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얼굴’ / 느헤미야 8:10 - 이관택 전도사

by 좋은만남 posted Oct 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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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일 왕국절 제1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못생긴 얼굴

이관택

 

본문: 느헤미야 8:10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돌아들 가십시오. 살진 짐승들을 잡아 푸짐하게 차려서, 먹고 마시도록 하십시오. 아무것도 차리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먹을 몫을 보내 주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의 거룩한 날입니다.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니, 슬퍼하지들 마십시오." [새번역]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개역개정]

 

얼굴 그리고 표정

여러분 거울을 자주 보시는지요? 저 같은 경우는 워낙 제 얼굴에 자신이 있다 보니까 거울을 잘 보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빨 이층에 불이 난 채로 다닐 때가 많은 데, 많은 분들이 지적해주시죠. 하지만 별로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는 얼굴에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울을 자주 보시더라구요. 거울은 우리의 얼굴을 비춰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진짜 거울 속에 비친 그 모습이 나의 진정한 얼굴일까요? 생각하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얼굴은 이목구비 생김새가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얼굴엔 표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거울에는 우리들의 이러한 얼굴 표정들이 정확히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얼굴 생김새도 생김새이지만 그 사람의 얼굴은 표정과 함께 만들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 얼굴이 짓는 표정이 진짜 그 사람을 보여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사는지에 대해선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저 이빨에 고춧가루가 묻어있나? 화장은 잘 먹었나? 정도로 나의 얼굴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앞에 화면을 보시면 여러 가지 얼굴표정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얼굴 표정으로 지난 한 주간을 살아오셨습니까? 기쁨에 넘쳐서 얼굴에 미소를 지으신 분도 있을 것이고,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한 주간을 살아오신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슬픈 얼굴 표정으로 지내신 분도 있겠지요. 어떤 분은 힘겨운 얼굴, 한숨만 푹푹 나오는 무기력한 표정으로 지내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얼굴 표정으로 한 주간을 지내왔는지 한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얼굴하나씩만 정해 봅시다. 내 얼굴이 저랬을 거야! (두 분정도 이야기 해봄)

어떤 기쁨, 어떤 슬픔

요즘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내가 과연 어떤 얼굴표정을 하고 있을까요? 피곤에 찌든 얼굴, 힘들고 지친 얼굴을 많이 생각하시죠. 하지만 한 가지 더 말씀 드립니다. 과연 기쁜 얼굴 표정을 가지고 사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슬프고 지친 얼굴 표정을 가지고 사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당연히 기쁜 얼굴표정을 가지고 사는 것이 참 행복하고 잘 사는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물어봐야 합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기쁘셨습니까? 또는 무엇 때문에 슬프고 우울했나요?

기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쁨은 방탕한 쾌락이 만들어 낸 기쁨입니다. 어떤 기쁨은 남을 속이고, 무시하면서 얻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쁨은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남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했을 때 느끼는 기쁨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느끼는 그 짜릿한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내 옆 사람보다는 그래도 조금 낫지 하면서 속으로 느끼는 은밀한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슬픔이라고 다 나쁜 것 아닙니다. 어떤 슬픔은 진정으로 힘든 일이 생긴 나의 친구 때문에 느끼는 슬픔입니다. 어떤 슬픔은 불의한 일을 보고, 도와주지 못하고 무력해져서 느끼는 슬픔입니다. 또 어떤 슬픔은 기도하다가 굶주림에 죽어가는 이웃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을 때 느끼는 슬픔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슬픈 표정일까? 나는 어떤 기쁜 표정일까? 하나님 앞에서 다시금 나의 얼굴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이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의 모습, 나아가 삶 속에서 신앙인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얼굴 생김새 중요합니다. 또 그 얼굴 생김새를 살아있게, 생기있게하는 표정이 더 중요하지요. 하지만 본질은 그 표정을 만들고 있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또 그 표정의 이유입니다. 무엇 때문에 기쁘고, 무엇 때문에 슬퍼지십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 모두가 기쁘고, 슬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기쁜지, 왜 슬픈지... 예수님은 과연 왜 웃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언제 애통해 하셨습니까? 믿는 사람들은 이유가 다릅니다.

신앙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거울 앞에 비춰지는 그 얼굴이라도 좀 예뻐지겠다고 얼굴에 칼을 대고, 깎고, 넣고, 별짓을 다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얼굴 표정이 중요하다고 웃는 얼굴을 연습하고, 미소짓는 법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거울에 비춘 얼굴도 중요하고, 표정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표정의 이유까지도 신경 써야 하니 참 어렵습니다. 쉽게 쉽게 편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도대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만히 놔두시질 않습니다.

하지만 쉽게 쉽게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신경하게 세상이란 강물이 흐르는 대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몸을 맡겨 함께 떠내려 가는 것, 때론 우리에게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아니겠지요. 하나님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때론 물을 거슬러 헤엄을 쳐야 할 때도 있고 잠시 동안은 잠수를 해야 할 때도 있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를 정확히 알고 가는 길이 신앙여정이니 말입니다.

