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 요한복음 20,13-16
13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15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제목 ; 그분이 맞아?
들어가며 : 부활의 기쁜 소식을 여러분께 전합니다. 사랑하는 좋은만남의 교우 여러분들게 하나님의 사랑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자가 설교하기에 가장 어려운 설교는 절기설교입니다. 처음 몇 번은 잘 준비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밑천이 바닥납니다. 했던 설교를 또 하기도 그렇고 부활이나 성탄에 관한 성서구절이 제한적이다 보니 뭔가 새롭고 독특한 설교를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지요. 이관택 전도사님이 부활절 설교를 몇 번 하시더니 이런 애로를 느끼셨는지, 이번 부활주일 설교를 저에게 넘겨주시네요... 우선 매우 괘씸합니다만 한편 저도 부활의 의미를 오랜만에 되새겨 보는 기회가 돼서 아주 쬐끔 감사하기도 합니다. 오늘 나누는 말씀으로 함께 기쁨 누리기를 바랍니다.
들어가서 :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할 수 없고 의심할 수 없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면서 증거를 대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전통적으로 제시한 증거가 빈 무덤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텅 비어 있는,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이야말로 부활의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무덤이 비었다는 것과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는 것은 크게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무덤이 빈 이유는 부활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시신을 훔쳐간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이에 대한 기독교의 나름대로의 답변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각하,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가고서는, 백성에게는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라는 구절입니다. 이런 이야기 말고도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인 시몬이 달려 죽은 것이라거나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하였던 것인데 무덤의 서늘한 기운 때문에 정신을 차렸던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음해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고 그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적 대답 역시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죽은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은 여전히 논란꺼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논란의 한 중심에 설 것이 아니라 논란을 떠나 부활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부활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죽기 이전의 사람과 부활한 이후의 사람이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라면 그건 부활이 아니라... 뭘까요... 그런 일은 만화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것이고... 아무튼 부활은 같은 사람이 같은 모습 같은 기억을 가지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만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예수님의 부활은 몇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또 제자들, 심지어는 예수님의 애인 혹은 숨겨진 부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여인조차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는 최소한 반나절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동행자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의심의 사람 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나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여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옆구리와 손의 상처를 보이시자 그제서야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이게 정말 예수님의 부활일까요?
어쨌거나 제자들과 지인들조차 예수님을 전혀 몰라보았습니다. 즉 ‘이분이 그분 맞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그저 몸이 다시 사는 것 정도로만 보는 것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은 물리적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이고 의미를 통해 볼 때 비로소 제대로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실체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부활을 확신하느냐’는 질문을 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부활을 약속 받은 것이라고 하고 긴가민가 한다면 아직 믿음이 없다, 부활의 주인공이 되지 못할 꺼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이건 ‘아니오’건 그저 머릿속에서 추상적으로 개념적으로만 남는 부활 일뿐이지 그것이 우리 삶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부활은 우리 삶에서 구체적인 경험으로 만나게 된다고 믿습니다. 부활이 정말 기쁜 것이라면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정말 큰 기쁨이라는 구체적 상황에서 부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대북지원사업을 하고 있고 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통일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큰 사건이 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삶, 허리가 잘린 불구의 한반도, 그리고 분단으로 인해 이익을 얻는 집단이 끊임없이 전쟁공포에 내몰리는 삶! 그런데 통일은 이 민족과 한반도가 새롭게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이 될테니 저는 통일이야말로 말로만,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이해하던 부활이 구체적으로 삶에서 경험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평화3000’이라는 인도지원단체를 통해 대북지원사업을 하시는 박창일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바로 이거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회의 마치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하신 말씀인데 나중에 보니 [민족21]이라는 월간지와의 인터뷰에 나와 있더라구요. 아마도 자기 인터뷰가 책에 나왔다는 것을 자랑하시고 싶어하신 것 같기도 하고요. 그 말은 ‘통일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풍부해지는 것’이랍니다! 그렇습니다. 통일이라는 것은 하나라는 이름으로 획일화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생각들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통일이 구체적 부활사건이라는 제 논리로 따진다면 부활은 하나의 믿음, 하나의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고백들, 다양한 방식의 믿음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서로 공존하고 존중되며 또 용납되어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가 부활한 예수라고 주장하는 정말 제 정신 아닌 사람들이나 천국에 갈 사람들의 숫자가 정해져 있다는 둥 떠드는 사이비들까지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아실 줄 믿습니다.