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아버지 없이 아버지 앞에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성서 : 로마서 8:12-17
12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들어가며 : 사순절, 거룩한 기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고난의 의미를 물으며 그 고난과 부활의 은혜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크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또한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아버지 없이 아버지 앞에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어떻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들어가서 : 저는 어린 시절에도 키가 크고 덩치가 컸습니다만 성격은 매우 여렸습니다. 지금 혁이를 보면서 내 모습이 많이 투영됩니다. 키는 크지만 성격이 여려서 남에게 해꼬지를 하지 않았고 서러움과 서운함에 눈물도 잘 흘렸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와도 차마 그 애가 아플까봐 때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먼저 맞는 일이 많았겠지요. 덩치도 큰 녀석이 덩치 값도 못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아무튼!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삼천리골 계곡에 갔었습니다. 아버지는 한쪽에서 차를 닦으셨던 것 같고 저는 그 개울에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한 여름이이라서 이미 많은 아이들이 와서 놀고 있었는데 그중 어떤 녀석이 괜히 나한테 와서 시비를 하면서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그 녀석들 패거리도 많아 보였지만 나는 싸울 이유도 없고 해서 멈칫거렸고요. 덩치가 큰 녀석이 빌빌대면서 꼬리를 빼니까 그 녀석들은 더 기세가 등등해서 나를 몰아부쳤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제가 동네 아이들에게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오셔서 그 녀석들을 나무라고 쫓아버리셨다. 내가 아무리 키가 크고 덩치가 커도 역시 나를 지켜주는 것은 아버지였다. 대부분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어린 시절 내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참으로 든든한 존재였습니다.
중학교 시절에 우연하게 접한 팝송을 즐겨 들으면서 아버지는 나에게 미니 콤포넌트 같은 학생들을 위한 저가형 오디오를 사주셨습니다. 나는 그 오디오를 밤마다 끼고 팝송과 가요를 들으면서 밤을 지새웠고 노래가 나오면 디제이의 멘트가 끝나자마자 바로 녹음 버튼을 누르면서 나만의 음악 카세트 테잎을 만들어 듣고 그것을 친구들에게 선물하거나 돌려가면서 듣고는 했다. 비슷한 경험들이 있지 않았을까요? 디제이 멘트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노래를 녹음하려고 녹음버튼 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그걸 누르려는 타이밍을 찾느라고 눈이 벌개졌던 경험 말입니다.
그렇게 잘 듣던 오디오가 연세를 드셔서 고장이 나게 되자 아버지가 크게 선심을 쓰셨습니다. 아마도 아들을 위한 최고의 배려였을 텐데 중학생인가 고등학교 1학년인가 하는 저를 데리고, 아마도 그 당시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테크노마트로 기억을 하는데, 거기에 데리고 가셔서 마음에 카세트를 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준비한 금액보다도 훨씬 비싼 일제 카세트 플레이어, 시디플레이어도 내장된 카세트를 갖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조금 난감해 하시면서도 결국 그것을 사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샀는지 아니면 나중에 아버지가 돈을 준비하시고 다시 가셔서 사다주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덕분에 나는 아주 멋지고 비싼, 당시 50만원 가까이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 고급스러운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산 이후로 제가 세상 맛을 들이는 바람에 라디오를 별로 듣지 않고 밖으로만 싸돌아다니게 되고, 또 그러다 보니 그 비싼 카세트 플레이어를 제대로 써먹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데 오랜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서 여기저기 뻑뻑해진 것을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그보다는 그것을 사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지금도 내 마음을 촉촉하게 합니다. 아마도 어머니 몰래 조금씩 모아두신 비자금으로 사주신 것 같았습니다. 역시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사주시는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있어 저를 지켜주고 돌봐주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말 그대로 나의 완전한 보호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버지와 저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세상에 가장 완벽하게 저를 지켜주고 저의 필요를 채워주시던 아버지는 점점 늙어가셨고 저는 그 때의 아버지만큼이나 나이를 먹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는 저를 지켜주시지도 못하고 또 제가 필요한 것들을 다 사주거나 구해주시지도 못합니다. 그럼 저의 아버지는 더 이상 저의 아버지가 아닐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제가 이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아버지의 보살핌과 공급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맞을까요? 아마도 제가 45세나 되는 나이에도 여전히 그러고 있다면 여러분은 저에게 돌을 던지고 미친 사람이라고 하고 또 저런 게 무슨 목사냐고 하면서 저의 곁을 떠나가시겠지요.
