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니 드 멜로 지음 / 김상준 옮김 / 분도출판사
이 시대 잊혀진 영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영성을 소개합니다. 깨어있는 성도도 성숙하기 위하여 연재하는 이 글을 통해 영성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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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화 4
현실은 유동합니다. 결국, 우리가 신비적인 것을 믿고자 할진대 이 점을 이해하거나 심지어 믿는 데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는 않더라도 아무도 단번에 파악할 수는 없지만 현실은 온전한 것입니다. 단어나 개념은 현실을 단편화합니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를 옮기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언어마다 현실을 달리 쪼개 놓기 때문이죠. 영어 단어 home을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로 옮기기는 불가능합니다. casa가 home은 아니죠. home은 영어에 특유한 연상들이 있거든요. 언어마다 번역될 수 없는 단어나 표현들이 있는데, 우리가 현실을 잘라 내어 무언가를 더하거나 덜어 내고 있고 그 용법이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온전한 것인데 우리는 그걸 잘라 내어 개념들을 만들고 여러 다른 부분들을 가리킬 뿐인 단어들을 사용하는 겁니다. 예컨대, 평생 동물이라고는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어느 날 꼬리를 그저 꼬리만을 보았는데 누군가가 “그건 꼬리야”라고 말해 주었다면, 동물이 무언지도 전혀 모르면서 꼬리가 무언진들 알겠어요?
관념들은 온전한 것인 현실을 보거나 직관하거나 체험한 것을 사실상 조각냅니다. 이것이 신비가들이 늘 우리에게 말해 주는 점입니다. 단어들은 현실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가리키고 지적할 뿐입니다. 현실에 도달하는 길을 가리키는 데 이용되는 수단들이죠. 그러나 일단 도달하면 개념들은 쓸모가 없습니다. 한 힌두교 사제가 한 철학자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철학자는 신에 대한 마지막 장애는 “신”이라는 말, 신이라는 개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느 집으로 가려고 타고 가는 당나귀가 그 집에 들어가는 수단은 아닙니다. 거기 당도하기 위해 그 개념을 이용하지만 그러고 나면 내려서 두고 들어가 지요.” 현실이란 말이나 개념에 담을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 신비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앎을 넘어서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