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 로마서 7:15-24 - 이관택 전도사

by 좋은만남 posted Feb 1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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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10일 주현절후 마지막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나는 누구인가?

 

이관택

 

본문: 로마서 7:15-24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18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20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24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설날이 두 번이라 참 좋습니다. ‘설날이란 말이 얼마나 가슴 쿵쾅거리는 단어입니까? 지금까지의 해묵을 것들을 싹 잊고 새 출발 할 수 있는 날이 바로 설날입니다. 2013년을 시작하면서 송구영신 예배 때 우리는 각자의 결단들을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또한 서로에게 새해 큰 복을 받자며, 응원하였습니다. 한 달 정도가 지난 지금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결단한 것들을 잘 지키고 계십니까? 각 자의 삶 가운데 크신 복을 많이 받았습니까? 새해를 시작하며 간직했던 마음이 여전합니까? 사람의 몸과 마음이란 것이 참 간사해서,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기 마련입니다. 좀 독한 몇몇 사람들이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계획 한 것들을 잘 해내는 경향이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몸은 둘째 치고 마음이 여전할 수 있는 것만큼 복된 것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일신의 안정이나, 성취, 재물을 모으는 일과 같이 세속적인 일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의 결단을 지키는 것은 더욱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평화를 소원하는 마음’, ‘내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결 같을 수만 있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지금처럼 춥고 어둡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이리도 변덕스런 우리들이기 때문에 설날이 두 번이라 더욱 좋습니다. 지난 11일에 했던 결단들과 마음들은 연습이었다고 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살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야구경기로 치면 그 동안은 프리시즌(연습시즌)이었고, 이제 본격적인 정규시즌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리시즌은 성적으로 카운트 하지 않으니까,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정규시즌인 지금부터 잘하면 되겠습니다. 마침 돌아오는 수요일이 재회수요일입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하나님께 참회하는 날인데요. 바로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기가 바로 이 사순절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마지막 40일을 묵상하는 시기. 예수의 삶과 죽음을 더욱 생각하고, 우리의 삶과 죽음 또한 간절하게 고민해 보는 절기가 바로 사순절입니다. 바라옵기는 2013년 또 한 번의 새날을 맞이하여, 더욱 본격적으로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기억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뭔가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처럼 열심히 혼자 되내이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절망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바울 자신이 아는 자기, 또 자신이 믿는 자기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하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 매순간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조차 고민하고, 번뇌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살고 싶은데,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충분히 본받고 따르고 싶은데, 그렇지 않은 모습들이 자신에게서 보이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결단하고, 다짐하는데 그 계획들이 자꾸 무너지는 자신의 삶을 보니까, 한심스러운 것입니다. 절망스러운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들여다보니까.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얼마나 탐욕스럽고, 얼마나 분노가 많은지, 얼마나 정욕이 많은지. 평상시에 설교를 많이 하지만, 또 전도를 끊임없이 하지만, 지금 바울은 그런 자신의 말들과 자신의 삶이 합치되지 못한 부분들 때문에 몹시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 24절을 보니까 바울 사도가 !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라고까지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뭐 고민하는 스케일이 좀 달라서 그렇지만 우리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매번 결심하고, 다짐하는데, 무너지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를 자세히 보십시오. 지금 바울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서 완강히 투쟁하고 저항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하비콕스는 자아는 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전투장이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바울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악한 기운이나, 실수들을 합리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가장 강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당시의 로마시민이면 마땅히 할 수 있는 일들도 하나님의 법에 비춰 볼 때,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이면 마땅히 그냥 넘어갈 일도 그에겐 고민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고민이 바로 바울을 위대한 사도요, 전도자로 하나님께 쓰임 받게 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에는 솔직하지만 내가 누구인지에 해당하는 정체성 부분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갖고 싶은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무엇을 입고 싶은지 대해서는 엄청나게 예민하고,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처럼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마치 미친 사람처럼 성찰하고, 기도하고, 매달리는 경험들이 없다보니까,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세상이 가라는 길로 갑니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거리낌이 없습니다. 고뇌가 없어요. 자본주의 시대니까 당연히 자본주의에 맞는 인간형으로 살아야 합니까? 생존과 경쟁의 시대니까 우리도 스펙 쌓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나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과 자본주의형 인간으로 사는 것이 부딪히면 그 부침도 겪어보고, 갈등도 경험해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이 모두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갈등과 고뇌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투쟁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그것 자체가 몸부림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난 주 교우들과 함께 베를린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원래 이 영화의 원조격인 헐리웃 영화가 있는데 <본아이덴티티>하는 영화입니다. 첩보원이 주인공인데,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로,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만나는 적들과 싸우고, 결국 자신이 누군지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액션영화입니다. 수많은 언어에 능통하고, 수억원의 돈을 가지고 있으며, 온갖 무술로 단련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아무리 뛰어난 첩보원이라고 해도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어린애 같은 나약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는 사람에게 가장 우선되는 것은 자신을 먼저 아는 일이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입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조금 체계화된 말인데, 흔히 신앙보다 조금 더 원초적인 말 중 신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경이로운 어떤 것을 만나면 우리는 신비감을 갖게 됩니다. 이 신비감을 체계적으로 집중하고, 관심가지면서 그 신비의 영역이 조금은 체계화 된 것이 신앙입니다. 어쨌든 신비감을 갖는 것은 신을 믿고 안 믿고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갖고 있는 가장 고차원적이고 놀라운 행동 가운데 하나입니다. 엊그제 동네 아이들이 교회 현관 위에 붙어 있는 고드름을 따려고 몇 십분 째 사투를 벌이고 있더라구요. 그 모습을 보며 옛날 생각도 났지만, 우선 그 고드름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제가 나중에 따주려고 나갔다가 땅에 떨어뜨려서 산산이 부서지기는 했습니다만 그 평범한 자연의 산물이 신비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인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아마도 여기서 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동물은 자연이라는 환경에 순응하며 살지만, 인간은 그 자연을 신비롭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지요.

