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위한 교회
성서 : 마태복음 11,28-30
28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들어가며 : 지난 한해, 아니 지금까지 우리 인생을 통하여 함께 해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밝아온 2013년에도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실제적으로 봤을 때 어제 이맘 때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깊은 밤시간이지만 의미적으로는 어제와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날을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에 새해라는 의미를 담았기 때문입니다. 새해라는 특별한 의미를 담았기에 지금까지의 실수를 적당히 망각하고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새 공책을 쓰는 기분으로 맞을 수 있습니다. 컴퓨터로 따지면 리셋이 된 것이지요. 이것은 분명히 복입니다. 잘 해왔던 것은 더 잘하고 잘 못 해왔던 것은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매년 갖는다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새해를 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지난 주에 우리 단체 종무식을 하는 자리에서 선배 목사님이 옛날 이야기를 하십니다. 자신의 학창시절 이야기인데 교수님이 한 학생에게 질문을 합니다.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있는가?’ 그러자 한 학생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선생님, 질문이 잘 못되었습니다. 기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로 정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신학교에서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구원? 구원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생각해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참 좋으니’ 하는 찬송도 있는데, 사실 저는 교회가 정말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까 하는 의심을 항상 품어왔습니다. 구원이라는 어떤 상태, 어떤 목표점이 있다고 전제하고, 교회는 사람들을 그 목표점으로 이끄는 것으로 이미지화 되는데 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곳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이미지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과연 스스로의 정당성을 갖추지도 못할 정도로 망가지고 타락하고 더러워진 교회가 그 어느 누구를 구원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에 구원이 있을까, 정말 기독교에 구원이 있을까, 정말 교회에 희망이 있을까? 어떤 사람은 지금의 교회를 놓고 다단계 같은 그룹이 돼버렸다고 한탄합니다. 보상도 없이 일방적인 착취가 일어나는 구조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일말의 염치도 원칙도 없는 집단이 교회라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이런 비난은 교회 밖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조차 흘러나오는 비난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2013년을 맞이하는 이 신새벽에 교회에 희망이 있다, 교회에 구원이 있다, 교회가 희망이고 구원이 되어야 한다는 절절한 고백과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대선을 치루고 며칠 되지 않아 한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그리고 발견된 유서에는 너무나 힘들었는데, 대통령이 야권으로 바뀌면 노동자들의 상황이 달라질 것 같았는데 그 꿈이 좌절되어 더 이상 버티기가 너무너무 힘들어서 그냥 죽음을 택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너무나 힘들어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져서 그는 그 힘든 삶을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노동해방세상을 위해 싸워오던 노동자들이 벌써 다섯 명이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이운남 조직부장, 청년노동활동가 최경남, 전국대학노조 한국외대지부 이호일 지부장, 이기연 수석부지부장. 이들이 연달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대선 이후, 우리교회는, 전부는 아니겠지만 51%가 아닌 48%에 속하는 분들이 많을 꺼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 교우들만이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멘붕에 빠졌습니다. 황당스러운 상황에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표현하는 멘탈붕괴를 줄인 ‘멘붕’이라는 말은 농담, 우스갯소리, 황당한 상황을 과장해서 표현하는 말이었는데, 이번에 진짜 멘붕이 무엇인지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민주주의 의식이나 윤리의식, 도덕성마저 철저하게 짓밟혀버렸습니다. 다들 미래가 암담하고 절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꼭 그들만이 아닙니다. 지금 간절히 구원을, 생명을, 희망을 바라고 구하는 이들이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멀리서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교회에서도 힘들어 아파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들에게 희망을,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은 과연 어느 누구, 무엇일까요? 저는 반드시 교회가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과연 그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지, 오히려 사회변화와 변혁의 발목을 잡지나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많은 교회가 그렇게 정체돼 있고 변화를 거부한다지만, 우리 좋은만남교회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힘겨운 삶으로 낙담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야 하고 구원의 빛이 되어야 하고 또 희망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난 25일에 대한문 앞에서 열린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성탄절 연합예배에 예년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절망적인 미래 앞에서 기성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러나 여전히 희망과 구원을 찾아 나서는 교회, 기독인들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확인하고 그런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과 함께 하기를 바라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임은 거의 대부분 개인적인 참여였지 교회단위로 참여하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교회 단위로 교회의 교역자와 교우들이 함께 참여한 것은 서너 교회 정도였습니다. 그런 교회 중에 하나가 좋은만남교회였다는 것은 이 시대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도 이렇게 힘겨워 하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려고 한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길이고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세계구원의 길이며 우리가 바르게 신앙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우리를 바라본 신자들, 특히 기성교회에서 도무지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웃들에게는, 여전히 희망을 만드는 교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기독인 이웃들, 그리고 세상의 이웃들에게 희망을 주고 함께 하며,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교회에 낙심하고 등을 돌렸지만 여전히 바른 신앙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 이웃들의 좋은 동반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우리 모습도 부족하고 연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존재들이라도 함께 모일 때 서로에게 힘이 되고 받침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돼보면 어떨까,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하나님께 여쭤봅니다.
나가며 :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시며 쉼을 주겠다. 쉽고 가벼운 멍에를 지도록 가르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유독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 시대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이웃들과 우리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쉼터, 새 힘을 얻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받고 좋은만남교회를 위해 마음을 여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 주시는 평화가 함께 계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