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8일 부활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이관택
본문: 요한복음 13:4-9
4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5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6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다. 이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 7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8 베드로가 다시 예수께 말하였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9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내 발뿐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겨 주십시오."
‘공포’와 ‘연민’
여러분은 영화를 보실 때, 슬프고 비극적인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즐겁고 행복한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해피엔딩을 좋아합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 좋습니다. 찌질한 것은 딱 질색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슬픈 영화를 좋아합니다. 휴지를 옆에 끼고, 눈물을 한 바가지씩 흘리면서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이십니까? 행복한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눈물을 쏙 빼는 슬픈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그런데 통계를 보면 비극을 다룬 영화가, 눈물을 쏙 빼는 영화가 훨씬 흥행성적이 좋다고 합니다. 또한 영화나, 소설, 연극을 통틀어 해피하고, 즐거운 내용보다는 비극적이고, 슬픈 내용을 다룬 예술작품들이 훨씬 더 많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비극적인 것을 더욱 선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이렇게 비극적인 것을 좋아할까? 슬플텐데,우울할텐데, 말이죠. 아마도 타인의 슬픔을 통해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옛날,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관심있어 하는 슬픔을 주제로 하는 연극/ 즉 ‘비극’ 대해 분석하였습니다. 비극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감정은 바로 ‘연민’과 ‘공포’라고 합니다. ‘연민’은 파멸에 처한 타인의 처지를 곧 자신의 처지로 느끼는 감정이입의 상태를 말합니다. ‘공포’는 경악에 가까운 강렬한 감정입니다. ‘연민’은 타인에 대한 감정, ‘공포’는 나에 대한 감정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민과 공포의 감정이 다른 것 같지만 매우 유사한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한 끝 차이입니다. 어떤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현실이 너무 비극적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 동정이 생깁니다. 하지만 나에겐 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이 생길 가능성은 절대 없다고 생각 될 때, 연민이 생깁니다. 반대로,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바로 공포가 생기는 것입니다. 공포 영화를 보면 처음엔 영화의 주인공이 극단적인 상황에 빠져 어려움을 겪게 되니까 연민하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 하게되면서, 그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공포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이런 감정은 영화가 아니라 일상에서도 벌어집니다. 머나먼 나라에 태풍이나 쓰나미 소식이 들려왔을 때는 그저 연민하지만, 그것이 우리와 가까운 일본, 또는 우리나라의 상황이라면 공포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되는 것이죠. 평소 금술이 좋은 부부의 아내는 친구 신랑이 몰래 바람 피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동정의 눈물을 흘려주지만, 평소 남편의 행실을 의심스럽게 봐 온 아내라면, 친구 신랑이 몰래 바람 피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 남편도 그러진 않을까 겁부터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민과 공포의 차이입니다.
겁에 질린 세상
제가 오늘 연민과 공포의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과도한 공포의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한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겁에 질린 사회가 과거에 과연 있었을까요? 초등학교 아이들도, 스트레스 때문에 위장병이 걸리는 시대입니다. 한 사람이 보험을 몇 개씩이나 들고, 자신의 잠자는 시간을 체크하며,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는 시대입니다. 서대문 버스정류소에 있는 큰 광고판에는 어떤 한 남자가 달콤한 잠을 자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 윗부분에 이런 광고 문구가 있습니다. “지금 잠이 오십니까?” 보험회사 광고인데, 저는 그것이 굉장히 상징적이라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짓눌려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겁을 줍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이, 니네 그렇게 하다간 대학도 못가고, 평생 서울역에 있는 노숙인들처럼 살거다라고 겁을 주고, 교회에 가면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겁을 줍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화려하고 멋진 주인공들처럼 살지 않으면 나는 패배자인가보다 하고 겁을 먹게 됩니다. 자녀들 학원에 보내지 않으며, 안될 것처럼, 대학생들 어학연수한번 안가면 안될 것처럼... 병에 걸린 사람, 사고 당한 사람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면서 보험하나 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겁을 줍니다. 사실 이런 시대에 누군가를 연민하기란 참 힘이 듭니다. 내 옆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내어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 곁을 내어 주는 일이 그토록 어렵습니다. 왜냐면 내가 죽겠으니까. 내가 지금 죽을 것 같은데, 누구를 연민합니까.
알 수 없는 ‘불안’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상입니다. 아니 ‘불안’이 마구마구 조장되는 세상입니다. 흔히 공포 마켓팅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공포조차 누군가의 돈벌이가 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겁먹을 수밖에 없겠지요. 세상 모두가 자신이 인식할지 모르지만, 겁쟁이로 살고 있습니다. 우린 모두 겁쟁이입니다.