맞습니다. 저와 저의 아버지 이야기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우리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긴 하지만 하나님 역시 이런 시대에 그 피조물인 인간들과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시대가 성숙해졌고 우리도 그 어떤 시대에 비할 수 없이 성숙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출발점은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과 그런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를 속죄제물로 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속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과연 여전히 이런 개념에 대해서 감격하고 흥분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 말은 대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대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최소한 한국사회, 보다 많이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은 인간 모두가 날 때부터 이미 태생적으로 갖게 된 원죄보다 한 사회 안에서 마주치게 되는 구조적 죄악, 사회악이 더 큰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소시민은 죄가 아니라 사회구조에 의해 겪게 되는 권력의 억압과 불평등, 철저히 경제에 예속된 삶의 방식이 더 큰 문제라고 여깁니다. 유대인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안식일을 범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런 먹고 사는 문제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속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오늘날 신앙인들의 가슴을 울려주는 주제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대속은 더 이상 불필요한 개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미 2천 년 전에 대속의 은혜가 주어졌으니 더 이상 대속이라는 교리에 매어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독교,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이 꼭 필요한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기독교나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사는 세상이 되었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국이라는 미지의 조건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큰 메리트를 갖지도 않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유대인이 되지 않으면 그 공동체에서 추방당하였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제 인생에 비추어보면 아버지 없이 살아야 하는 시대가 열렸고 더 크게 보면 하나님 없이 살아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이런 말을 하다니 큰 일이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은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마도 여러 가지로 항변하고 싶으신 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서 제외된다면 여러분의 삶이 그 순간부터 무의미하고 괴롭고 힘들고 어렵고 저주스러워질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의 중심으로 모셔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버지 없이,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사는 것이 지금 저의 모습입니다. 제 아버지는 그동안 저에게 해주셨던 보호자와 공급자로써의 아버지의 역할을 더 이상 해주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 없이 삽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버지가 저에게 보여주셨던 사랑과 자비, 은혜, 그리고 사주셨던 여러 가지 물품들과 그에 대한 기억,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베푸셨던 그 자비로운 마음씨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런 아버지의 모습과 교훈, 유지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항상 내 안에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걸 믿기에 이 세상은 너무나도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들 중심으로만 돌아가고 있습니다. 신문을 보면 정의가 짓밟히고 있는 현실은 항상 톱기사에 나오지만 자비와 사랑이 여전히 세상을 밝히고 있다는 기사는 구석 한 켠에서나 가끔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세상의 한 가운데가 아니라 구석쟁이, 이름도 성도 기억하지 못하는 소수의 이들을 통해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경된 의구심 마저 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이 자랐습니다. 더 이상 예전의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매 순간마다 밥을 지어 숟가락에 떠 먹여주시던 그런 시대는 아니며 하나님도 더 이상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동안은 아프면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병을 고쳐주셨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병원이라는 보다 보편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우리가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물론 병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입니다.
즉 이미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문제를 풀어가고 해결하고 뛰어 넘어야 하는 신앙적 연령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동안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 그리고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을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살아야 하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조를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유지를 받드는 삶을 우리 자신이 살아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더 이상은 하나님 없이,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 충분히 커서 어른이 된 우리들이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충분히 성숙하였고 또 성숙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숙해질 때 세계가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어른으로 당당하게 문제를 마주하고 또 이겨내고 극복해나가는 그런 모습으로 성장한 자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은 모두 아버지 어머니의 가장 큰 소망이자 기쁨일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육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이 되어 영을 따르는, 정신을 따르는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가며 : 언젠가, 아마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제 아버지는 제 곁을 떠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여전히 아버지는 제 마음속에 남아 계실 것이며 아버지 앞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기 위해서 애쓰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제는 옛날 신앙의 선배들이 말씀하시던 것처럼 그렇게 가까이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고아 같은 신세가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살 때 우리는 하나님 없이,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없다, 신이 죽었다고 비관적으로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늘이 무섭지 않은지 온갖 패악한 짓을 하면서 삽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정말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만 그들의 끝은 허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같이 살아나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또한 기쁨으로 가득찬 삶이 될 줄로 믿으며 그런 귀한 일이 충만하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11 그런 기도는 없다! 불편한 진실? / 누가복음 22,39-46 - 방현섭 목사 방현섭 2013.03.30 273
210 왜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까? / 누가복음 1,30-35 - 방현섭 목사 방현섭 2013.03.30 354
209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위한 교회 / 마태복음 11,28-30 - 방현섭 목사 방현섭 2013.03.30 323
208 행복의 조건은? 함께! / 누가복음 4,16-21 - 방현섭 목사 방현섭 2013.03.30 316
» 아버지 없이 아버지 앞에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 로마서 8:12-17 - 방현섭 목사 방현섭 2013.03.30 488
206 [네가 걸으면 하나님도 걸어] 눈을 뜨는 봄 좋은만남 2013.04.12 422
205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4/7) 방현섭 2013.04.18 202
204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4/14) 방현섭 2013.04.18 239
203 [네가 걸으면 하나님도 걸어] 바람 구경 방현섭 2013.04.18 190
202 이 세상은 /정규화 좋은만남 2013.04.30 230
201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6/16) 좋은만남 2013.06.19 111
200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6/23) 좋은만남 2013.06.25 111
199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7/7) 좋은만남 2013.07.11 109
198 사회적 성화를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7/14) 좋은만남 2013.07.17 112
Board Pagination Prev 1 ...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 56 Next
/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