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9일 성령강림절후 제9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함께 맞는 비
이관택
본문: 다니엘 3:16-24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아뢰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이 일을 두고서는, 우리가 임금님께 대답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17 불 속에 던져져도, 임금님,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 주시고,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18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은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19 그러자 느부갓네살 왕은 잔뜩 화가 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고 얼굴빛이 달라져, 화덕을 보통 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20 그리고 그의 군대에서 힘센 군인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묶어서 불타는 화덕 속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하였다. 21 그러자 사람들은 그들을, 바지와 속옷 등 옷을 입고 관을 쓴 채로 묶어서, 불타는 화덕 속에 던졌다. 22 왕의 명령이 그만큼 급하였다. 화덕은 매우 뜨거웠으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들도 그 불꽃에 타서 죽었다. 23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사람은 묶인 채로, 맹렬히 타는 화덕 속으로 떨어졌다.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서 급히 일어나, 모사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화덕 불 속에 던진 사람은, 셋이 아니더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그러합니다, 임금님." 25 왕이 말을 이었다. "보아라,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다. 모두 결박이 풀린 채로 화덕 안에서 걷고 있고, 그들에게 아무런 상처도 없다! 더욱이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과 같다!"
패거리가 아닌 공동체로서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꿈을 꾸었습니다. 웨슬레가 어느 날 천국에 올라가니 천사가 천국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물었지요. "천국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감리교인은 몇 명이나 되나요?” 천사는 천국에 들어온 사람들의 명부를 한참동안 뒤져 보더니 "웨슬레 선생님, 미안하지만 감리교인은 한 명도 없네요” 웨슬레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럼 장로교인은 몇 명이나 천국에 왔습니까?” 천사는 다시 명부를 훑어보며 대답했습니다. "장로교인도 없습니다” 웨슬레는 매우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천사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천국에는 누가 온단 말입니까?”
천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합니다. "천국에 온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곳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가 따로 없지요”
성서에는 유난히 하나 됨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결국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결국 함께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함께 공동체를 이루다 보니까 자칫 공동체가 아니라 패거리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동체와 패거리는 종이 한 장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 아름다운 공동체가 자칫 잘못하면 아무 일도 안하는 한량 패거리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 사랑이 있는가? 아름다운 열매들이 있는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가고 있는가? 그것이 교회가 패거리가 아닌 공동체로서 자리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자기의 이득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함께하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자기의 이해관계에 맞고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패거리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함께’한다는 불편함
요사이 날씨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한 낮의 기온은 37도까지 올라가고 밤에도 이 더위의 기세가 꺾일 줄 모릅니다. 모기들의 앵앵거리는 소리는 더위만큼이나 우리의 잠을 빼앗아가는 요인입니다. 밤 사이 “죽여! 살려!”를 수십 번을 외치다가 미친 사람처럼 파리채를 들고 몇십 분 동안 모기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다시 설잠이 듭니다. 모기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이만 저만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혹시 “함께”라는 말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까? 보통은 좋은 느낌의 단어이지요. “함께한다는 것”은요. 하지만 모기와 함께하는 것처럼 어떤 ‘함께’는 참으로 불편하고,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쓰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보면 여름날 가장 슬픈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글을 통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선풍기 하나 없는 그 한 평반의 공간에서 여러 사람이 몸과 몸을 맞대고 누워있노라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각 자 마음속으로 이 옆 사람이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수백 번을 되내이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옆 사람은 땀범벅이 된 38도의 난로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덥겠습니까? 평시에는 이 사람이 나와 함께 있는지도 별로 느끼지 못하는데, 이런 불편한 관계가 되면 아주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밤을 새도록 내 옆에서 숨 쉬고 있는 그 사람의 존재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 아닙니까? ‘함께’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이렇게 불편한 관계가 되었을 때 더욱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름철이 되니 새삼 숲이 우거지고, 그 동안 함께하는 줄 미처 몰랐던 존재들이 많이 눈에 뜁니다. 교회 텃밭은 지금 거의 정글 수준입니다. 우리가 무덥다고 생각하는 이 여름은 어찌보면 생명들이 폭풍성장하는 기간이기도 하지요. 우리에겐 덥고 불편하고 짜증스러운 것이 어떤 생명들에게는 꼭 필요한 온도이고, 습도이니, 함께 살아가는 것이 여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이 더위의 의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더위가 내겐 그저 불편함이지만 어떤 생명들에겐 성장의 동력이자 삶의 축복이구나. 이렇게 본다면 이 무더운 여름 ‘함께 한다’는 말은 결국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봐야 겠구나 하는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미처 몰랐던 생명의 존재들을 깨닫고 불편함이 주는 삶의 풍성함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간 덥지만 우리 옆 사람의 존재를 느끼면서 인사해 보겠습니다. “함께하니 행복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우리는 불편할 때, ‘함께’한다는 것을 더욱 잘 깨닫게 되듯이 고난 중에 하나님을 절실히 만나게 됩니다. 신앙의 첫 번째 키워드가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난 지금 홀로 있어도 함께다! 누구랑? 바로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신앙의 첫걸음이자 마지막 걸음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진정으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때론 행복하게, 때론 용감하게, 때론 지혜롭게, 때론 당당하게, 때론 사람다운 선택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말이죠.
