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 요한복음 12:20-26 - 이관택 전도사

by 좋은만남 posted Jun 1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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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7일 사순절 제6주/ 종려주일/ 장애인선교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이관택

본문: 요한복음 12:20-26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는데, 21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에게로 가서 청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22 빌립은 안드레에게로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빌립은 예수께 그 말을 전하였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맺는다. 25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26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부활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가 ‘생명’을 이야기 하는데, 우리는 그냥 생명이 아니라 ‘다시 사는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다시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행되어야 합니까? ‘죽음’입니다. 죽어야 다시 삽니다. 오늘 성서에 나오는 밀알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신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진정으로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맺는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신비는 여기에 있습니다. 죽어야 다시 산다. 한 생명이 죽으면,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많은 생명으로 풍성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오늘 이 고난주일에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즘 우리는 교회력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을 기념합니다. 이 날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은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자신들의 겉옷을 땅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위대한 왕이 될 것이라고 한 껏 기대하지만 결국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시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러 예루살렘에 오시긴 했는데, 그 방법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기 위해, 십자가에서 조용히 죽으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을 우리는 고난주간으로 지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뇌와 번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살아가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여기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 있으세요?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상황적으로 영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사실 살아있다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고통받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고통 받고 있다라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라는 말의 반증이기도 합니다. 고통의 원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크게 이야기 한다면 외적고통과 내적 고통 외적 고통은 누가 나를 때리거나, 배가 고파서 너무 힘들다거나, 타인으로부터 받는 실제적으로 압박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하지만 내적 고통은 나의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불교에서는 번뇌로부터 이 마음의 고통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번뇌에는 세가지 원인이 있는데,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그것이라고 합니다. 탐욕은 모든 것을 나에게 집중시킬 때 생갑니다. 분노는 남에게 발산할 때 생기고, 어리석음은 나에게 집중시키는 것도, 발산하는 것도 알지못할 때 생깁니다. 그러고 보니고통에는 꼭 나와 주변 사람, 나와 주변 환경이라는 ‘관계’있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고통 당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결국 고통은 그것이 해결되든 그렇지 않듯 함께 나누 것이 가장 중합니다.

마크샤갈 마크샤갈은 유대인인데 왜 십자가를 자주 즐겨 그렸을까? 1938년에 독일에 수정의 밤이 있다. 유대인 소년이 독일 사람을 한 명 죽여서 수없이 많은 유대인이 죽임을 당한 수정의 밤. 이 일을 안타깝게 지켜본 마크 샤갈의 그림 원래의 그림에서 ‘나는 유대인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샤갈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세상의 모든 고통이 예수의 십자가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샤갈은 예수의 십자가에는 관심이 없다. 이것은 고통의 연대를 뜻하고, 고통을 통해 더 깊은 연대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힘과 축복이 아니라 진정으로 고통스럽고 고난에 빠진 이들과 함께고통당하는 분임을 정확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서두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을 사람들은 부활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저는 ‘고난’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의‘고통’의 문제, 신이 직접 고난을 당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직접적이고, 숭고한 일로 이야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바로 고난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고난?

오늘 말씀 21절 그리스 사람몇이 예수를 보고 싶어 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과연 어떤 예수일까? 또 이들은 왜 예수가 보고싶은가? 사실 이들은 자신들의 고난의 문제를 예수께 아뢰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나도 힘들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24절에서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맺는다. 25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역설적이다. 이순신도 이런 말을 했죠. 필생즉사, 필사즉생 내가 죽는다? 무슨의미일까?

언제인가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중심이 어디입니까? 가장 아픈 곳

지금 내 몸에서 가장 아픈 곳이 내 몸의 중심이 됩니다. 오로지 그 곳에 집중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이 세상을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곳을 중심으로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우리의 동참을 요구하시면서 말입니다. 그 아픈 곳이치유되는 순간 우리는 모두 행복해 질 수 있듯이……

26절 ““나를 섬기려거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그 아픈 곳을 느껴보자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보자는 거예요. 우리 몸의 반대편에 가슴이 있습니다. 가슴은 세상을 느끼고 하나님을 느끼는 장소입니다. 그렇다면우리 손의 반대편에 손바닥은 손가슴, 발바닥은 발가슴 이라고 생각하시다. 나의 손가슴은 마음을 느끼는 장소입니다. 발가슴 또한 마찬가지

봄이 완연합니다. – ‘봄’ 본다는 말에서 왔죠. 세상이 약동하는 계절 아름다움과 생명력 가득한 만물을 보게 되는 것이 봄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을 수동적으로 보는 것은 진정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 중요하다.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보이는 대로만 보지 말고, 들리는 대로만 듣지 마십시오. 지금 세상은 온갖 죽음의 이야기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화면만 가득한 세상입니다.

임정의 성도님께서 지난 주에 선물해 준 책 ““생각 버리기 연습”” 마음이 복잡해서 생각을 버리려고 했는데, 오히려 더 생각을 많이 하게하더군요. 그 책에서 귀에 이어폰 꽂고 다니지 마라, 모든 소리의 생명력을 잃게 한다. 나를 자극시키는 소리에만 집중하게 된다. 쇼프로나, 자극적인 영상만을 보지 마라. 항상 만나게 되는 소중한 얼굴들이 식상해 진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나를 가득 둘러싸고 있는데, 그것을 볼 수 없게 한다는 것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과 들려주는 것은 ~

신앙은 주체성,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체적으로 사는 것을 원하신다.

예수님 일행을 어쩌다 따라가게 되었다. 어렸을 때 소독약차 따라가듯이 그냥 몸이 가질때가 있다. 분위기가 그래서 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따라가는 것인가? 분위기에 휩쓸려서가 아니라 조금 더 의지를 가지고, 예수님 따라 가야 한다. 그 길은 실상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이다. 그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그 길은 부활의 길이기도 하다.

오한복음 1:29절 이틑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십시오. 누가 세상 죄를 지고 갑니까? 쌍용자동차, 카이스트 대학생, 장애인 등등 누가 지금 이 세상의 죄 때문에 죽어갑니까? 그 어린양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장애인 선교주일입니다. 고난주일과 장애인선교주일리 겹치게 된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세상엔 장애인이 없는 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잘 보시면 장애인이 많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참 많다. 세상은 그것을 그냥 중요하지도 않고 게으르고, 쓸모없다고 보여줍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가장 필요하게 쓰시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중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