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2012624일 성령강림절후 제4주 및 순교자기념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순교는 삶의 사건이다

이관택

 

본문: 사도행전 7:54-60

54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55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57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고서,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58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Yes, I believe in God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시의 남서쪽에 리틀턴이라는 지역에는 콜롬바인이라는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지난 1999년 이 고등학교에서는 안타깝게도 학생 25명과 용의자 2명이 총기 난사 속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비극 가운데 살아남은 여학생이 증언한 놀라운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이 학교의 불량 서클 단원이었던 '트렌치 코트' 마피아단원 중 두 사람이 총기를 가지고 들어와서 학생들에게 난사하고 있었을 때, 그곳에는 17살 된 캐시 버넬이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총을 들고 있던 학생 하나가 그녀에게 총구를 목에 겨누고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니?" 만약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했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그녀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습니다. "그래, 나는 하나님을 믿어"(Yes, I believe in God). 그러자 그는 총구를 캐시의 가슴에 겨누고는 마구 총을 쏘았습니다.

 

캐시의 이야기가 알려지기 시작하자 미국 크리스천 십대들 사이에서 "Yes, I believe in God"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고, 플로리다 주의 한 도시에서는 25백 명의 십대들이 모여 감동적인 신앙고백의 집회를 가졌습니다. 이 집회의 이름 역시 "Yes, I believe in God"이었습니다. 이 집회는 마약 속에 찌들어 죽어가던 미국 크리스천 십대들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운동으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녀의 죽음으로 인해 지옥 같았던 학교가 변하고, 도시가 변하며, 희망의 싹이 틔어졌습니다.

 

오늘은 순교자기념주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모습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카타콤이라는 지하 동굴을 파고 그곳에서 살아갔던 신앙의 선배들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때 지하 무덤에서 죽어갔던 그들이 염원하던 천국이 지금 이 땅에 이미 이뤄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런 박해 없이 하나님을 자유롭게 믿고 찬양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는데, 이미 우린 매주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순교자기념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Yes, I believe in God 그래 난 하나님을 믿어이 말이 우리 삶 가운데 얼마나 놀라운 신앙고백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시길 소망합니다.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Yes, I believe in God

    

 

순교라는 단어 

 

그런데 여러분들은 순교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생각나십니까? 오늘 앞서 말씀드린 예화에서도 총구를 들이대는 극단적인 상황이 등장하고, 총이 난사되고, 피가 흥건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실화이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입니다만 순교라는 단어와 함께 오는 이미지들은 이토록 무섭고, 폭력적입니다.

 

저는 순교라는 단어를 들으면 삼일교회에서 수천명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던 J목사가 생각납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여자 청년들에게 성추행을 하는 등 범법을 저질러서 교회에서 쫓겨난 양반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 목사님의 말씀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J목사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순교였습니다. 자신의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순교를 했기 때문에 자신의 피에는 순교자의 피가 흐른다고 항상 자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라도 순교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엄청난 신앙이지요. 죽음까지 불사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 아닙니까? 혼탁한 시대 많은 젊은이들이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그 결단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도무지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혼탁한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는 그들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순교라는 단어는 우리 자신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디 이슬람 국가에 선교하러가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로 생각되지요. 도무지 우리의 일상에서는 순교할 기회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북한이랑 전쟁이라도 나야 순교할 기회가 생길까요?

 

실상 수많은 젊은이들이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갖고, 하나님 앞에 결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정작 자본주의와 성공주의의 노예가 되어서 신앙인답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J목사조차 타락하여, 온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것 아닙니까? 이는 바로 이상향으로서의 순교와 일상에서 순교가 일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삶과 신앙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상황만을 염두해 두고, 초현실적인 신비만을 추구하는 신앙적 자세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천국 가는 것만을 소원하는 삶의 자세가 이 땅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의 모습일까? 반문하게 됩니다.

    

 

순교는 의 사건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성서에 나오는 스데반은 삶의 모습과 신앙이 일치되어있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그의 죽음은 그 삶의 치열함을 완성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초대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라고 불리는 스데반의 순교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 사도행전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구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이 점차 유대인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이 신앙고백은 당시의 주류사회를 이루고 있던 유대인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그 스승이었던 예수때문에 유대교가 엄청나게 흠집이 났건만, 예수가 죽고 난 이 후에도 더욱 극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교를 믿는 이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이들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신성모독이며, 사회를 혼란시키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부활신앙은 점차 예루살렘을 벗어나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됩니다. 더욱 더 많은 이들이 복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전도를 하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참 열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7장 앞부분에는 그가 체포당한 후에 자신을 재판하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만났던 하나님. 그리고 모세가 광야를 통해 만났던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간절히 이야기합니다. 당시 재판하던 사람들은 더욱 열이 받았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어찌 그리 조근 조근하게 할 말을 다 하는지, 뭔가 듣기엔 거슬리는데,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구 말이죠. 결국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스데반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60절에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을 쓴 기자들은 사도들을 통해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어떻게 실천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어려운 시대에,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제자들이 있었다라는 증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진정한 순교는 바로 진정한 삶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같은데서 끝까지 나쁜 짓만 골라하다가 막판에 마음이 움직여서 주인공 대신 총에 맞고 죽는 악당이 있지요? 그런 방식의 죽음이 순교인가요? 우리는 순교를 죽음의 순간만으로만 판단합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예수나 스데반의 죽음이 의미있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죽었느냐가 중요하기도 합니다만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순교는 죽음의 사건이 아니라 삶의 사건입니다.

