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6일 강림절 제3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이관택
빌립보서 1:27-30
27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28 또한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이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29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30 여러분은 내가 하는 것과 똑같은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으며,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지금 소문으로 듣습니다.
한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옆집에서 제사떡이 왔습니다. 부부는 떡을 워낙 좋아하는지라 신이 나게 먹었습니다. 한 개, 두 개 먹다보니 금방 바닥이 보였습니다. 마지막 떡이 하나 남았을 때, 부부는 서로 눈치를 봅니다. 이 떡을 누가 먹을 것인가? 남편이 제안을 합니다. 우리 내기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마지막 떡을 먹는게 어떻겠소? 부인도 내심 먹고 싶었기에 좋다고 맞짱구를 칩니다. 두 사람은 먼저 말을 하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하고 침묵에 들어갑니다. 말을 끝까지 하지 않는 사람이 떡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엔 장난반 진심반으로 시작한 내기가 점점 더 치열해 집니다. 떡 하나를 가운데 놓고 두 부부가 한시간이 세시간 다섯시간이 지나도 움직일 줄을 모릅니다. 대화도 완전히 없는 침묵만이 계속됩니다. 밤이 깊어가고 아뿔사 도둑놈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두 부부는 꿈쩍도 안하고 아무말도 안합니다. 도둑놈은 처음에는 약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개의치 않고 집안의 물건을 다 뒤지고, 패물도 모조리 훔칩니다. 두 부부는 얼굴표정이 울그락불그락 해졌지만 침묵을 유지합니다. 그 광경을 재밌게 생각한 도둑놈이 심지어 부인을 들쳐업고 집밖으로 나갔습니다. 너무나 놀라고 겁이 난 부인이 남편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이 매정한 양반아!” 그러자 그제서야 남편이 “이 떡은 내 것이네” 하면서 마지막 떡을 낼름 집어 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우스갯소리이지만 이 안에는 자신의 욕심을 차리기 위해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어도 상관없다는 우리시대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 떡이 뭐라고 집안 살림과 심지어 부인까지 도둑놈에게 내어줍니까? 여기서 ‘침묵’은 게임의 법칙입니다. 아무리 불의한 일이 내 눈앞에 벌어져도 끝까지 침묵하는 자만이 떡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침묵하는 그 순간에 입을 열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입으로 평화를 노래하고, 생명의 찬양하고, 정의를 울부짖는 사람들입니다. 바라옵기는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이 기다림의 절기 강림절에 얼음장 같은 세상에 따뜻한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로 인하여 침묵의 세상이 막을 내리고 따뜻한 격려와 응원, 칭찬과 감사, 생명과 평화의 소리들이 넘쳐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수요일 가을학기 수요성서대학이 종강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시간에 빌립보서를 함께 나누었는데, 은혜가 되어서 오늘 본문도 빌립보서의 말씀을 가지고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의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일명 “기쁨의 편지”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다른 바울의 편지들과 다르게 기쁨이란 단어가 유난히 많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바울의 말투와 감정이 기쁨과 설레임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지금 기쁨의 마음을 가득 담아서 빌립보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은 정작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에 속합니다. 바울은 당시 에베소의 한 감옥에서 편지를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기네 나라 감옥도 아니고, 외국을 떠돌다가 잡혀간 뜨내기에게 감옥이란 장소가 얼마나 위협적이고 무서울지 상상만해도 아찔합니다. 바울은 몸에 지병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감옥에서 매질을 당하고, 굶고, 열악한 상황에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당시 마게도니아 지역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빌립보,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과 같이 으리으리한 도시에 사는 빌립보의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고백하기를 “내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시를 쓰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 찬양은 당시 사울을 피해 도망자의 몸으로 먹을 것도 없는 골짜기에 숨어 살면서 읊조린 것입니다. 바울이나 다윗이나 지금 누가 봐도 죽을 것 같은 상황이고 절망의 상황인데, 정작 본인들은 기쁘고,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합니다. 좀 이상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오늘 바울은 빌립보의 교인들을 향하여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막연하게 생각하면 복을 받으니까. 구원을 얻으니까. 자유함을 누릴 수 있으니까.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교통사고 날 확률이 적어집니까? 저는 전도사임에도 불구하고, 큰 사고는 아니지만 한해평균 두 번 이상의 교통사고를 경험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암에 안걸립니까? 기독교인들은 부유합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을 이야기 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특권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 특권도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특권은 어떻습니까? 내가 뭔가 특혜를 누리면 그 만큼 다른 사람이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누리는 것을 특권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의 특권은 다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을 누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에서 바울은 2가지를 들어 우리에게 신앙인의 특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말은 단순히 신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이 확장되는 경험입니다. 