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4일 부활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부활은 증인을 필요로 한다'
이관택
본문: 누가복음 24:13-25
13 마침 그 날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15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18 그 때에 그들 가운데 하나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22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24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유대인은 보통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킵니다. 이 일요일은 ‘부활절’을 기념해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매 주일이 부활절인 셈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 원조 부활절이죠. 해장국집에 가도 사실 다 맛이 거기서 거긴데, 왠지 원조집에 가면 더 맛있는 것 같고, 더 깊은 맛이 나는 것처럼, 왠지 그 주인 할머니에게 알 수 없는 경외감을 갖게 되는 것처럼 오늘은 원조 부활절입니다. 항상 그래야 하지만 오늘만큼은 더욱더 여러분의 마음에 더 깊고, 더 진한, 더 맛있는 주님의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넘치시길 소망합니다. 또 2000년 전 예수께서 경험한 부활을 여러분께서도 직접 경험하시고, 변화되시는 소중한 날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의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비참하게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많은 제자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바로 짐을 싸서 예루살렘 밖을 빠져나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무서워서 방안에 틀어박혀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나갔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대놓고 자신의 스승이었던 예수님을 비방하고, 배신합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삼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몇몇 여인들의 말에 따르면, 무덤 문이 열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또 죽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도 한명, 두명 나타납니다. 여간 신숭생숭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예전 같으면 굿이라도 한판 시원하게 할 만큼 요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살아생전에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에 걸쳐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실꺼야!””하고 기다리지도 않았고, 막상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구나!””하고 알아채는 제자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 후에도 손수 제자들을 직접 하나 하나 만나러 다니십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다시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를 만나셨던 것 같이, 오늘은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글로바라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성서에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같이 정말 열심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가득합니다. 왜 엠마오로 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너무나 무겁고 그들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고민이 많으면 부쩍 한숨과 말이 많아집니다. 사실 해서는 안될 말과 해야 하는 말이 있는데, 사람은 그냥 아무나 내 얘기 들어준다 싶으면 일단 이야기 하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두 제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함께 길을 가는데, 나에게 왜 그렇게 침통합니까? 물으니 그냥 술술 나오는 겁니다. 우리와 함께 했던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 예수님이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 사람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아픔을 들어주고, 함께 길을 가주고, 함께 밥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제자들은 오랜시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두 제자들에게 엠마오는 절망의 고통을 가지고 가는 고통의 길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엠마오는 무엇인지? 또 여러분과 함께 그 길 가는 사람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계신가요?
'엠마오 도상'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램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라는 화가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그림을 잘 그려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부족한 것 없이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하루 아침에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그만 죽어버린 것입니다. 램브란트는 붓을 내던지고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앞의 두 제자처럼 엠마오로, 엠마오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깨닫고 예수를 만나고 신앙을 새롭게 자신의 삶에 중요한 가치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서 그린 것이 '야경(Night Watch)'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암스테르담 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많은 사람이 그 값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그림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참 생명이 무엇인지를 체험하면서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값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램브란트가 그린 그림은 바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무려 18종류의 번역 성서를 읽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보면 대화하는 제자들의 모습이나 나무의 모습들에서 부활의 약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완성하고 램브란트는 '나는 위대한 생명의 비밀을 깨닫고 이 그림을 그렸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램브란트가 행복했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나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인생의 허무함과 좌절감을 느끼는 길목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엠마오 도상의 그리스도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실상 부활은 죽음이 후에야 찾아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밀알의 비유처럼 썩어짐 뒤에 나타나는 신세계가 바로 부활입니다. 이는 마치 썩어짐 뒤에 나타났던 치즈의 탄생과 같은 또 하나의 혁명! 죽지 않고서야 만날 수 없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오늘 절망의 엠마오로 가고 계십니까? 그러한 이들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고, 진정으로 부활 사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서를 보면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사건들이 여럿 나옵니다. 구약에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 (왕상 17:17-24 )을 살리는 사건이 나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5:21-24,35-43 )에게 ‘달리다굼’이라 말씀하시면서 살리는 장면, 베다니의 나사로(요 11:1-44 )를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밖에 베드로와 바울도 각각 죽은 사람을 살립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부활’을 이야기 할 때 종종 기독교는 과학자들과도, 철학자들과도 원치 않는 논쟁에 휘말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지 3일이나 지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세포가 이미 다 변질되어 버렸을 텐데 그 조직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 그것은 말도 안되기 때문에 뻥이다. 종교는 거짓이다! 라는 말로 호도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부활’사건을 보면서 반응하는 사람들의 양태가 극단적으로 2가지로 나누어 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을 진심으로 찬양하고, 그 신앙을 간직하고 감격에 빠집니다. 부활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야. 눈물을 흘리고 이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기세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부활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격멸합니다. 말도 안 되는 사기야. 저기에 현혹되면 안돼!