 

다시 찾은 기쁨

오늘 본문을 보면 느헤미야의 선포입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개역개정]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받으십니까? 사실 느헤미야가 오늘의 이 말씀을 선포하는 장면은 굉장히 감동이 넘쳐나고, 영화로 따지면 완전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구약성서에서 연속되고 이어지는 성서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솔로몬 왕 이후에 BC 933년에 이스라엘은 두 개의 나라로 갈라지게 됩니다. 북쪽에는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북이스라엘, 남쪽에는 르호보암이 통치하는 남유다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을 당하고, BC 588년에 남유다는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이 때부터 포로기 시작되는 겁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끌려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되지요. 하지만 이들은 겪은 고초는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니었습니다. 뭐 감옥에 있다거나, 강제노역을 하는 그런 어려움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는 것! 하나님의 법이 아닌 바벨론 왕의 법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힘이 들었던 것입니다.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가끔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지 못합니다. 결국은 기쁨의 이유가,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져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상대방을 칭찬하거나 축복해줄 때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God bless you!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할 때 내가 기쁠 수 있고 내 삶의 목적이 있는데, 나의 정체성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BC 536년에 바벨론이 멸망합니다. 제국이 붕괴한 것이죠. 그 이후에 다시 이스라엘로 귀환 하게 됩니다. 첫 번째 귀환은 스룹바벨 총독이 이끌고 오늘의 배경은 느헤미야가 이끈 두 번째 귀환이 배경이 됩니다. 느헤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면서 파괴된 이스라엘 성벽을 재건하느라 온 힘을 쏟게 됩니다. 방해 세력도 진짜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떠난 뒤에 그 땅을 차지한 수많은 세력들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느혜미야는 그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드디어 성벽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을 세우고 바벨론에 남아있던 포로들을 귀환시킵니다. 수많은 무리가 귀환하여 오늘 성벽 안을 꽉채우고 모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장면은 그렇게 이스라엘로 다시 귀환한 백성들이 모두 한 군데 모인 장면이니다. 단 위에는 총독 느혜미야가 있고 그 옆에는 학자 에스라가 있습니다. 에스라는 율법책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율법을 들으면서 눈물을 철철 흘리고, 때론 아멘으로 찬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발언으로 느헤미야가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자유입니다. 어서 돌아가서 자유롭게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드십시요! 오늘은 우리에게 가장 기쁜 날이면서 가장 거룩한 날입니다. 앞으로의 일을 근심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통하여 기쁠 수 잇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50여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성벽이 재건되었다고는 하나, 예전만 다윗과 솔로몬 시대 때 지었던 웅장한 성벽만 했겠습니까? 시설이 자신들이 포로생활 했던 바벨론보다 더 좋았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생활적으로는 너무나 불편했겠지요. 이 날 바로 집에 가서 엄청나게 후회했을 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바벨론이 더 나았을 거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다라고 말입니다.

신앙인의 힘은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조건과 환경이 아니다 싶어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나는 기쁘다! 하나님만 나와 함께 하신다면 그것 때문에 기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삶의 고백이 나의 얼굴을 바꿔내겠지요.

 

기독교의 얼굴

지난 주 영화를 한편 보았는데, 영화를 본 뒤에 마음이 영 좋지 않앗습니다. 바로 도가니라는 영화인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영화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모습이었습니다. 탐욕과 가식이 가득하고, 비상식적이고, 심지어는 악마적이기 까지한 모습으로 교회와 신자들이 그려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자리에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정도 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아! 개독교~ 개독교~ 소리가 연신 나오는데. 종교가 어떻게 저럴수 있지? 라는 평가가 아니라, 개독교가 그렇지 뭐~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진짜 이 사회에서 기독교의 위상이라는 것이 여기까지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 날 저녁 인터넷뉴스를 보니 기독자유민주당 창당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그것을 보니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서 기독교가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좀 소박하고, 푸근하지만 삶이 뒷받침되는 예수님 같이 썩 괜찮은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가? 어딜가나 그 동네에서 가장 좋은 건물은 교회라고 하지요. 무슨 성형수술한 것 마냥 놀라운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영화에서 보면 청각장애인, 발달장애 아동들을 성폭행하면서 한껏 기쁨의 찬 악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무엇 때문에 기쁜지, 우리 신앙인들은 좀 달라야겠지요.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 아닙니까?

 

나눔과 기쁨의 자리

지난 주부터 우리교회에서 발달 장애아동들과 함께하는 토마토학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벌써 3학기 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 자리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자리가 매주 토요일 장애로 인해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아이들이 항상 밝게 웃고 즐겁게 활동하는 나눔과 기쁨의 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 자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 합장의 의미

나이가 차면 그 얼굴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뻐하고, 슬퍼해야 하는 상황에서 슬퍼할 수 있는 얼굴을 갖는다는 것이 신앙인의 얼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