오늘 본문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그 사실을 끝까지 놓지 않은 세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입니다. 당시는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고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던 시절입니다. 바벨론은 유화정책을 썼기 때문에 유대의 똑똑한 지식인들에게 비록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높은 직책을 주고 일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다니엘과 세친구들입니다. 이들은 총명함과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웬만한 바벨론 사람들보다도 더 출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출세는 이들의 행복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여러 신을 섬기는 국가로서 대부분의 음식은 우상에게 제사지낸 후에 먹을 수 있었는데, 이들은 그 제사음식을 거부하였습니다. 간단한 채식으로만 연명하였는데, 이것은 큰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감히 포로주제에, 제국의 문화를 거부한다는 것이죠. 다니엘과 세 친구는 곤경에 빠집니다. 그 제국의 문화에 포섭되지 않는 불온한 이들에게 제국은 다양한 협박과 유혹을 합니다. 이들이 넘어갔을까요? 그렇기 안았습니다.
또 한 번은 왕 이외에 절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절하고, 기도하였는데, 이제 법으로 그것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됩니까? 바로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합니다. 그 선택의 결과는 풀무불구덩이에 들어가 죽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일을 선택합니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요? 어디서 그런 놀라운 신앙이 나왔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할 수 있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감히 포로 주제에 내 말을 거역하고 신에게 절을 한 것도 화나지만, 용서해준다고 은혜를 베풀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도 강고하게 버티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면서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리하여 평시보다 불의 온도를 7배나 더 뜨겁게 하였습니다. 이 풀무불이 어느 정도 뜨거웠는가 하면, 이들을 불에 던지려고 끌고 가던 병사들도 타 죽어버렸습니다.
이들이 불에 던져졌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괘심하다고 하면서 이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불 속에는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 있는 것 아닙니까? 더구나 이들은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성서에는 이 이야기를 아름다운 기적이야기로 소개하고 있지만 실제는 어땠을까요?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신앙을 위해서 그 죽음의 길을 선택한 이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잔인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오늘 18절 말씀에서 이들이 한 고백을 한 번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리하니하실지라도 상관없다. 제국의 논리에서 풍요롭게 잘살고, 호의호식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설사 내가 비참하게 죽을 지라도 상관없다.
이 용기있는 고백과 실천을 할 수 있었던 동력을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함께함이었고, 두 번째는 신념을 공유한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하였기 할 수 있었습니다. 도저히 해결의 기미가 없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내면서 고난을 감당하는 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지금 고난 가운데 계십니까? 혹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까? 좋은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까?
함께 맞는 비
각 자가 하나님을 가장 절실하게 만났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가장 절망적일 때에 하나님과 가장 강렬하게 만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온전히 내려 놓을 때, 두 손 두발을 들고 내 마음을 오픈 할 때, 하나님을 절실하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법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사람의 성장은 고난 가운데서 이뤄집니다. 진정한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쓴 글씨가 있습니다. 이는 지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함께 하자는 캠페인이기도 했습니다. 함께 맞는 비 ~ 함께 하는 것의 가장 먼저는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 함께 고난의 자리에 있는 것, 서로의 고난을 그냥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오시는 방법은 바로 이렇습니다. 비를 막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주시는 것부터 시작하시죠. 때론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 길이 가장 빠르다는 것을 예수님이 사람의 옷을 입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모습을 통해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은 것입니다.
커피 맛있게 먹는 법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떤 커피가 가장 맛있습니까? 원두가 좋아야 맛있나요? 로스팅을 잘해야 맛있어요? 좋은 찻잔에 먹어야 맛잇나요?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가장 맛있는 커피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먹는 커피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먹는 커피이지요. 그러니까 맛있는 커피를 아주 많이 먹는 방법은 돈을 많이 벌어서 맛있는 커피집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주 많이 만들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아주 많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동행함, 옆 사람과 동행함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깨달으시고, 우리의 삶에 더욱 더 많이 사랑하고, 더욱 더 맛있는 커피를 많이 먹을 수 이Tss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