어렸을 적에 두발 자전거를 배울 때가 기억납니다. 중심을 못잡고 흔들리는 자전거를 아버지께서 잡아주셨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아버지 잘 잡고 계세요? 계속해서 확인합니다. 아버지는 걱정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소리가 점점 작아집니다. 이미 아버지는 내 자전거에서 손을 놓은지 오래되었지만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세계를 만납니다. 삶의 영역이 확장됩니다. 믿음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일곱 살짜리에게 뒷산은 매우 험난하고, 무서운 공간입니다. 성인이 된 저에게는 아주 푸근하고, 여유있는 공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열매는 28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듯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겁니다. 누가봐도 겁에 질려 벌벌떨고 있어야 할 바울, 또 다윗을 보십시오. 이들의 당당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특권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때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느부가넷발왕 앞에 불려가서 우상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을 봐에야 풀무불에 들어가겠다고 당차게 이야기했던 그 모습 말입니다.
신앙인의 두 번째 특권은 “예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 첫대목에 팔복 말씀이 나옵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첫 번째 복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이 가난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마음이 곤고한 사람들, 걱정거리와 근심이 가득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근심이 바로 첫 번째 복인 이유 바로 그 ‘가능성’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할 가능성, 자신의 모든 것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새로운 세상을 절실하게 소망할 가능성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누구의 것인가? 팔복에서 첫 번째 복을 언급할 때 나오지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8번째 복을 이야기 할 때 또 나옵니다. 마지막 8번째 복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팔복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 복은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당신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아야지요.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렇게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는 것이 어떻게 특권인가? 말도 안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에 고난받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까?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근심의 방향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근심을 내가 품는다면, 나의 고난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감옥에 있어서 기쁨의 편지를 보낼 수 있으며, 도망자의 신세인 주제에 내 잔이 넘친다고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신앙인은 같은 시간을 살아도 다른 차원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상황과 같은 절망에 처해도 다른 방식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의 적은 무리가 거대 로마제국을 쓰러뜨린 것 아닙니까?
오늘 바울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바로 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을 누리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 여러분들 누리면서 사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쁘고 행복하게 사시길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로 하여금 참 신기하다. 부럽다. 대단하다. 라는 도전을 주시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시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울러 3일 후에는 이 나라의 지도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만 누리시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특권도 잘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 투표의 권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소중한 권리입니다. 단순하게 나만의 권리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과거 독재정권과 중세봉건 사회를 지나오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무던히 노력했던 많은 사람들의 바램을 생각하시면서 의미있는 권리를 행사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지난 5년의 경험을 통해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져리게 느끼지 않았습니까? 절실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고, 꼭 투표에 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초반부에 떡하나 먹으려고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부부이야기를 했습니다. 실상 우리들은 눈 앞에 보이는 작은 이득을 추구하다가 더욱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는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의자 놀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 수보다 하나적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노래를 하다가 신호가 울리면 의자에 앉는 놀이입니다. 물론 의자수가 적기 때문에 한사람은 의자에 앉지 못하고 탈락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계속 탈락되어 가는 세상이죠. 이런 세상에 의자가 모자르다면 내 무릎에 탈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앉히면 어떨까요? 약간 무겁겠지만 약간 불편하겠지만, 생명을 살리는 길이겠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특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