는 바로 '카도쉬'라는 말로 정리됩니다. 이 '카도쉬'라는 말은 거룩과 성결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의 핵심적 가치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나의 삶 속에 여호와의 거룩을 구현할 수 있는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거룩하게 되는 모습으로 구현됩니다. 또 이스라엘의 각 개인들의 삶이 거룩하게 되는 모습으로 구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관통하여 적혀있는 수많은 율법의 조항들은 어떻게 하면 나의 삶 가운데 여호와의 거룩을 구현할 수 있는가!하는 신앙적 투쟁의 기록이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여줍니다. 또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그들의 신앙적 노력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할텐데요.
하지만 이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여호와 앞에 어떻게 하는 것이 더 거룩한 것인가?를 따지다 보니까 이 거룩이 등급화 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더욱 거룩한 것이 있고, 덜 거룩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이 끊임없이 차등화 계급화되는 것입니다.
거룩 때문에 공간이 계급화됩니다. 광야는 살 수가 없는 곳 그러니까 불경한 곳, 예루살렘 같은 성전이 있는 도시는 거룩한 곳이 됩니다. 성전 안에서도 그 공간에 따라 차등이 매겨집니다. 뜰 밖이 있고 뜰 안이 있고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가 가장 거룩한 공간이 되는 곳입니다. 여기는 대제사장도 1년에 한 번 밖에 못 들어 가는 거룩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간에 따라 더 거룩한 곳과 덜 거룩한 곳이 나뉘다 보니까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등급화 됩니다. 예를 들어 광야는 거룩하지 않는 불경한 곳이기 때문에 광야에 사는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돈이 없고, 혈통이 나쁘고, 나병에 걸린 사람들, 어쩔 수 없이 광야 언저리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 불경한 사람들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니까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겠지요.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강남에 사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들이 되고, 강북에 사는 사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죄인이 된다는 얘기와 같죠. 이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거룩한 것과 가장 거룩하지 않은 것은 음식을 통해서도 구별됩니다. 성별된 음식이냐 아니냐에 따라 거룩한 밥상과 불경한 밥상이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아마도 밥상에서 이렇게 성결하냐 불결하냐를 따지게 되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토할 것 같지요.
그렇다면 지난 번에 말씀드린 것 같이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갈릴리 땅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자라시고 활동하신 갈릴리의 대부분이 죄인이 됩니다. 대부분이 거룩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핵심적 가치는 내 삶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구현하는 것인데, 이런~ 태생부터가 공간부터가 거룩하지 못한 죄인인 것입니다.
뭔지 모를 죄의식이 가득한 곳. 기쁜 일보단 그저 하루를 버텨내기 바쁩니다.. 가치보다는, 의미보다는 그저 오늘 하루 먹거리에 집착하는 그러한 삶! 갈릴리의 대부분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입니다. 어찌보면 오늘날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이 정서가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그 시대의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예수 공동체가 가는 곳곳마다 잔치가 벌어집니다. 한바탕 술판이 벌어지고, 밥상 나눔이 벌어집니다. 그 밥상 나눔에 율법을 들이밀어서 성결한 음식인지 부정한 음식인지를 나누지 않습니다. 그 밥상 나눔에서는 의로운 사람인지, 더러운 죄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누구와 함께 하는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함께 모였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는 여지없이 제자들하고만 모여계신 것이 아닙니다. 레위의 친구들이었던 세리들, 또 당시의 죄인이라 불려졌던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 밥상 나눔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나가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파 율법학자에게 이 모습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아주 추악하고 더럽게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위대한 사역은 실상 이 밥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간이 정해놓은 규율과 차별의 세상을 깨뜨리고 스스로 복음이 되신 예수님의 삶은 가장 일상적인 밥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밥상은 일상적인 나눔의 공간이자 치유의 공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밥상을 통하여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과 그 부정함을 나누고, 예수가 지닌 정결함을 나눕니다. 이는 생명의 나눔이며, 명예의 나눔이며, 사회적 권위의 나눔이며, 권력의 나눔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요한이 고백하는 예수의 마지막 모습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실의에 빠진 제자들이 각기 옛 생활로 돌아가서 고기를 밤새도록 잡았습니다. 결국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이 때 동틀 무렵 어떤 이의 말에 따라 그물을 던지자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의 고기를 잡게 되지요. 그때서야 제자들은 그 분이 예수님인 것을 깨닫습니다. 황급히 예수님을 찾으러 온 제자들이 만난 것은 바로 밥상입니다. 예수님은 손수 숯불을 피워 고기와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들이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온 그 자리 또한 밥상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밥상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결국 밥은 우리의 삶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밥상은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 밥상은 모두에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입니다. 만나의 체험, 메추라기의 체험 엘리야가 경험한 그 하나님의 밥상을~ 예수께서는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물론 여기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함께 잔을 나누고, 떡을 나누는 행위는 우리의 가장 거룩한 예전이 되었습니다. 또 신앙공동체가 나누는 밥상은 세상의 그 어떤 진귀한 산해진미도 흉내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듬뿍 담긴 위대한 밥상이 됩니다.
오늘부터 성도들이 직접 돌아가면서 밥상을 마련하고 준비합니다. 특히 오늘 첫 번째 타자가 양진 청년과 최대한 청년이라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밥상나눔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이 밥을 누구와 함께 먹느냐입니다. 또 무엇을 위해 먹느냐입니다. 언제나 믿음의 선조들과 함께 했던 만나를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밥상입니다. 또 우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우리를 위해 숯불에 고기를 올리고, 떡을 올리시는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밥상입니다. 좋은만남교회의 공동식사 자리가 함께 잔치를 하는 마음으로 그 누구라도 기꺼이 초대하고,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는 밥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조금 입맛에 맞지 않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는 사람이나, 맛있게 먹는 사람이나 모두가 함께 이 위대한 밥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공동식사의 자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치유의 능력이, 또 나눔의 기쁨과 감사가 가득한 위대한 밥상을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