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조회 수 75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2011년 5월 22일 부활절 제5주/ 웨슬리회심기념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변화의 순간'

이관택

본문: 로마서 1:16-17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7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뜬금없는 질문

뜬금없는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변화’를 원하십니까? 어떤 변화를 원하십니까? 제가 사람들은 어떤 변화를 원할까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봤는데 성형외과 광고가 가장 많더라고요. 날씬한 몸매를 원하십니까? ㅋㅋ 사람이 변화를 원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변화’는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인체에서 가장 큰 신체기관이 무엇일까요? 바로 피부입니다. 어른 남자의 경우 피부의 넓이는 평균 1.9평방미터, 여자의 경우는 1.6평방 미터라고 합니다. 피부는 끊임없이 벗겨지고, 4주마다 완전히 새 피부로 바뀌는데, 우리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이 천연의 완전 방수의 가죽옷을 한 달에 한번씩 갈아입는 격이 되는 겁니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벗어버리는 피부의 무게는 48Kg정도로 약 1000번정도를 새로 갈아 입는다고 합니다. 우리몸을 둘러 싸고 있는 이 피부도 한달에 한번씩 바뀌는 마당에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얼마나 자주 바뀌겠습니까? ‘살아있다는 말’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맨날 똑같습니다.

나이드신 분들에게 묻습니다. 요즘 어떠세요? ‘뭐 맨날 똑같죠.’ 저는 처음에 이 말을 들을 때 한숨이 나오더라구요. 그냥 재밌는 일도 없고, 변화도 없고, 그저 그렇습니다. 라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이들면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어떤 학자가 그러는데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이 말 ‘맨날 똑같죠.’라는 말에는 항상 ‘변화하고 있죠’ ‘성장하고 있죠’ ‘항상 새로운 날이죠’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답니다.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자연의 변화, 세월의 변화가 익숙하고 그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겨 살면서 생겨난 감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는 게 맨날 똑같지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똑같고, 태양과 달, 푸르른 초록의 나무들까지 이 우주가 나를 위해 오늘도 수고하고 있다는 사실이 똑같습니다. 나의 육체와 정신 생각과 영이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똑같습니다. 참 맨날 똑같습니다. 맨날 새롭습니다. 맨날 사랑스럽습니다. 옆사람 보시면서 인사해볼까요? 한 사람이 요즘 어떠세요? 하고 묻고 따른 분이 ‘맨날 똑같습니다.’라고 대답해 보세요.

감리교를 아십니까?

오늘은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웨슬리의 273주년회심기념주일입니다. ‘회심’이라는 말은 마음을 돌이키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273년 전의 회심사건, 즉 웨슬리가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린 그 사건이 지금의 감리교회를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이제 교파는 별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감리교도 장로교, 침례교도 장로교, 순복음교회도 장로교의 색깔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대부분 자신의 구원관과 교회적 전통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예수 잘 믿고 천국가면 된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뿌리를 모르고 근본을 모르니까, 현재의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신앙생활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 현 한국교회의 실태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좋은만남교회의 성도님들께서는 감리교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감리교는 영어로 메소디스트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규칙쟁이라는 뜻도 있고,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는 18세기 영국에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킨 요한 웨슬레와 또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별명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웨슬레가 난 이제 규칙쟁이야! 난 원칙을 따르는 메소디스트야 하고 말하고 다닌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죠. 웨슬리는 참 규칙적인 사람이야. 참 원칙적인 사람이야. 바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웨슬리를 아십니까?