 

 

진리의 폭력성

 

그런데 순교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절대 놓혀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순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 신앙이 엄청난 폭력을 가져온 다는 것입니다. 순교를 당한다는 것은 이 신앙 때문에 죽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스데반이 순교 당하는 자리에 누가 있었습니까?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스데반을 죽입니까? 바로 신앙때문입니다. 누구는 진리 때문에 죽고, 누구는 진리 때문에 사람을 죽입니다. 초대 기독교가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당하고, 로마제국에 의해 박해를 당했지만 그 이후 정식 종교로 인정을 받고 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아십니까?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 사냥을 통해 기독교는 수많은 사람들을 순교시켰습니다. 순교를 당하는 당사자에서 이제 순교를 시켰던 인물로 탈바꿈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로마의 압제아래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순교를 불사합니다. 그리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어떠합니까? 자신들과 다른 신앙인들을 학살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폭력성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전부이다라는 오만함이 바로 이러한 비극을 낳게 됩니다. 바울이 엄청나게 나쁜 사람이라 지금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만을 고집하는 태도가 그로 하여금 살인을 저지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엔도 슈샤꾸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에는 순교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책은 1600년대 일본선교를 하고 있는 포르투칼 수도회의 로드리고 신부의 편지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일본 선교는 어렵다하지요. 당시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선교사들이 죽어나가고, 얼마 안 되는 신도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침묵이라는 소설의 제목에는 이렇게 하나님 때문에 비참하게 죽어가는 현실에서 왜 하나님은 침묵하는지에 대한 반문이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신앙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고민합니다. 여기서 성화를 밟고 살아나가서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차라리 순교하는 것이 좋을까. 결국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순교를 선택하지 않은 로드리고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로드리고가 자신의 이름 때문에 죽지 않아서 화가 나셨을까요?

 

결국 로드리고가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곳에서 죽지 않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 갈 것인지가? 바로 순교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순교의 순간에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도 어찌 보면 자신만이 생각하는 신앙적인 오만함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잇다는 말입니다.

 

결국 순교는 개인의 신앙적 고백을 지키는 것, 개인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이슬람의 자살폭탄 테러나, 십자군 전쟁이 순교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과 평화를 위한 삶이 순교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한명의 순교자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는 또 한명의 순교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의 죽음입니다. 야고보의 죽음은 스데반처럼 감동적이지가 않습니다. 바로 헤롯에게 칼로 죽었다라는 글귀로 대신할 뿐입니다. 그 놀라운 예수님의 제자의 죽음이 너무 간략하지요. 결국 순교라는 것은 그의 삶과 죽음도 중요하지만 증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죽음의 사건을 어떻게 더욱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지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럴 때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오후 활동으로 용산참사를 다룬 두개의 문이라는 영화를 보러갑니다. 2009년 용산에서 철거민 투쟁을 하는 세입자들을 경찰 특공대가 진압하는 가운데 6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입니다. 그 억울한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죽음 우리 시대의 불의와 탐욕과 국가권력의 부당성과 재개발의 폐해를 전면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잠깐 영화의 예고편을 보겠습니다.

 

오늘 순교자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어려움 가운데서 신앙의 절개를 놓치지 않은 신앙의 선배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죽음 사건들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건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과 죽음 가운데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09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6/24) 좋은만남 2012.06.25 234
308 [깨어나십시오] - 사랑의 세계 13 좋은만남 2012.06.25 230
» 순교는 삶의 사건이다 / 사도행전 7:54-60 - 이관택 전도사 좋은만남 2012.06.25 555
306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7/1) 좋은만남 2012.07.05 255
305 [깨어나십시오] - 사랑의 세계 14 좋은만남 2012.07.05 269
304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7/8) 좋은만남 2012.07.09 256
303 [깨어나십시오] - 사랑의 세계 15 좋은만남 2012.07.09 268
302 '가장 뜨거운 십일조' / 빌립보서 4:10-14 - 이관택 전도사 좋은만남 2012.07.17 554
301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7/15) 좋은만남 2012.07.17 238
300 [깨어나십시오] - 사랑의 세계 16 좋은만남 2012.07.17 242
299 '함께 맞는 비' / 다니엘 3:16-24 - 이관택 전도사 좋은만남 2012.07.30 503
298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7/22) 좋은만남 2012.07.31 250
297 [깨어나십시오] - 사랑의 세계 17 좋은만남 2012.08.01 230
296 [네가 걸으면 하나님도 걸어] -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좋은만남 2012.08.01 274
Board Pagination Prev 1 ...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 56 Next
/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