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2일 부활절 제3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관택
본문: 창세기 1:1-5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4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5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분홍색 선글라스 쓰세요!
어떤 나라에 아주 괴짜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왕은 어렸을 때부터 분홍색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왕이 된 후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성을 분홍색으로 칠하는 일이었습니다. 신하들에게 시킵니다. 성은 온통 분홍색이 됩니다. 그리고 곧이어 그 나라 전체의 모든 건물들이 분홍색으로 칠해집니다. 사람들은 분홍색 옷만 입게 됩니다. 심지어 산에 있는 나무들에도 분홍색깔을 칠합니다. 강에도 수십톤의 분홍물감을 쏟아지게 되고 급기야 분홍강물을 만듭니다. 신하들은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래도 왕이 원하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른 건 다 분홍색으로 칠할 수 있었는데, 매일 보는 저 푸른 하늘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왕은 하늘을 볼 때 마다 짜증을 냅니다. 이에 전전긍긍하던 신하 중 한 명이 묘책을 냅니다. 그는 다음 날 왕에게 가서 “전하! 이걸 한번 써보시지요”하고 분홍색 선글라스를 왕에게 씌어주었습니다. 이제야 진정으로 모든 것을 분홍색으로 볼 수 있었던 왕은 참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때부터 그 나라의 백성들은 왕을 따라 저마다의 색안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야기 속의 사람들 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각자 색안경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은 방식대로만 본다고 하는데, 이것을 ‘관점’또는 ‘세계관’이라고 표현합니다. 각 자의 경험과 생각, 사상, 신앙에 따라서 우리가 쓰고 있는 색안경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저마다 느끼는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인간이 서로에 대해 이해하려 하고, 심리학을 공부하고, 집단 상담을 하는 것은 이 저마다 다르게 쓴 색안경 때문에 야기되는 여러 가지 갈등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인정하는 겁니다. 아 저 사람과 나는 다른 색깔의 안경을 쓰고 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이 차리에 대해 인정하고,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까지 일주일 동안 살면서 쓰고 있는 색안경을 이 자리에 나와서는 잠시 벗어놓고, 이 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안경, 평화의 안경, 생명의 안경을 새롭게 쓰는 시간입니다. 난 분홍색이 좋아! 난 이런 사람이야!라는 나의 자아를 잠시 내려 놓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실까 상상하면서 그의 시선을 쫒아 가보는 시간입니다. 그의 마음을 쫒아가보는 시간입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는 한 시간은 그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평상시에도 수시로, 우리의 색안경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게 될 때에, 우리 삶은 진정으로 행복해 집니다. 이 때의 행복은 나 혼자만 누리는 행복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리는 진정한 행복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새롭게 보고, 새로운 복을 누리는 귀한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옆 사람과 잠깐 포퍼먼스를 해보겠습니다. 옆 사람 눈에 씌여져 있는 색안경을 벗겨주시고, 새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색안경을 씌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진을 보다가
혹시 여기 계신 분 중에 사진 찍는 것 좋아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제가 알기론 그래도 우리 교회에서 사진에 가장 조예가 깊으신 분은 박순용 집사님이신 것 같습니다. 저와 목사님은 사진은 많이 찍긴 하지만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는 것은 아니니까요. 잠시 사진 몇 장을 보겠습니다.
오늘 이야기 초반에 색안경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지만 색안경을 쓰고 있다보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건지 잊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밖에서 하루 종일 선글라스 쓰고 있다가 집에 들어가서 오늘 조명이 왜 이리 시원찮지? 하던 경험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색안경과 다르게 사진은 진짜 애정을 가지고 그 대상을 관찰 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진 찍은 것은 진짜 신앙적인 행위일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한번 사진작가 되어서 사진찍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시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내가 세상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있는가? 기대하시구요.