웨슬리는 1703년에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영국은 성공회가 국교이죠. 웨슬리는 이 성공회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물론 그 자신도 성공회 신부가 됩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하나님을 따르고 믿는데에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대학 때는 친구들과 함께 홀리클럽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열심히 활동했지요. 웨슬리에게 이때는 이 세상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메소디스트라는 별명은 사실 이 대학 때 얻은 별명이었습니다. 칭찬이기도 했고 비아냥이기도 했지만 웨슬리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도하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서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의 삶이 그저 성공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1975년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주로 선교를 떠납니다.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선교를 간 2년 동안 웨슬리는 처절한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그 동안 쌓아왔던 신앙적인 믿음과 확신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절망감과 자괴감에 휩싸인 웨슬리는 배를 타게 되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풍랑이 일고 배는 뒤집어 질 것 같습니다. 웨슬리는 엄청나게 두려웠습니다. 그 때 찬송을 부르면서 그 두려운시간을 기쁘게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웨슬리는 그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자신은 실패했고, 자신은 두려웠지만, 그들의 찬양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들의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 곳에서 모라비아 교도들을 만난 웨슬리는 지속적으로 그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던 중,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저녁에 Aldersgate Street에서 있는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하는 작은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밤 8시 45분경이 되었을 때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웨슬리가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자의 마음속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한 내용을 듣게 될 때 그의 마음과 영혼 속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웨슬리는 그 당시 자신의 상태를 그의 일기에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스럽게도 따뜻해짐을 느꼈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내 죄, 내 자신의 죄를 가져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내게 주셨다.....””

세계는 나의 교구

이 후 웨슬리의 삶은 18세기 영국을 구원했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영국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남겼습니다. 웨슬리는 복음을 전하되 온전한 복음, 총체적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이야기 하며 교회를 뛰쳐나와 말을 타고 이 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해외선교하는 이들이 웨슬리가 한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해외에 나가야 한다고 하는데, 그건 말이 안됩니다. 웨슬리가 이야기 한 세계는 해외가 아니라 교회 밖을 이야기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 밖에서 사역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안주하지 않고 사역했던 모습과 마찬가지 입니다.

비참한 시대 빛을 발하다

웨슬리가 활동했던 시기는 영국의 산업혁명 초기 시대입니다. 지금의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시기였죠. 그러다 보니까 지금과 같은 복지의 개념이 없습니다. 사람이야 죽던지 말던지, 노동법도 없고, 인권 같은 것이 아예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하루 16시간 노동, 휴일도 없고, 휴가도 없습니다. 그 때를 회상하면 이러한 장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자식이 일하다가 병에 걸려 죽으면 부모가 기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짜로 시늉만 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뻐했습니다. 사실 삶이 지옥 같았으니까 그렇습니다. 아이들도 교육 받지 못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70년대를 상상하면 좋을 듯한데, 그보다 수십배 어려웠던 시기가 바로 산업혁명 초기의 모습입니다. 일도 많아 인간 노예처럼 부려지기도 했고, 실업률도 매우 놓았습니다. 일반 서민들의 삶은 아귀비환이 따로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노동자들이 공장과 기계를 파괴하는 운동들을 벌였을까요?

이럴 때에 웨슬리는 영국의 방방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그가 가는 곳에는 탁아소가 생기고, 노동조합이 생기고, 신용협동조합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는 특히 탄광촌에서 많은 사역을 했는데, 10살밖에 안된 어린 아이들이 학교도 가지 못하고 그 깊은 굴속에서 석탄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자 그것을 보다 못한 웨슬리가 교회학교를 만듭니다. 또 당시 휴일도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주일을 선포하고, 교회가는 날 다시 말해 안식일을 만들게 됩니다.

웨슬리가 가는 곳에는 복음이 있는 곳에 교회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피폐한 삶에 지쳐 쓰러진 이들의 쉴 곳이 생겼습니다. 각 자가 다 절망 속에 있는 시절 그들에게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얘기하면 그들이 모일 수 있게 모임을 결성합니다. 감리교의 자랑 거리가 바로 속회이고, 밴드인데 이것이 바로 그 모임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18세기 다른 나라에는 폭력적인 혁명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영국은 명예혁명이라는 피가 없는 무혈혁명이 가능하게 된 것은 웨슬리의 신앙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의 변화가 결국 힘들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영국사회를 변화 시키고, 그것을 넘어 전세계를 변화시키는 과정이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감리교인이다라는 것

