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진다" , 창세기 43:8-10, 남기평 전도사

by 좋은만남 posted May 1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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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진다

 

창세기 43:8-10

8.유다가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하였다. "제가 막내를 데리고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곧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야, 우리도, 아버지도, 우리의 어린 것들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9.제가 그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저에게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 제가 그 아이를 아버지께로 다시 데리고 와서 아버지 앞에 세우지 못한다면, 그 죄를 제가 평생 달게 받겠습니다.

10.우리가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지 않았으면, 벌써 두 번도 더 다녀왔을 것입니다."

 

5월은 가족의 달입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볍게 덮을 정도로 국민적 트라우마와 국민적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부 당국은 세월호 침몰사건 유가족들과 국민들을 한번 울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두 번, 세 번 심지어 계속해서 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파껍질처럼 계속해서 벗겨내도 끊임없이 나오는 해경의 초기대응의 문제 및 사건 은폐, 구조의 외주화와 그 일반들의 무능함과 쓸모 없는 관료체제가 그들을 울리고, 대통령의 연기 퍼포먼스에 울고, 여당의 후안무치에 울고, 야당의 무능함에 울고, 공영방송사 보도국장의 막말에 울고, 청와대를 가는 도중에 전경에 막혀 길바닥에 앉아 울게 됩니다. 오늘로서 사건이 일어난지 25일 되었는데, 온통 우는 일 투성입니다. 왜 우리 국민들은 이렇게 당해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한다는 말이 부족하고, 어떤 다른 단어를 찾아야 하는데,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또 몇 일 전, 페이스북이나 SNS 그리고 포탈을 통해서 알고 계시겠지만, K신학대학교 학생들이 세종대왕 동상에 올라가 기습 시위를 하다가 8명 전부 연행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일부분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립니다.

 

이제 청와대로 가자.

청와대로 가기 위해, 그 마당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상에 올랐다.

실종자 가족과 유가족이 가지 못해 설움이 맺힌 청와대 앞으로 가자.

오늘 이 광화문 사거리를 넘어, 저 청와대로 가자!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고, 정치인들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를 치르게 하자!

우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정부는 유가족들의 요구사항을 전면수용하고 특검을 실시하라!

불법정권 무능정권 박근혜는 퇴진하라!

 

연행된 대학생들은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형사들이 물었던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배후가 누구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배후가 누구일까요?

 

어느덧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들에게 이번 사건은 이 참사와 이 정권의 무능력을 잊지 말라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렸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질문과 과제를 남긴 행동이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5월 첫째 주는 어떠한 의미였습니까? 연휴였습니까? 아니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한 주였습니까? 샤르트르가 쓴 구토라는 소설의 주인공 로캉탱은 이런 말을 합니다.

 

삶에는 아무런 고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기의 삶을 매순간 스스로 선택하여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가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배고프면 밥을 먹지요.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또 심심하면 유희활동을 하거나 무언가에 몰두하겠지요. 그러다가 보면 우리는 일상에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방향이, 곧 나의 주체는 이런 걸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체는 계속해서 왜 내가 스스로 존재하는 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것을 대답하기 위해서 대답을 나름대로 선택하게 됩니다. 내일을 다시금 살아가시고 내일에도 수많은 선택들을 강요받거나 선택하실 때에 꼭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가며 살 수 있는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은 본문은 야곱의 가족들 이야기입니다.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특히 요셉의 꿈이야기로 그리고 인생역전의 요셉의 성공이야기로 많이 설교로 해석되어진 말씀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는 지나가는 이야기로 넘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은 요셉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유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첫째는 르우벤이죠. 그래서 창세기 37장부터 시작되는 야곱의 가족 이야기에 르우벤의 이름은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그 중에 유다는 넷째입니다. 유다는 요셉을 팔자고 의견을 낸 형제입니다. 곧 요셉을 판 장본인인 것이지요. 팔려간 요셉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고 인정받은 끝에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그리고 요셉의 능력을 정확히 증명하며, 아프리카 일부와 중동지역 일부에 연속적으로 기근이 발생합니다. 기근을 버티다 못해 야곱의 가족들도 이집트에 곡식을 저장했다라는 소식을 듣고 곡식을 사기 위해 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요셉을 만나게 되지요. 한눈에 요셉은 자기의 형제를 알아보고 이 형제들을 첩자라고 몰고 첩자의 누명을 벗으려면 집에서 막내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집에 둘째인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놓고 나머지 형제들은 집을 다시 나서게 됩니다. 집에 도착해 전후사정을 아버지 야곱에게 이야기한 후 설득하게 됩니다. 먼저 장자인 르우벤이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이는 창세기 4237-38절입니다.

 

37.르우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베냐민을 다시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저의 두 아들을 죽이셔도 좋습니다. 막내를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아버지께로 다시 데리고 오겠습니다."

38.야곱이 말하였다. "막내를 너희와 함께 그리로 보낼 수는 없다. 그 아이의 형은 죽고, 그 아이만 홀로 남았는데, 그 아이가 너희와 같이 갔다가, 또 무슨 변을 당하기라도 하면 어찌 하겠느냐? 너희는, 백발이 성성한 이 늙은 아버지가 슬퍼하며 죽어서 스올로 내려가는 꼴을 보겠다는 거냐?"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을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그리고 기근이 더 심해지고 곡식이 떨어질 때 쯤 아들들은 다시 한번 야곱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는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오늘 본문과 같이 말입니다.

