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 나라를 고백하라!
성서 : 누가복음 17:20-21
20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들어가며 : 우리 삶의 주인이자 동반자가 되시는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께서 오늘도 자비와 사랑을 의지하며 세우신 교회에 나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하며 기뻐하는 좋은만남의 교우들과 그 가정 위에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교통순경이 차를 세웠습니다. 경찰이 "전조등을 켜지 않았습니다. 위반입니다."라고 하자 남편은 "계속 켜고 왔는데, 방금 껐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아내가 "아니에요, 사흘 전부터 고장 나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경찰이 "그리고 140km로 달렸습니다. 과속하셨습니다."라고 하자 남편은 "안 그래요. 80km로 달렸는데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아니에요. 140km로 달린 거 맞아요."라고 냉큼 대답했습니다. 결국 남편은 화가 치밀어 "이 우라질 여편네가! 입 닥치지 못해?"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말을 들은 경찰이 말합니다. "남편의 말버릇이 거칠군요. 항상 저런가요?" 그러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평소에는 얌전한데, 술만 마시면 저렇다니까요!" 5월은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달이기도 합니다. 모두들 행복하고 평안한 가정 되시기를 빕니다.
들어가서 : 오늘은 우리가 매주일 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생각해보는 말씀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우리가 매주일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합니다. 보통의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데 그게 영 뭔가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하다 보니 그저 무슨 주문 외우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쉬워서 우리들 자신의 고백을 담아 그 내용으로 신앙고백을 하자는 취지로 좋은만남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문으로 매주일 고백합니다. 그러나 좋은만남 신앙고백이라는 것도 그 의미에 대한 동의와 이해가 없이 그저 주일날 읽고 외우는 것을 반복한다면 역시 마찬가지의 주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백은 우리 자신이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신앙고백이 무슨 효험한 능력이 담겨 있는 주문이 아니라면 그 주문을 달달달 외우는 것은 아무런 능력을 나태내지 못합니다. 어린 시절 밤에 무서운 느낌이 오싹 들면 그때 주기도문을 마치 퇴마 주문처럼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문 같은 주기도문은 딱 이정도의 능력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그에 대해 공감, 동의하며 자발적인 마음으로 암송하고 읽는 신앙고백이라면 분명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전반이 바뀌는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이제부터는 신앙고백을 그냥 읽지 마시고 천천히 또박또박 한자한자 그 의미를 생각하고 나의 동의와 고백의 마음을 담아 읽으시기를 부탁합니다.
오늘은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이웃과 소통하며 좋은 만남을 이루는 시간과 공간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임을 고백하며’라는 대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종종 받는 질문이라면 ‘교회에 왜 다니느냐?’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잘 받지 않지만 예전에는 교회 안에서 많이 들었던 질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발적으로나 교회에서 교육 받은대로 대답을 합니다. ‘천국 가려고요!’ 아마도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들이 자라나기 시작하던 때이다 보니 죽음 이후 다시 살 수 있는 삶에 대한 약속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교회에는 연세 많으신 분들이 더 많습니다. 젊은 세대의 충원이 안 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교회는 원래 연세 드신 분들이 많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실재적인 문제로 다가오게 되면서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노인들이 교회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가는 목적은 어찌 보면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것이 가장 솔직한 대답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천국,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사실 가고 싶은 곳은 아닙니다. 한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죽음 이후에 천국에 가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사실 죽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천국에 갈 마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천국이 그렇게 좋고 아름다운 낙원이라고 말은 하지만 노인에게 ‘어서 천국 가셔야지요’라고 말하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정을 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아름다움과 동경을 침을 튀겨가면서 설교하던 목사님들도 죽을 병에 걸리면 ‘드디어 내가 천국에 들어가는구나’ 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온갖 치료란 치료는 다 받아서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 보다 낫다는 말이 있지요. 천국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똥밭에 구르는 이승만 못하다는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 말입니다.
그러니 천국이라는 것은 단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였을 때의 보험과 같은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 웃기지요? 말로는 참 좋은 곳이고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서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실제로는 최대한 천천히 가고 싶은 곳이라는 이 우스운 현실이 바로 천국에 대한 불편한 진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왜 이런 괴리가, 왜 이런 어색한 간극이 발생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목적이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 죽은 이후의 세계로 미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천국으로 이해하여서 그저 죽은 이후에나 가는 어떤 좋은 곳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서 신앙의 비현재성이 발생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라는 통치의 주체가 강조되는 개념입니다. 영어로는 하나님의 왕국, kingdom of God, 즉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요?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통치하는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 세상일까요, 저세상일까요? 둘 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은 지금 여기, 이 세상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오로지 죽은 이후로만 한정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로 죽은 자들에게나 그 능력을 발휘하는 사자들의 신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분으로 무의식 중에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가면 좋기는 하지만 가급적 천천히 가고 싶은 곳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고 있구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산 자들은 자신을 따르라고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인데 그것을 엉뚱한 곳, 죽은 다음의 생으로 돌려버리니 그 나라는 결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 우리 안에 있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 가운데 있다는 ‘가운데’라는 말은 여러분 개개인의 안에 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임 안에’ 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영어로는 in이기도 하지만 among이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난 공동체 안에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이웃과 소통하며 좋은 만남을 이루는 시간과 공간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임을 고백하며’라는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 사람들이 교제하며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의 관계를 갖는 자리, 매우 현실적인 바로 지금 여기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인정하고 이해하며 동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즉 어떤 시간과 공간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웃과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곳이 바로 천국, 하나님 나라라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이 항상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피하고 싶은 경우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작게나마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 사랑의 손길을 내밀고 그 손을 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 천국을 이미 살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능력으로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희망을 마음에 품게 되는 기적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구약에서 천국, 하나님 나라, 낙원은 종종 가나안 땅으로 비유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광야에서의 40년 동안 이 율법을 잘 지키면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은 그저 가나안일 뿐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바로 광야 40년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그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여 율법을 따르는 삶을 익히느냐 그렇지 않느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말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익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하나님 나라, 천국이 달려 있다는 것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라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가며 : 사랑하는 좋은만남 교우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죽은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 안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거나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마음에 품고 아름다운 공동체, 친밀하고 진실한 인간관계를 갖도록 노력하십시오. 천국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을 써 차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마태복음 11장 11절은 말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고자 노력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천국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분들에게 지금 당장 천국을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