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를 꿈꾸며" / 마태복음 14:22-33 - 이관택 전도사

by 좋은만남 posted Sep 1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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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911일 성령강림절 제13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이상한 나라를 꿈꾸며

이관택

 

본문: 마태복음 14:22-33

22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서,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23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24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25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26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서 소리를 질렀다. 27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28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30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32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33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911 10주기 묵념

오늘은 20019.11 테러 사건이 일어난 지가 십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먼저 갈등과 평화 없는 세상으로 인해 죽음을 당한 3000명 가량의 사람들과 그 사건과 연결되어 고난을 당한 세계 도처의 사람들을 위해 묵념하시겠습니다.

 

신앙은 참된 여행이다.

 

여러분 여행을 가 보신 적이 있지요? 사람마다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겐 어떤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나요? 매일 똑같은 일터, 매일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우리는 어느새 지치기 십상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이라고 해도, 내가 어렸을 때부터 꿈에 그리던 일이라고 해도, 반복되는 일상이 되어 버리면 그 소중함을 잊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늘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상상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여행을 하기 위해서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번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고 대중매체가 우리의 모든 감각을 틀어막고 있는 요즘은 우리 삶의 곳곳에서 일상의 역전이 일어납니다.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슈퍼스타 케이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해외여행도 너무나 쉽게 갈 수 있는 세상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상황은 조금 왜곡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삶의 일상을 등한시 하고, 하릴없이 헛된 꿈만 꾸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내 일상에서 진정으로 내가 주인이 되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늘만 대충 모면하고 넘어가려는 패배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점점 무기력해지는 것은 바로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망각한 채 꿈만 꾸게 하는 여행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여행을 가는 것보다. 특별한 경험입니다. 나와 여러분의 존재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직접 손수 생기를 불어넣어 창조한 존재라는 것 아닙니까?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크신 일을 하실 것이라는 삶의 목적을 지니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아무리 힘겹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믿음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감사함의 연속, 감격의 연속, 신비의 연속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인생입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의 회색톤의 단조로운 일상에 하나님께서 파란색 물감으로, 빨간색 물감으로 덧칠하여,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나만의 그림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공동작품이지요.

아나톨 프랑스라는 사람은 여행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 주는 것이다앞에서 이야기하는 해외여행이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떠나는 환상 여행은 실제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 주지는 못합니다. 그저 욕망을 잠깐 해소해 줄 뿐이지요. 하지만 삶의 의미를 바꾸어주는 여행. 내 인생을 바꾸어주는 여행이 진짜 여행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여행, 이 신앙 여정에서 우리는 단순히 자극적인 기쁨과 감격을 넘어서는 인생 자체가 바뀌는 여행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나의 욕심과 바람은 조금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귀 기울여 보시는 그런 인생의 여정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제자들의 하루하루

 

성서를 보니까 수많은 기적이 등장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삶은 기적과 치유 그리고 해방으로 가득하지요.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들은 입이 딱 벌어집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병자가 치유되는데 얼마나 놀랍습니까? 단 하루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매일이 감격이요. 매일이 기쁨의 나날들을 살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과연 매일 매일 기쁨의 삶을 살았을까요? 저는 이 부분이 궁금했습니다. 예수님과 매일 직접 머리를 맞대고, 함께 잠을 자고 했던 제자들은 과연 매일 매일 기쁨을 만끽했는가? 어느 때는 자신이 직접 병자를 일으키고, 귀신을 내쫒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을 오래도록 간직했는가? 성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질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오늘 말씀도 제자들은 배 위에서 풍랑 가운데, 몹시 떨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배에 타기 바로 전에 제자들이 경험한 사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얼마나 의기양양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 먼저 배를 타고 건너가시고, 제자들이 뒤따르죠. 그런데 폭풍이 오니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적을 경험하고, 기쁨을 만끽한다고 해서 약한 우리들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죠. 제자들은 마음으로는 모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떠들어댔겠지만 깊은 밤 풍랑을 만나자 자신들의 약함을 직면합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예수님께서 걸어오시는 데, 뭐라고 합니까? 유령이다라고 하면서 경기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할까요?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면 말입니다.

저는 이 성서구절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한 장면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우리들의 신앙생활하는 모습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이야기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음에 감사해도 결국 삶의 시험들 앞에선 우리의 약함을 드러낼 것이라는 겁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귀신이라! 악마라! 오해할 수도 있는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힘을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고 계신 것을 보고 자신도 물 위로 뛰어듭니다. 얼마나 큰 믿음이며, 실천입니까?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어집니까? 그새 물에 빠지고 마는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죠. 그리고 왜이렇게 믿음이 적느냐고 탄식하십니다. 잘 보면 야단치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이는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그리고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게네사렛으로 가셔서 수많은 병든 자들을 고칩니다.