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알려진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그 순간 가장 거룩한 곳을 구별하기 위하여 쳐놓은 성소의 휘장막이 위에서 아래까지 완전히 찢어져서 거룩한 곳과 세속적인 곳의 구별을 없애버렸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거룩한 사람, 의로운 사람, 하나님의 백성과 속된 사람, 불의한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우선 혈통적으로 유대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예가 아닌 자유인, 남자, 어른(성인)이어야 합니다. 여자나 어린이들은 안 됩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큼의 자산이 있어야 하고 죄의 결과라고 믿었던 병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조건에 들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유대교의 전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전제들을 거부하고 그 자신의 죽음으로 이런 구별과 차별의 벽, 지성소의 휘장을 허물어뜨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은 이런 저런 조건을 통과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신앙의 틀을 깨부수고 조건에 관계없이 어느 누구나 다 하나님의 백성이자 자녀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유대인, 자유인, 남성, 성인, 부자, 비장애인들만의 세계가 아닌 비유대인, 노예, 여성, 어린이, 빈민, 장애인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고 또 세계를 구성하는 당당한 주체자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신앙은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늘 말씀을 해석해봅니다. 제자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하나의 선입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는 예수님, 내가 만난 예수님은 이런 분이야 하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분이 그분 맞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산지기의 모습처럼도 나타나고 성격과 직업을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십니다. 마치 예수님은 ‘나는 너희들의 생각에 갇혀 있는 어떤 존재가 아냐, 나는 너희들이 만들어 놓은 선입견 안에 있는 존재가 아니야, 나는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야, 나는 다양해, 그러나 나는 예수가 맞아!’하고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동산지기의 모습에서, 거리에서 마주치는 어떤 이웃의 모습에서, 지하철에서 내 발등을 밟은 밉상인 남자의 얼굴에서, 지금 송전탑에 올라가서 고공시위를 하는 노동자의 모습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열심히 침 튀겨가며 설교하는 방 목사의 모습에서, 삶의 힘겨움을 토로하며 힘없이 걷는 가장, 공부에 지쳐 얼굴이 누렇게 뜬 고등학생의 얼굴에서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욱 다양하고 풍성한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이 분이 그분 맞아?’가 아니라 ‘이분도 그분이시네!’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교회가 부활을 믿느냐, 예 아니오로 대답하라는 빈약한 흑백논리,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양자택일로 신앙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하나의 시대가 아니라 다양성의 시대입니다. 한 목소리를 내라고 해도 되지 않는 시대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을 강요받으면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교리문답처럼 준비된 대답을 똑같이 할 것을 요구한다면 이 시대 기독교는 거부될 것이며 부활은 기적은 저주로 비아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욕을 잘 압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합니다’가 아니라 ‘압니다’입니다. 사람들이 누구에 대해 욕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지요. 누군가에게 욕을 하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정말 욕을 먹어도 싼 패륜적인 행위를 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미친놈’이라고 욕할 때 정말 미친 사람에게는 그렇게 욕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욕하지요. 그런데 최근에 이런 욕을 하는 매우 신실한 신자를 보았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연세대학교 교목실의 한인철 교수님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그저 배우고 들은 대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왜 그런지 머리로 믿고 마음으로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성교회의 신앙고백에 문제제기를 하고 이런저런 도전을 합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강의영상을 제 유튜브에 올렸는데 어떤 사람이 댓글을 여러 개 달았습니다. ‘예수를 믿지도 않으면서 예수 팔아 장사하는 놈, 이 미친놈아,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하면 구원이 어디서 오냐? 구원은 자기 스스로 받는 거냐? 너 목사 맞아?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을 거부하는 놈이 왜 목사질을 하냐? 할 일 없어서 그 짓을 하냐?이런 놈이 연대교목을 하다니... 연대도 맛이 가버렸네. 이렇게 반그리스도적인 놈이 교목을 한다면, 아이들 신앙을 위해 차라리교목이 없는 편이 낫다. 미친놈, 예수가 그래 같은 길을가는 벗이나 친구에 불과하면, 왜 굳이 예수를 따라야하니? 너는 결과적으로예수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놈이야...’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키고 부활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순수하고 순진한 신앙을 가졌겠지만 자기와 다른 고백을 하는 이들에게는 기꺼이 이놈 저놈 미친놈이라고 욕을 할 수 있는 신앙인입니다. 이 사람의 글에서 부활의 풍성함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자기와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없애고자 하는 편협함과 빈곤함만이 느껴질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사람을 한 목소리로 사도신경 외우게 만들고자 함이 아니라 더욱 다양한 목소리로 풍성한 고백을 하게 하고자함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욕설이나 하면서 지켜야 하고 또 그렇게 해야 지켜지는 것이 기독교 교리라면 얼마나 빈곤한 교리이겠습니까?
나가며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의 부활이 앵무새가 같은 말을 반복하듯 그런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다양하고 풍성한 것이겠습니까? 오직 하나의 고백이 아니라 다양한 이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한 고백으로 오히려 교회는 풍성해지고 더 넓어지고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나와 다른 이들을 인정함으로 더욱 풍성해지고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쁨, 누구나 다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용납되고 초대되는 부활의 기쁨을 누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자신의 부활의 고백을 찾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다양한 예수님의 모습 앞에서 다양한 고백을 할 때 부활의 의미는 깊어지고 우리의 신앙은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믿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좋은만남 교우 여러분들께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