 

8.유다가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하였다. "제가 막내를 데리고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곧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야, 우리도, 아버지도, 우리의 어린 것들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9.제가 그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저에게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 제가 그 아이를 아버지께로 다시 데리고 와서 아버지 앞에 세우지 못한다면, 그 죄를 제가 평생 달게 받겠습니다.

10.우리가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지 않았으면, 벌써 두 번도 더 다녀왔을 것입니다."

 

얼핏 보면 르우벤의 설득과 유다의 설득은 어감상 그리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설득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책임을 지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먼저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떠한 실수를 했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잘못한 당사자 자주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말로만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우선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 첫 번째 충족입니다. 곧 잘못한 사실이 인정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르우벤과 유다는 본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샘입니다. 요셉의 일이 다시금 일어나지 않는다며, 베냐민을 이집트로 데려가기 위해서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충족은 나의 잘못 때문에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받거나 화해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요셉과 형제들 그리고 아버지는 용서를 받고 화해하게 되지요.

세 번째 충족은 재발방지입니다. 흔히들 책임과 처벌을 같은 의미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처벌은 재발방지에 극히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났을 때 책임자 추궁과 처벌에 방점을 두고 모든 사건을 일단락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보여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재발방지를 위해서 관련 법규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다시금 이런 일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처벌은 다분히 전시효과를 줄 뿐 아무런 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책임졌다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세월호침몰 사건에 책임을 통감한다면, 이 사회가 책임질 수 있게 감시하고 압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세월호침몰 사건의 철저한 진상조사 그리고 특별법을 제정해서 앞으로는 이런 무능함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언론은 처벌에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 가지가 충족된 책임이라면, 이제는 르우벤과 유다의 설득 방식의 차이가 보일 것입니다. 르우벤은 처벌만을 강조하고 본인의 책임에 대해서 일절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아들을 처벌 대상으로 삼지요. 이렇게 말입니다.

 

"제가 베냐민을 다시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저의 두 아들을 죽이셔도 좋습니다. 막내를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아버지께로 다시 데리고 오겠습니다."

 

슬픔의 공감하지 못하며 사과조차 못하는 일국의 한 대통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일국의 대통령은 요새 꼬리 자르기, 그리고 책임회피에 여념이 없지요. 이것으로는 트라우마에 겪은 유가족들을 설득시킬 수 없을뿐더러 이해시킬 수도 없고, 요셉 트라우마의 사로잡혀 있던 야곱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반면, 유다의 설득은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말입니다.

 

제가 그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저에게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 제가 그 아이를 아버지께로 다시 데리고 와서 아버지 앞에 세우지 못한다면, 그 죄를 제가 평생 달게 받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지 않았으면, 벌써 두 번도 더 다녀왔을 것입니다.

 

유다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합니다. 책임에 대한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이 책임을 통해서 다시금 요셉과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게 안전에 대한 다짐도 하게 됩니다. 결국 아버지를 설득해내고 이집트로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요셉의 사건으로 유다는 책임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고, 르우벤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공감능력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법정 스님은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옛사람의 가르침에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는 교훈이 떠오른다. 내가 몸소 앓아 봄으로써 이웃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 동변상련. 우리가 어떤 병고를 겪을 때 그것을 단순하게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이웃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모른 체한다.

 

동변상련은 배우려는 노력 없이,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는 내 속에 있는 그와 비슷한 아픔을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그와 같은 감정으로 동변상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동변상련의 마음이라면, 우리는 다같이 책임을 져야합니다. 특히 재발방지가 이루질 수 있게 책임져야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루미는 봄바람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받는 이는 눈부신 태양처럼 빛나고,

사랑하는 이는 그를 먼지처럼 화한으로 감싼다.

사랑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시들지 않는 가지가지마다 춤을 추며 돈다.

 

루미의 시처럼 생명의 바람이 불며, 물 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 돋우는 달인 잎새달 4, 잎이 돋기도 전에 생을 마감한 어여뿐 이들이 생이 허무하게 마감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른이란 작자들은 어느 누구도 이 생명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고 있습니다. 실수나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깐 인간이겠지요. 그러기에 책임을 지는 인간 또한 인간이기에 당연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이 당연한 것이 어느 순간 어색하게 되었습니다. 유다과 같은 당연하고 평범한 행동이 특이한 행동이나 용기 있는 행동으로 변했습니다. 책임지지 않는 사회는 미래가 없습니다.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어떠한 책임을 지고 계십니까?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계십니까? 김수영 시인 배게에 머리를 대어 보라 들리지 않느냐 최초의 행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발자죽 소리다 고요한

발자죽 소리에 태양이 고인다 혹은

서리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는 곳은

모두가 처음 길이다

그러나 이 처음 길은 정부와 온

겨레가 막고 있을 때 어떻게 하는가

나의 가는 길은 원시림에도 아니요 군문에도

아니다

사람이 있는 곳이다 사람이 공명하는

곳이다 사랑이 이는 곳이다

솔직한 마음은 재판소의 지붕의 먼지처럼 이미 먼지가 끼였다

오늘도 내일도 거기에는 먼지가 끼여 있으라

나의 마음은 내부에서부터 나가는 길이다

용기 아닌 용기의 길 평범한 행동이여

 

평범한 행동조차 못하는 게 막는 사회 그리고 평범한 행동조차 배우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용기 아닌 용기를 내어서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지는 평범한 인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