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감(感)
16.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18.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9.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20.또 기록하기를 "주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하였습니다.
21.그러므로 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번 주 내내 비가 왔습니다. 토요일 새벽에는 잠을 깰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도 이번 비는 비오는 내내 가을을 성큼 불러 올 것만 같은 비라서 반가움과 기대를 갖게 되는 순간 순간이었습니다. 저에게 이번 주 비는 반가움과 기대였지만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느끼는 비에 대한 순간 순간 느낌 달랐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대형 현안들이 그야말로 뻥뻥 터지고 있고,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는 미국의 시리아 공습문제로 모든 국제-언론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누구에게는 생사가 오가는 상황일진대, 비를 보고 이렇게 느끼는 저를 보면서, 나의 위치에 대해 고민스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책하는 요 2-3일을 보냈고, 심히 괴로웠습니다. 저를 더 괴로움과 자책으로 몰고 갔던 것은 마종기 시인의 익숙하지 않다 라는 시를 보면서 이 감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저를 한동안 책상 의자에 머물게 만들었습니다.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 나는 아직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익숙하지 않다.
강물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눈빛을 열고 매일 밝힌다지만
시들어가는 날은 고개 숙인 채
길 잃고 해매기만 하느니
가난한 마음이란 어떤 삶인지,
따뜻한 삶이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두 익숙지 않다.
죽어가는 친구의 울음도
전혀 익숙지 않다.
친구의 재 가루를 뿌리는
침몰하는 내 육신의 아픔도,
눈물도, 외진 곳의 이명도
익숙지 않다.
어느 빈 땅에 벗고 나서야
세상의 만사가 환히 보이고
웃고 포기하는 일이 편안해질까.
편안하게 지내는 내 모습을 보면서, 자책했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과감하게 실천하지 못하며 갈팡질팡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태초 나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나를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이번 주를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셨지요? 목회자 이기적인 욕심이지만,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과 여기에 모인 우리들은 자책으로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앞으로도 정말 잘 지내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먼저 17절에서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전은 바로 눈에 보이는 성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성전의 건축 재료는 솔로몬 시대에서 말하는 영광과 근엄의 상징이 아닌 바로 성령이 주 건축재료가 됩니다. 이 건축재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에 대해 거룩함을 증명해야 되며, 더 나아가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입증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거룩함 그리고 각 개인의 성령 충만함이 가능할 때에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서 말하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거룩함과 성령 충만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어서 바울은 18-1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8.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9.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바울과 아볼로 중 누가 언변이 뛰어나고 지혜가 뛰어난 지를 고린도 교회 구성원들끼리 다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교회를 세운 자이고 아볼로는 교회를 이끄는 자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 좋은만남교회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이 고린도교회 상황과 다른 것은 좋은만남교회는 공동목회라는 비전을 갖고 함께 힘쓰는 것입니다. 반면, 바울 당시에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오늘 본문과 같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인간적 기준에서 크고 짧음은 어떻게 보면 착각에 불과하다라고 말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바울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말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세상 욕구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하지요. 이는 쉽지 않는 길입니다. 이렇게 산다면, 모두 다 성인의 삶이나 금욕적 성직자의 삶을 강요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와 닮은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와 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이런 갈팡질팡이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신앙인으로서 꾸준하게 따라오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의무감입니다. 의무를 느끼는 못한다면 절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무를 의무로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는 장발장을 계속해서 그리고 집요하게 쫓습니다. 그렇지만, 번번히 자베르가 위험에 처하고 장발장은 자베르를 구해줍니다. 그리고 장발장이 마지막으로 자베르를 구해준 사건 이 후 자베르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토록 집요하게 추적한 저 죄수는 복수의 기회가 왔는데도 날 풀어줬고, 이번에는 내가 그를 용서해주었다. 이것은 왜일까? 서로의 의무일까? 아니, 의무 이상의 무엇이다.
구슬이 꾀여야 보배이듯이, 의무도 느껴야 우리도 의무를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의무를 소홀히 하고 무시하게 됩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여러 의무감을 만나게 됩니다. 이를 소홀히 하는 순간, 우리는 사회나 세상으로부터 판단되게 됩니다. 작게는 가정에서 좀 더 크게는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터에서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의무감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의무감이라기보다는 타인에게 맞춰서 움직이는 의무감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무감에 이행은 결코 자신에게 이로운 점으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이 같은 의무감은 고린도교회가 바울과 아볼론을 비교하는 방식에 머물게 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하지만 이 지점 자체가 무시할 수 없는 지점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0절에서 21절을 보겠습니다.
20.또 기록하기를 "주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하였습니다.
21.그러므로 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의무감 즉, 신앙인으로서 의무감을 채우는 순간, 예수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않고, 현재의 신앙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답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의 신앙생활과 일치합니다. 프란체스코가 걸어간 신앙은 독창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 전체를 걸고 예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강령으로 두고 절대적 기초로 돌이키고자 하는 몸부림을 쳤고 이를 통해서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절대적 기초는 누구에게는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정의 아니면 평화의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그중의 사랑은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지내고 있지요. 저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절대적 기초로 신앙인으로서의 의무감을 채우다보면 이것은 나도 모르게 나의 습관처럼 자리하게 됩니다. 습관처럼 의무감을 실천하는 것, 이것은 바로 나 자신이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뜻을 내 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를 리 호이나키가 쓴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의 습관이다. 이것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사람이 취하는 하나의 ‘습관적인 방식’이다. 더욱이, 그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사람을 구속하는 하나의 임무이다. 우리는 이를 부인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것은 실재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내 존재는 진정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내 존재가 진정한 것이 될 수 있게 신앙인으로서의 의무감을 채우며 이를 습관처럼 실천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의무를 느끼지 못한다면, 신앙인으로서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말하는 의무감은 각자가 느끼는 의무감과는 다를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가 설명하거나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의무를 느끼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의무감이 습관이 되고 실천되는 순간 우리는 거룩함과 성령 충만한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38절에서 39절의 고백이 저절로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38.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무감을 통해서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곧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의무감 우리들에게 찾아옵니다. 리처드 로어는 새사람을 이렇게 말합니다.
새 사람이 되려면 치러야 할 값이 제법 많습니다. 힘, 성공, 돈 그리고 통제에 바치던 충성을 거두어,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충성을 바쳐야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의무감을 채우고 계십니까? 그리고 바울이 본문에서 말했듯이 우리들에게 다시금 말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신앙인으로서의 의무감을 발견하시는 우리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