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4일 강림절 제2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빛으로 이어지는 어둠
이관택
본문: 요한복음 21장 1-9절
1 그 뒤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그가 나타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4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8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탄 채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해안으로 나왔다. 그들은 육지에서 백 자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9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벌써 12월입니다. 한해의 마지막 달이자 이제 곧 있으면 한 살 더 먹는 것을 의미하는 달입니다. 또한 교회력 절기로는 강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강림절기는 어떤 절기입니까?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기다림에는 여러 가지 기다림이 있습니다. 첫사랑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설레이는 기다림이 있구요. 굉장히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들처럼, 두렵고 떨리는 기다림도 있습니다. 또 그저 마냥 지루하고 의미도 없는 기다림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해가 마무리 되어가는 이 강림절기에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거리를 가득 메운 크리스마스 트리들을 보면서 우리는 뭔지 모를 설레임을 느끼곤 합니다. 실상 우리의 소비욕을 자극하는 번쩍거림일 뿐이지만, 그래도 거리의 캐롤송과 성탄장식이 없다면 이 연말 얼마나 팍팍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너무 아쉬운 것이 5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세요 거리마다 연등이 달립니다. 이 연등 안에는 불교의 가르침을 믿는 불교신자들의 소원과 부처님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는 이들도 그 연등의 존재를 보면서 뭔가 숙연함과 종교성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성탄절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하고, 캐롤을 부르며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고는 하나, 어떤 모습입니까? 상인들에게는 한 해 동안 못 팔고 있었던 물건들 왕창 팔 수 있는 기회이며, 젊은이들에게는 애인과 함께 좋은 추억을 만들어야 하는 날이며, 그저 술마시고 즐기는 날로 밖에 기억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강림절기에 그 저 형식적으로 성탄절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정성을 가지고, 거룩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는 무엇을 기다립니까?
옛날 한 신앙이 너무 좋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에게는 형이 한명 있었는데, 곧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그 때 소문이 돌았습니다. 예수님이 드셨던 우물 그러니까 지금은 숨겨져 있는 우물을 찾으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우물을 찾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우물을 찾다가 죽어나갔습니다. 이 동생은 형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죽을 고생을 하여 우물을 찾았습니다. 그는 간절이 형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형은 죽어 있고, 자신의 집은 엄청난 부자가 되어있었습니다. 과연 그의 진심은 어떤 기도를 하였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우리 자신은 잘 모릅니다. 내 자신도 나를 속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흐트러지기 쉬운 연말, 이 강림절의 마음을 분별하여 진정으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던 아기예수의 탄생을 염원하는 저와 여러 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빛이 감춰져 있는 어둠
창세기 1장 3-4절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4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이 바로 ‘빛’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 보시면 빛은 혼돈하고 공헌하고, 어둠이 깊은 세상을 뚫고 생겨납니다. 이는 창세기를 고백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바로 보여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구라는 별을 먼저 만드신 것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공기를 먼저 만드신 것도 아니고 빛을 만드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절망과 같은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생의 희망이 바로 빛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은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고, 그 빛이 보시기에 좋았는데, 빛과 어둠을 나누셨답니다. 우리가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빛과 어둠으로 나누셨는데 바로 이 때의 어둠입니다. 빛을 만드셨으면 어둠을 아예 없애버리셨다면 좋았을거늘 왜 어둠을 따로 남겨 두셨을까?
하지만 여러분 분명한 것은 태초부터 이 땅에 깊이 드리워 있던 어둠과 빛이 생겨난 이후의 어둠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빛이 앞으로는 절대 없다라고 햇을 때의 어둠은 절망입니다. 끔찍하지요. 마치 감옥과 같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둠 뒤에 빛이 올 것이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어둠이 지나가면 빛이 온다”고 했을 때의 어둠은 조금 달라집니다. 빛이 곧 올 것이라고 했을 때의 이 어둠은 새로운 가치를 갖게됩니다. 빛의 도래가 약속된 어둠은 희망이 있는 것 아닙니까? ‘곧’ 빛이 온다. 이 기다림의 시간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둠의 의미입니다.