내가 감리교인이다라는 것은 그저 감리교교회에 다닌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건 근본없는 이들이 이야기 하는 것이고 내가 감리교인이라는 것은 결국 세상을 변화시킬 온전한 복음을 지향했던 끊임없이 하나님을 믿고, 그 힘을 가지고, 힘겨운 이들과 함께 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삶에 희망을 주는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신앙운동에 동참하겠다. 웨슬리처럼 살겠다라고 다짐하는 것이 바로 감리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리교에는 다른 교파에 없는 사회신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성화와 사회적 영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복음, 바로 이 땅을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선교’ 미시오 데이의 진정한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요한웨슬리의 273주년 회심기념주일에 기념해야 할 것은 아 감리교가 벌써 273년이나 되었어가 아닙니다. 지금 한국의 감리교를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사회의 지탄을 박고 있고 교단은 갈기갈기 찢져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감리교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 신앙운동의 정신이며 그것을 가능케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회심의 순간

그렇게 놀라운 삶을 살았던 웨슬리가 자기 삶을 돌이켜 보면서 내 삶이 변화되었던 때가 언제인가>를 돌이켜보니 1938년 5월24일 수요일 오후 8시 45쯤에 작은 기도회에서 인도자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어줄 때라고 합니다. 영국을 구원했다고 평가받은 위대한 사람의 변화가 되는 시점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평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최소한 바울 정도는 되야지요. 다메섹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러 가는데, 갑자기 빛이 나서 바울의 눈이 멀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고~ 사흘 후에 눈을 뜨고 말입니다. 웨슬리는 그저 마음이 따뜻해졌다라고 일기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회심사건은 엄청난 강사의 설교를 듣고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탄광에서 아이들을 위해 교회학교를 만들고 노동조합을 만들 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루터의 로마서 서문의 핵심은 오늘 함께 읽은 말씀에 있습니다.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7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웨슬리를 변하게 한 이 말씀은 실상 그 때 한번이 아닐 것입니다. 웨슬리는 평생을 이 말씀을 가지고 씨름했겠지요. 어떤 일이 있어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어떤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위한 것이다. 결국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나는데, 결국 그것은 믿음에 근거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마음이 결국 웨슬리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살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니 바울이나 웨슬리나 모두 그 믿음에 바탕을 둔 삶입니다. 변화의 ‘순간’을 만나고 싶습니까? 결국 그런 순간은 맨날 똑같습니다. 회심의 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맨날이 회심이고 맨날이 변심입니다. 그래야 변신할 수 있지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73주년 웨슬리회심기념일입니다. 사실 기념일은 우리 삶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함옥분 권사님 가정에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손규원 성도님 20주기 추도예배를 드렸습니다. 벌써 20년이나 된 세월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 또 수요일은5.18 광주 민중항쟁 31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또 내일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항상 그렇지만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죽은 자들 또는 과거의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정말 불필요하고 거추장한 날이됩니다. 하지만 기념일은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든 소중한 시간일 것입니다. 오늘을 어떻게 사는가는 결국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63 인생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잔치! / 누가복음 22:15-20 - 방현섭 목사 방현섭 2011.05.17 563
462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5/1) 좋은만남 2011.06.14 376
461 [깨어나십시오] - 그런게 아니다 3 좋은만남 2011.06.14 394
460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 요한복음 12:20-26 - 이관택 전도사 좋은만남 2011.06.14 749
459 [깨어나십시오] - 문화적 조건화 좋은만남 2011.06.14 394
458 '부활은 증인을 필요로 한다' /누가복음 24:13-25 - 이관택 전도사 좋은만남 2011.06.14 712
457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5/8) 좋은만남 2011.06.14 361
456 [깨어나십시오] - 문화적 조건화 2 좋은만남 2011.06.14 348
» '변화의 순간' / 로마서 1:16-17 - 이관택 전도사 좋은만남 2011.06.14 756
454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5/22) 좋은만남 2011.06.14 393
453 [깨어나십시오] - 문화적 조건화 3 좋은만남 2011.06.14 409
452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5/29) 좋은만남 2011.06.14 354
451 [깨어나십시오] - 여과되는 현실 1 좋은만남 2011.06.14 447
450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6/5) 좋은만남 2011.06.14 360
Board Pagination Prev 1 ...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 56 Next
/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