제가 학교 다닐 때, 도시빈민선교회라는 동아리에서 달동네, 재개발구역에 가서 공부방 활동을 하였습니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고, 그냥 가난한 동네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또 이 지긋지긋한 ‘가난’이라는 것과 계속 관계를 맺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 최민식이라는 사진작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배우가 아니고 사진작가입니다. 그는 ‘사진은 삶의 진실을 찍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주로 가난한 이들의 삶만을 찍어 온 작가입니다. 참 그의 진정성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최민식 작가는 ‘종이 거울 속의 슬픈 얼굴’이라는 책에서 빛과 구도와 감정이 일치되는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사진가의 중심사상이며, 그것은 삶을 창조적으로 실현시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빛’과 ‘구도’ ‘감정’은 사진에는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에서도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오늘 성서 본문 말씀은 천지창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최민식 작가가 이야기한 사진을 찍을 때, 빛과 구도와 감정이 일치되는 사건과 거의 닮아 있습니다. 사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빛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로 사진을 포토그래피라고 하는데, 그것을 직역하면 빛의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사진은 빛의 예술입니다. 빛은 보이지 않지만 사진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빛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습니다. 빛은 무엇인가를 빛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빛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요. 하지만 자기 자신이 빛을 내고 있는 별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태양빛을 반사하면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의 근원은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빛의 근원 때문에 다른 모든 존재들이 빛나는 것입니다. 나도 결국 하나님 때문에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잘나서 나 스스로 빛나는 것 인양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빛의 근원인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하면서 살고 잇는 것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진은 찰나의 예술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마음으로 찍는 것입니다. 워낙 빛의 성질이 그렇습니다.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 찰나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찍는 것이 사진작가의 모습이겠지만, 그와 같이 빛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그 순간을 기대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진 작가가 몇 밴만원짜리 카메라, 그리고 그 카메라를 다룰 수 있는 기술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의 근본은 빛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인식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근본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두 번째 요소는 ‘구도’입니다. 사진에서 구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을 안 해도 알 수 잇을 것입니다. 흔히 프레임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4절 “하나님 보시기에”가 바로 구도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보는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지금 나와 같은 상황이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있지만, 무엇이 더 중요할까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말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나 보기에가 아니라. 내가 가장 존경하는 누구 보기에가 아니라 나의 상황과 환경, 우리 부모님이 보시기에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이다
세 번째 요소는 ‘감정’입니다. 사진 찍는데에 중요한 것은 ‘찍는 사람’으로서의 착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구의 사진작가들이 아프리카에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진을 보다보면 너무 이 비참한 현실이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사진을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외부에서 어떤 사람이 내 자식 굶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내가 내 자식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을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요소 ‘감정’의 문제입니다. 아까 소개한 최민식 작가가 찍은 사직 속의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작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저 외부자로서 자신의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 찍은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이 바로 사진의 진정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사진은 토마토학교 이준섭 선생님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 이 선생님이 토마토학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 아이들에 대한 감정이 어떠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십니다. 좋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감정입니다. 막상 천지를 창조했는데, 그것을 바라보니 좋았다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문인 유한준이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좋았다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이전과 다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는 방식은 그저 냉철한 이성으로만 바라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보라보십니다. 나를 대하실 때도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대하십니다. 그러니 창조라는 것은 실제로 어떤 물건을 만들고,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되었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일이고, 새세상이 열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창조의 사건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누가 가장 사진 잘 찍는 사람입니다. 그 사진기 안에 담겨진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가장 예수 잘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세상,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미지 시대, 이미지를 넘어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즘은 이미지가 넘치는 시대입니다. 어제 토마토학교 쉬는 날이어서 몇몇 교사들과 연극을 보러 갔는데, 제가 단체 사진 찍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친구가 이런 말 하는 거예요. 전도사님은 마치 연극을 보러 온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게 아니고, 사진을 찍기 위해 연극을 보러 온 사람 같아요. 뜨끔하였습니다. 요즘 SNS의 폐해가 이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제 모습보다, 사진 속의 나의 이미지에 더욱 집착하는 성향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진정으로 기쁨을 누리고, 또 서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가 있지요? 당시 사람들에겐 예수님은 어떤 이미지였을까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이미지 넘어에 계시는 진짜 예수님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미지에 속이 마시기 바랍니다. 또 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자신의 이미지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이미지 너머 진실을 보시고, 실제적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진정한 삶의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