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 마가복음 15:21-32
21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22 그들은 예수를 골고다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골고다는 번역하면 '해골 곳'이다.) 23 그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께 드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24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제비를 뽑아서,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를 결정하였다. 25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26 그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27 그들은 예수와 함께 강도 두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하나는 그의 오른쪽에, 하나는 그의 왼쪽에 달았다. 2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말하였다.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30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 31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그렇게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그를 욕하였다.
제목 ; 고난과 부활, 그리고 우리의 선택
설교일 ; 2012. 4. 1.
[좋은만남교회 종려주일 낮예배 설교]
들어가며 :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자랑스러운 좋은만남교회의 교우들과 그 가정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넘치도록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부인이 동네마켓에 갔습니다. 그런데 마켓에 있는 앵무새가 그 부인을 보고 말했습니다. “아줌마, 되게 못생겼다.” 부인은기분이 언짢았습니다만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마켓에 갔을 때도 앵무새로부터 “아줌마, 되게 못생겼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화가 났지만 참았습니다. 그 다음날 앵무새는 부인을 발견하자마자 “아줌마, 되게 못생겼다.”고 했습니다. 화를 참을 수 없었던 부인이 주인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주인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 다음날 부인은 마켓에 가면서 앵무새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습니다. 앵무새는 그 부인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네요. “아줌마, 말 안 해도 알지?”
들어가서 : 오늘이 무슨 날인지, 무슨 주일인지, 이번 주간이 무슨 주간인지 다 아시지요?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입니다. 물론 다음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제가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주일 설교를 한 10년 해오다보니까 더 이상 밑천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뭔 설교를 해야 할지 아주 난감해서 몇 주를 고심했습니다. 부활이니 고난이니 하는게 이미 다 교리로 정해져 있는데 거기서 뭐가 특별한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교회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오나봅니다. 그래서 저도 나름대로 고난이 뭐고 부활이 뭘까,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고민하고 물으면서 몇 주간을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십니까? 부활의 모양이 어떤지 부활이 무엇인지에 대해 기대하고 생각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여러분은 다 부활을 믿으시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앉아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부활을 간절히 바라면서 지금 이 자리에 앉아계십니까? 사실 부활이라는 한 사건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바는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동안 교회에서는 부활을 죽은 이후의 어떤 새로운 세계, 내세로 연결되는 경험으로 가르쳐왔고 교리화하였습니다. 물론 종교가 관심하는 것 중에 하나가 죽음, 내세의 문제이지요. 부활은 더 이상 예수님처럼 지금 이 세상에서 다시 살아나는 경험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개떡같이 살아도 다음 생에서는 뭔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 그 기대에 대한 반영으로 우리 안에 굳혀졌습니다. 즉 부활은 죽음 이후 내세의 문제가 돼버린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기독교의 교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현세가 아닌 내세에 붙잡아 두고 현실을 비참하게 사는 것에 대해 개혁할 것이 아니라 그저 황홀한 내세를 기약하면서 오늘은 인내하라고 가르쳤던 불행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칼 맑스는 ‘종교는 아편’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직접적으로 기독교에 대놓고 한 말이었습니다. 즉 그런 부활신앙은 교회 안에서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회라는 보다 큰 틀에서는 오히려 해악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국 우리가 고난주간이라고 해서 금식을 하고 헌금을 하고 헌혈을 하고 각종 고행을 스스로 당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좋고 아름다울 것이라고 확신하는 내세를 위한 것이 돼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지만 이왕이면 늦게 더 늦게 숨 꼴딱 넘어가기 직전에 회개하고 하나님 믿고 세례 받고 죽는 것만큼 큰 복은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과 죽음이 있어야 한다고 제가 수도 없이 말씀 드렸는데 어차피 고난 받고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고난주간을 최대한 적게 지내고 죽는 것이야말로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까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부활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내세의 것으로만 돌려버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이 땅은 무슨 의미입니까? 아무 의미 없지요. 그저 다음 세상으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물러 있는 곳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고난도 마지 못해 참고 견디는 것, 내세에 살게 될 아파트 평수를 위해서라도 이왕이면 더 심하게 당하는 것이 좋은 것이 돼버리고 말 것입니다. 즉 고난 그 자체로써는 그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지금도 세계 곳곳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자기 몸에 쇠징을 박은 채찍질을 하기도 하고 진짜로 십자가에 못박히기도 하고 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짓을 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나 부활은 그런게 아니지요.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지금 여기의 문제이기 때문에 고난 역시 지금 여기, 바로 지금 나 자신의 문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고난, 그리고 고난 후에 누리게 되는 부활은 반드시 지금 여기의 일이 되어야만 합니다. 고난은 현실입니다. 그리고 부활 역시 현실이 되어야만 합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지금 여기에서 고난을 당하고 고난에 동참하고 고난을 겪으며 고난을 주는 상대와 싸워 부활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우선은 여러분 자신이 바로 지금 고난 당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사이에 적잖은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다 거기서 거기이고 우리는 어떤 세력으로부터 지속적인 억압과 착취, 고난을 강요당하는 존재들입니다. 국가, 공권력, 대기업, 자본가, 민족분단세력, 악덕정치인과 고위공직자들로부터 온갖 고난을 당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제대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 고난 당하고 있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관심을 갖고 우리도 고난 당하는 존재이지만 그들에게 우리 손을 내밀고 우리의 작은 온정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지난 주간에 재능교육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1561일째 농성하고 있는 현장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지금은 1564일째가 되겠네요. 1564일이면 4년 하고도 104일입니다. 다른 직장을 구하지도 못하고 10년이 넘게 싸우는 분도 있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이지요. 그런데 재능교육만의 문제냐? 아니지요. 쌍용자동차의 해고노동자들, 삼성SDS의 백혈병 노동자들, 온갖 용역업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셀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임금에 고된 노동은 비슷한 상황일 것입니다. 먼나라 사람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민족의 분단과 대결을 조장하고 고착화시켜서 이익을 얻는 이들로 인해 아픔을 겪는 국가보안법 양심수들과 이산가족들, 무분별한 개발사업으로 자기들 잇속을 챙기는 무리들 때문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저소득층과 농민들, 4대강 주변의 주민들, 그리고 원치 않는 일에 쓸 돈을 꼬박꼬박 세금으로 내야하는 모든 국민들! 고난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고난을 넘어 부활을 이루고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고난 당하는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을 위해 우리가 부활을 만들어야 하지요. 온갖 고난을 강요하고 우리의 고난을 즐기며 우리의 고난을 통해 온갖 이익을 얻고도 여전히 우리를 고난의 한 복판에서 여전히 고난 당하도록 내팽개쳐두는 세력을 이제는 몰아내고 고난을 종식시키고 부활을 만들어야 합니다.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에서요. 2012년 4월 한국 땅에서, 한반도에서 부활을 현실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노력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나가며 : 이번 주간, 고난주간을 지내면 다음 주일 8일을 지내고 수요일에 국회의원 선거를 하는 날입니다. 지금 총체적으로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고난의 책임을 묻고 고난을 종식시킬 수 있는 행동을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당을 지지한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 땅에서 부당하게 자행되는 고난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하게 책임을 묻고 그 고난을 종식시킬 수 있는 선택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했던 애무새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제가 무슨 말 할지 아시지요?’ 고난은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고난과 이웃의 고난을 보고 그 고난의 부당한 근원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이 현실이 됩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요. 그리고 그 부활은 2012년 4월 11일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바르게 선택하시어 지금 여기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부활을 이루시는 여러분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