하지만 겁쟁이 같은 우리들이지만, 오늘은 예수님의 복된 부활의 소식이 선포된 날입니다. 어제는 비록 무덤에 머물러 있었지만 오늘은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그 예수님의 부활을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이 새기는 오늘, 비록 겁쟁이처럼 사는 우리 모습이지만, 어제는 그러했을지 몰라도, 오늘은 좀 달라지길 소망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오늘 하루를 살면서 마음껏 표현하시고, 부활의 능력이 내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모두가 겁에 질린 겁쟁이지만, 부활한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들만은 겁먹지 않고,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겁쟁이 예수
알고 보면 역사를 통 털어 많은 사람들이 겁쟁이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은 원래부터 겁이 없는 담대하기만 한 사람이었을까요? 또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며, 세상을 다 바꿀 것 같았던 그 예수님과 제자들은 왜 무리를 뒤로 하고, 항상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갔을까요? 당시의 현실을 정확히 본다고 하면, 두려워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뛰지도 않고 유유자적하며, 마치 조선시대 양반처럼 걸어 다녔을 것이라 상상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특히나 바리새인과 예수님과의 갈등이 많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과 당시의 종교권력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 수 있을까 틈틈이 기회를 엿봅니다.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고, 체포당 할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 때마다 도망하기 바쁩니다.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두려웠던 순간은 아마도 겟세마네 기도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납니다. 피눈물을 흘리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이야기 하십니다. 나와 함께 있어다오. 밤새기도를 하시면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시기도 합니다. 실은 예수님도 겁쟁이였던 겁니다. 원래부터 겁쟁이인 사람은 없습니다. 상황이 그 사람을 겁쟁이로 만듭니다. 점점 더 상황이 한 사람을 나약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그 고난의 십자가 길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있었지만,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자신을 배신하고, 호산나 호산나 외치던 사람들이 일주일만에 돌변하여 돌을 던집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예수님을 버리는 상황입니다. 완전한 외로움. 완전한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
저는 예수님이 이러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그 험난한 십자가를 당당히 지실 수 잇었는지 그 원동력을 오늘의 본문에서 찾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힘이 담겨져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날 제자들과 함께 방에 모여 최후의 만찬을 나누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에는 최후의 만찬 이야기 대신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식사를 하시다가 갑자가 제자들을 발을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중동의 사막 기후에서 발을 닦는 것은 굉장히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만 가장 천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절대 안된다고 만류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화를 내시면서, 그 일을 감당합니다. 8절에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그리고 그 뒤에 내가 너의 발을 닦아 준것처럼 너희도 서로의 발을 닦아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삶에서 섬김과 실천, 그리고 이웃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신 장면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그 손길에서 겁먹은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두렵고 떨리고, 또 남겨질 제자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그 심정 감출길 없어 서로의 체운을 맞대고, 서로의 발을 닦아 주셨던 것입니다. 누군가 내 발을 닦아주는 경험을 해보신 분은 알겠지만 발을 닦아주는 것 만큼 긴장을 풀어주고, 내가 지금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스킨쉽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일상적인 일, 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 즈음 모두가 느꼈을 두려움의 문제를 해소합니다. 공포를 굴복시키는 방법이 사랑임을,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이 공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혼자 맞는 비는 외롭고, 처량하지만 함께 맞는 비는 서로가 하나됨을 느끼게 되는 도구가 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면서 제자들에게도 용기를 주었지만 자신도 그 기운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실 수 있었습니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작년에 이집트와 리비아 등지에서 여러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소위 자스민혁명이라고도 불렸는데요.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그러한 현상들을 설명하면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일어나니까요. 그 가능성이 무엇일까 고민합니다.
저는 부활사건이 이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그 누구도 고개를 절레절레한들 때, 겁먹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다고 외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부활신앙의 모습입니다. 철학자 지젝은 희망이란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사는 우리들에게 매순간이 희망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여기지는 그 순간까직도 하나님에겐 가능성이 있으신 것 아닙니까?
부활은 그 희망을 놓지 않는 사건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겁먹지 않는 것이죠.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지난 사순절 기간 동안 저는 이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오늘은 임미화 집사님께서 해주신 맛있는 닭도리탕을 먹을 수 있겠네요. 제겐 참 설레는 날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오늘 부활절은 어떤 날입니까? 예수님께서 진짜 부활하셨다고 믿으십니까? 2000년 전의 부활 사건이 우리의 삶을 바꿔줄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믿음은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니 믿음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까 연민과 공포의 문제도 실상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겁쟁이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실은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믿음은 어떠했습니까? 또 예수님 본인의 믿음은 어떠했습니까?
철학자 지젝은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의 다음 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발 닦는 것으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셨을까요? 부활의 다음 날 일상에서 꾸준히 실천하라는 말씀이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지요. 마지막으로 흔들리는 우리의 신앙이지만 결국 꽃이 피우실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면서 시를 하나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림 속에서도 우리를 게획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충만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