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5일 사순절 제5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너희가 알지 못하는 나의 양식
이관택
본문: 요한복음 4:31-38
31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랍비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셨다. 33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 하고 서로 말하였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서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 36 추수하는 사람은 품삯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들인다. 그리하면 씨를 뿌리는 사람과 추수하는 사람이 함께 기뻐할 것이다. 37 그러므로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를 보내서,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였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진짜 ‘봄’
저는 옷이 별로 없기 때문에 아직도 지난 초겨울, 함권사님께서 주신 외투를 입고 다니는데, 어느새 두터운 외투가 약간 부담스러운 때가 되었습니다. 아직 조금 쌀쌀하긴 하여서 두꺼운 외투를 벗으면 춥고, 그렇다고 입고 다니자니,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계절이 된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지난 주 드디어 초록가게와 토마토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진짜 봄이 오나 봅니다.
언제가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봄’이라는 계절의 이름은 순 우리말입니다. 바로 ‘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봄’이라는 계절에 선조들은 우리로 하여금 ‘볼 것’을 권유합니다.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녹색의 푸르른 새싹을 보라. 거리를 가득 채운 노란빛깔 개나리를 보라. 푸르른 하늘을 수놓은 뭉게구름을 보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3월 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주위를 둘러보면 그다지 푸릇푸릇하지가 않습니다. 아직도 스산하기 짝이 없고, 꽃도 없고, 아주 삭막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이거 봄이 온 건가? 의구심이 들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는데, 입춘, 그러니까 봄이 들어서는 때라고 하여 달력에 적혀 있는 날이 언제인줄 아십니까? 바로 올 해로 따지면 2월 4일이었습니다. 2월이면 한겨울입니다. 4월이 이제 코앞에 있는 지금도 이리 스산한데, 어젠 눈까지 펑펑 왔는데, 우리의 선조들은 왜 한겨울인 2월을 ‘입춘’이라는 절기로 지켰을까요? 지금은 환경오염 때문에 2월이 너무 춥고, 눈이 오지만, 그 옛날엔 2월 달이 아주 따뜻했을까요?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땐 더욱 추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아주 오래 전 부터 함박눈이 온 산을 뒤덮은 뒷산에서, 꽁꽁 얼어붙은 개울가에서, 씨앗하나 살아남기 힘든 차디찬 땅바닥에서 ‘봄’을 보았습니다. 신기하죠. 삭막한 땅에서 무엇을 볼까요? 바로 보이는 것 이면의 움쩍거리는 생명력을 본다는 것입니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판 밑으로 여전히 흐르는 시냇물을 보는 것이고, 그 시냇물 속에서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송사리 떼를 보는 것입니다. 차디찬 땅바닥 밑에서 씨앗의 싹을 틔우기 위해 부단히 역동하는 그 수많은 생명들, 박테리아들을 보는 것입니다. 겨울잠을 자던 짐승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생명의 약동하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그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믿으십니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진짜 ‘봄’입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이유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상스럽게도 ‘봄’은 실상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도 춥습니다. 아직도 겨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깨어있는 사람들은 이미 봄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있는 농부들은 아직도 땅이 얼어붙은 2월 말부터 땅과 다시 친해지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원리가 그렇듯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또한 그렇게 움직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여러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에 베드로도, 만나고 그의 형제 안드레도 만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너무 기뻐서,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를 전하면서, 우리 함께 그의 제자가 되자고 권유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당시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입니다. 나사렛은 이스라엘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 도적과 창녀가 창궐한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만 들어도 나다나엘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 것이었습니다. 그 땅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어!
하지만 그 참담한 땅 나사렛 출신인 예수님이 바로 이 땅을 구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더럽고 추한 마굿간의 말 먹이통에서 태어난 분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누가 봐도, 쓸모없는 돌 쪼가리를 가져다가 존귀한 성전의 머릿돌 삼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이유입니다.