신비는 계속됩니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신비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돕습니다. 의심이 참 많은 제자도 있고, 욕심이 많은 제자도 있고, 나약한 제자도 있었지만 이들이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풍성해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동행함으로 제자들의 인생에 신비가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가끔은 이상한 나라를 살아봅시다.

 

하루하루라는 말은 참 지겹습니다. 뭔가 특별한 일 안 생기나? 기대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상한 나라를 꿈꾸나 봅니다. 윤성근 성도님께서 운영하시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도 이런 신비스런 기대를 갖게 하는 이름이지요. 물이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데, 이상한 나라는 물이 낮은데서 높은 곳으로 흘러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번 어디가를 놀러 갔는데, 수도꼭지가 공중에 있는 데 거기서 물이 막 떨러지는 거예요. 참 신기했습니다. 물론 속임수였지요. 신기한 거랑 신비한 거랑은 조금 다르죠. 참 그 기억이 강렬합니다. 이상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제가 최근에 경험한 이상한 나라는 수화를 배우러 갔을 때입니다. 요즘 제가 수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영어공부를 시작해 볼까 하다가, 이왕 언어를 배울 거면 나의 스펙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소통을 하기 위한 언어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고심하다가 수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음성언어가 필요 없는 공간에 가본 적이 있으신가요? 일체의 소음이 없는 수업시간! 선생님께서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에 비장애인인 학생들도 전혀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그 곳에서 저는 그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합니다. 참으로 놀랍더라구요. 음성언어가 안 되고, 그렇다고 학생들이 수화도 잘 아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까? 궁금하시죠? 신기한 것은 바디랭기쥐와 표정으로 수업이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몇 번씩 반복하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향해 밝게 웃어주는 것이 이 수업의 키포인트입니다.

신기하다 못해 신비함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우리가 서로 소통하시길 원하시는 구나. 참 많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이 통하고, 생각이 통한다고 해도 우리가 서로의 말을 얼마나 들으려고 합니까? 서로의 말을 이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 본적이 없으시죠? 그런데 필사적으로 노력해보는 이상한 경험도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필요하다라는 겁니다. 연애해 보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서로를 알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기분, 그 이상한 나라를 말입니다.

찰리의 초콜릿 공장이라는 영화를 보면 아이들이 바라는 이상한 나라가 등장합니다. 모든 것이 과자와 초콜릿으로 된 공장이지요. 그것과 같이 우리 신앙인들이 바라는 이상한 나라는 어찌보면 하나님 나라와 가깝지 않을까요?

 

기독교의 신비

모세가 출애굽기 314절에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저보고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라고 하시는데, 제가 하나님을 누구라고 설명합니까?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지난번 촛불 기도회에서 김경호 목사님께서 이 부분을 설명하시면서 번역이 잘 못되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 더불어 있는 자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WITH’ 정도가 되겠지요. 나와 더불어 있는 하나님! 여러분과 더불어 있는 하나님! 이 하나님과 함께 우리는 이상한 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볼 때는 조금 이해가 안가는 모습이겠지요. 하지만 우리와 더불어 있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십니다.

우리 기독교의 신비가 있습니다. 바로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신비입니다. 고난과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 닥치는 고난이 그저 성난 파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고난은 결국 우리를 부활시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더불어 계신 하나님과 함께 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난이 부활을 위한 고난이 아니겠지요?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향해 살아가고, 이상한 나라를 지향하고 꿈꾸며, 원하는 삶을 살던 중에 당하는 고난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승진하려고 아등바등하고, 남을 짓밟으려는데 그게 잘 안 되서 억울해 하는 것을 고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입니까?

 

 

결국 모든 것은 거룩하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보면 목동 산티아고가 자기 신화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산티아고는 긴 여행의 끝에 오아시스에서 연금술사를 만납니다. 연금술은 금을 만드는 기술이죠. 그래서 산티아고는 연금술을 통하여 큰 부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연금술사는 산티아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물질은 자기시간이 있다. 금의 시간도 있고, 납의 시간도 있다. 모든 물질은 자기시간을 채운 뒤에 다른 물질로 변화한다. 금이 납이 되기도 하고, 납이 금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연금술사는 모든 사물을 거룩하게 본다. 한 알의 모래가 우주가 될 수 있다. 아니 곧 우주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이상한 나라~ 결국 모든 것이 신비이고, 모든 것이 거룩합니다.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상황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변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점점 변해 갈 것입니다. 금보다 더 귀해 지실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318절을 보면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너울을 벗어버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상한 나라를 꿈꾸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한정된 시각에서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운혜가 풍성한 한가위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좀 더 아름답고, 신나는 신앙여정을 꿈꾸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