저는 부활에 대한 이 상반된 두 입장을 보면서 예전 황우석의 줄기세포 사건이 떠 올랐습니다. 지금도 황우석 박사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고 쫒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지요? 몇 개월 전 국회를 갔는데, 어떤 분이 1인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황우석 박사님을 탄압하지 말라’, ‘줄기 세포 연구에 국가예산을 계속해서 지원하라!’ 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더군요. 그 분은 아직도 황우석의 줄기세포만이 불치병에 걸린 그의 가족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었나 봅니다.
진시황이 그렇게도 원하고 바랬던 영원한 생명연장의 꿈 –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어찌보면 이 영원한 생명연장의 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부활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 2가지는 결국 나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을것인가 내 생명을 연장시켜줄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에 집중하는 모습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황우석의 줄기세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부활의 의미를 올바로 알고, 우리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나와 연관된 부활에 대해 고민해보겟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믿는 ‘부활’은 생명연장이 아니라 사명연장입니다. ‘부활 사건’은 결국에 한 사람의 잘 먹고 잘 사는 영생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살아내기 위한 삶의 치열한 투쟁의 과정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냥 살아도 되고 죽어도 되는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꼭 살아야 하는 소중한 한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고백한 부분에서도 나타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가 사는 인생, 그것이 나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좀 내려 놓으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라는 말입니다. 지금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말란이야기 입니다.
두 번째 ‘부활’은 우리 인생에 반전을 가져올 것입니다. 반전 영화의 대명사 식스센스가 있지요. 마지막 한 장면을 위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한 전개가 이어집니다. 솔직히 마지막 5분을 보지 않고 뛰쳐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영화는 마지막 5분으로 인해 영화 전체를 바꿔놓습니다. 예수의 삶에서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의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부여합니다. 조금 힘겹게 살아온 것 같은데, 별 의미없이 산 것 같은데, 그저 그렇게 살아온 것 같은데, 심지어 반역죄로 사형까지 당했는데~~ 그 다음에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분명히 우리들의 삶에 반전이 있습니다. 그 반전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 번째는 ‘부활’은 증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증인이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아무도 그 부활을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도 자신들이 이야기 했던 상대가 예수님임을 깨닫고 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전할지, 또 어떻게 살아갈 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들이 증인으로 살아갈 때. 예수님의 부활이 완성됩니다. 결국 증인이 되는 삶은 예수처럼 사는 길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이들이 예수처럼 사는 것 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두 제자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가는 방향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딜 향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김한글 군이 최근에 지은 시를 한편 읽고 마무리 지을려고 합니다. 제목은 ‘흔한사람’입니다.
당신은 참 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어딜가나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길을 걷다보면 난 아주 쉽게
당신의 뒷모습을 봅니다.
4월이 불러온
꽃잎에 앉은 햇살에서도
바람과 손잡고 온 설렘에서도
나는 당신을 찾아냅니다.
눈을 감고 기억을 내려놓는 밤에
꿈에서조차 당신은 흔히 있습니다.
너무도 흔한 당신
내겐 유일하게 흔한당신
여러분에게 부활한 예수님이 정말 매우 매우 흔한사람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