빛이 완전 없는 것처럼 사는 인생과 빛이 있음을 전제한 인생도 그 의미가 완전 다르겠지요. 그런면에서 우리 신앙인은 같은 공간을 살아도 다른 차원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어내는 어둠의 시간은 그저 단순히 어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벽 미명 동이트는 새벽과 같이 빛을 마지하기 위한 어둠입니다. 빛으로 이어지는 어둠 이 얼마나 멋있는 상황입니까? 얼마전 김성희 집사님께서 준기와 같이 일출을 보러 갔던 사진을 페이스북을 통해 접했습니다. 빛이라는 것은 우리 삶을 더욱 희망차게 만들어 줍니다. 단순히 멋진광경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가치를 담는 것 이 강림절에 우리는 기다리는 아기 예수, 세상의 빛으로 오실 아기예수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혼돈과 허무함과 어둠을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실 수가 있습니다.
동이트는 시간: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하지만 팍팍한 일상을 살아내면서 순간순간 절망을 만나는 우리들 아닙니까? 잘 될거다. 조금만 참아라 무슨 희망고문도 아니고, 그러니까 종교가 사람들의 삶은 생각지 않고 뜬구름 잡는 것 아닙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베드로와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이 지금 어디에 잇습니까? 디베랴 바닷가라 하면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물질을 하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다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가 원래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직을 버리고, 그냥 세상 속의 평범한 어부, 다시 말해 하나님의 가치를 버리고 세상의 가치 속에 다시 매몰되어 버렸단 것입니다.
어느 날 밤새 고기를 잡는데, 한 마리도 못잡앗습니다. 동일 틀 무렵이 되었지요.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고기를 잡았느냐고 여쭈어 봅니다. 베드로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애기 했겠지요. 아뇨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 때 무언가가 베드로의 머리를 망치로 때린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언제가 경험해 본일 아닙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때, 그 순간이 그대로 재현되었던 것입니다. 어둠을 지나자 동이트고 날이 밝아 온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어둠의 시간이 빛의 시간으로 바뀌어 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저분은 주님이시다하고 외치더니 한 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닷물로 뛰어 듭니다. 그렇게도 바닷물을 무서워했던 베드로 아닙니까? 다른 제자들은 배에 타고 예수님께서 옵니다. 땅에 와보니 벌써 예수님께서는 숯불을 피워놓고 생선과 떡을 굽고 계십니다. 기가막히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린 수제자 베드로와의 첫 만남에서 너 이 녀석 나를 배신해? 다른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자고 할 때 말려야 할 니가 어떻게 다시 이런 곳에 와있니? 라고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의 밤샘 고생을 위로해주셨습니다, 가장 실제적인 것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어둠이 빛으로 바뀝니다. 그것은 단순한 개념적 상황이 아니라 실제적인 위로와 변화를 동반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베드로가 고기잡으로 가자고 할 때, 누가 있었습니까? 도마가 있었습니다. 도마는 바로 얼마 전 예수님을 만난 사람 아닙니까? 오죽 못 믿었으면 예수님의 상처에 직접 손을 넣었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가 또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으로 가는 모임에 함께 하고 잇습니다. 세상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오늘 성서는 우리들에게 절박하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여주고 보여줘도 우리는 무너질 수 밖에 없나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너무 확신하지 마세요. 우리는 연약합니다.
하루의 완성은 아침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우리는 보통 아침에 하루가 시작되고 밤에 끝이 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저녁이 되고 밤을 지나서 아침이 되어야 하루가 지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밤’이라는 시간입니다. 이 어둠을 어떻게 지내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일에 희망이 있는 사람에게 밤은 어떻습니까? 꿈을 꾸는 시간이며, 준비하는 시간이 재충전의 시간이 됩니다. 어둠을 통해 자신을 충분히 성찰하고 돌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하지만 내일에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밤은 별의미가 없거나 고통의 시간입니다. 날이 밝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고 자포자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이 어둠 뒤에 빛이 있다고 절박하게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강림절 우리는 아침을 기다립니다. 빛을 기다립니다. 아기 예수는 이 땅에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아닙니까? 그 빛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강림절 이 어둠의 시간의미 있게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