 

과학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신비감을 갖는 영역이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것들이 객관적으로 규명된 현대에서 우주라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비로운 영역을 뜻합니다. 우주의 신비는 저 멀리에 있는 영역을 뜻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저 멀리에 있는 우주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 깊이 자리하고 있는 더 큰 우주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이 안에 저 멀리에 있는 우주보다 더욱 크고 신비로운 우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미드 중에 스타트랙이라고 있습니다. 우주를 배경으로한 SF 드라마인데, 실상 이 드라마의 배경이 우주일지 모르지만, 이 드라마에서 다루고 있는 진짜 우주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우리 각 자가 우주를 품고 있다고 하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신비합니까? 이 토록 신비하니까 바울처럼 도무지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도, 매번 무너지고, 죄 짓고, 쓰려져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아닙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 아닙니까? 참 신비하고, 감사하지요. 우린 다만 이 신비함을 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뿐입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갈 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고 해도, 우리의 약함을 속 시원하게 다 이겨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마도 매번 우리의 탐욕과 습성에 지고, 지고, 또 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가야 할 일이죠. 그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고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설날에서 이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아무래도 옛말인지라 여러 가지 유래와 뜻이 있는데, 찾아보니까 두 가지 뜻을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것은 낯설다란 뜻입니다. 설날은 낯선 날이라는 것입니다. 낯설다는 느낌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에 학기 초의 그 낯선 교실과 낯선 친구들, 그 어색한 느낌이 너무 싫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낯선 것만이 신비합니다. 익숙한 것 속에서 낯선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신비함을 느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자기 자신을 다 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내 안의 그 넓디 넓은 우주에 숨어있는 낯선 나를 만나는 경험, 바로 새롭게 변화되는 경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은혜입니다. 설날을 맞이하여 한번 낯선 나를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의 두 번째 뜻은 세우나, 서다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새해 새롭게 뜻을 세우고, 마음을 세우다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설날에 여러분은 어떤 뜻을 세우실 것입니까?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그 정체성을 세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계속해서 흔들리고, 수시로 변화하는 우리의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012년 두 번째 설날, 이 복된 새날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생명평화의 기운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