나다나엘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 때, 빌립은 ‘와서 보시오’라고 한마디 합니다. 직접 보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직접 보는 방법은 만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직접 느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얼어붙어서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지만 얼음바닥 귀를 대고 가만히 드러보면 그 속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것 아닙니까?
진짜 ‘봄’이 시작되었는데,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서도 따뜻한 햇살과 향긋한 꽃내음이 가득한 봄의 기운을 만나시길 소망합니다. 비록 힘들고 추운 겨울 같은 우리의 인생이지만, 그 소망 없는 것 같은 우리의 인생을 들어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더욱 기대하시길 원합니다. 나다나엘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 때, 빌립이 와서 보라고 한 것처럼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만남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나만의 양식
신앙은 ‘봄’을 보듯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추상적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절대 안 된다고, 안된다고 하는 절망의 상황 가운데, 그래도 희망은 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신앙인들은 같은 세상을 살고 있어도 조금 다릅니다. 다른 차원으로 봅니다. 다른 차원으로 살게 됩니다. 마치 그 잔혹한 십자가 앞에서도 당당했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감옥에서 찬양을 불러댔던 바울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뭔가 다른 차원으로 살 수 있는 신앙인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식사하십시오”라고 하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십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궁금해 합니다. 아니 누가 우리 선생님에게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 급기야는 서로 서로 니가 가져다 드렸니? 니가 가져다 드렸어? 하고 소란을 떱니다. 그 때 예수님께선 말씀하십니다. 오늘 34절 보시면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제자들이 밥을 어떻게 먹을까? 우리 선생님 식사는 어떻게 할까? 골똘하고 골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의 양식을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그럼 예수님은 이슬만 먹나? 하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양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 아닙니까? 사람들은 보통 자신들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을 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살기 위해서 밥 먹어야지. 밥 먹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지, 결국 나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의 노예로 끌려다니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식사 한 끼를 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욕구는 그 곳으로 쏠리죠. 오로지 밥 생각밖에 나지 않게 됩니다. 지난 주 국민일보 파업 현장에 가서 기도회를 하는데, 그 곳에서 언론인들이 릴레이 금식기도 하는 것을 보고 목사님께서 자신의 금식 기도했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기도고 뭐고 진짜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답니다. 근데, 일주일 정도 지나자 배가 전혀 안 고팠다고 합니다. 몸에서 자동적으로 포기해버린 것 같다고 하더군요. 사실 우리 삶을 지탱하는데 있어서 밥이 중요하긴 하겠지만 밥이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의 말씀에서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의 삶의 양식이며, 원동력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을 지탱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밥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입니까?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밥이 우리를 살 수 있게 한다고, 우리를 지탱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그렇게 말할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밥을 먹지 않고 살 수 없지만 나를 지탱시키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뜻을 사는 겁니다. 나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와 생명의 가치가, 정의의 강물이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지금하고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저는 항상 불안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인가? 지금 구럼비 바위가 찢겨나가고 있는 이 때, 지난 번 제주도에 갔었는데, 그 때 강정마을에서 헌신하는 이들을 보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이상하게 부끄럽더라구요. 저도 나름 열심히 산다고 사는데, 말입니다. 지금 시청 앞에서 텐트치고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위해서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엊그제는 텐트도 빼앗기고 진짜 나리도 아닙니다. 그 분들 보면 못내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아 진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잘 살고 있나? 그 분들 텐트에서 주무시는데, 난 따뜻한 방에서 자고...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위안을 주더라구요. 36절에 “그리하면 씨를 뿌리는 사람과 추수하는 사람이 함께 기뻐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 즉 처음사람, 추수하는 사람 즉, 나중 사람이 함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 일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 할 날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죽었던 베드로, 바울도, 40년 전에 하나님의 일을 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도, 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현재를 살아가는 나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나의 진정한 양식으로 삼는다면, 결국 함께 기뻐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의 분량보단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분량만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매를 보던 못 보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만큼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삶은 충분히 가치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성과는 상관없어요. 부자, 명예 상관 없습니다. 결국 나의 양식, 나를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하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다 고백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고백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