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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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 있는 말

 

11.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12.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13.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14.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잠잠하다 했습니다. 연일 이광작 목사와 오정현 목사의 발언이 국민의 분노를 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광작 목사가 발언을 할 때, 같이 있던 사람이 서울시 교육감 후보 고승덕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발언과 함께 그는 전교조를 다 쓸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제의 집회에서는 20명 이상이 연행되었다고 합니다. 악어의 눈물을 흘린 이 나라 대통령부터 이 사회의 기득권들은 이뻐할래야 할 수 없는 사람들 투성이입니다. 6.4지방선거 잘해야겠습니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5월의 마지막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정말 4-5월은 어찌어찌하다보니 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여러 대형 이슈에 결혼식에 여러 행사를 지내니 다시 못 올 20144-5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5월이 지나면 초여름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달이 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날씨는 무척이나 더워졌습니다. 더워졌다는 이야기는 여기 있는 모두들이 더위를 감수해야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감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사전적 정의 이렇습니다. 달게 받아들이다 혹은 어려운 상황이나 고통 따위를 달게 받아들임으로 정의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달다 라는 말에 있는데, 감수에서의 감은 한자로 달()자를 쓰기에 그렇습니다. 그만큼 주어진 운명을 달게 즉 맛있게 받아드린다는 것이지요. 단 것은 계속해서 단 것을 부릅니다. 또한 단 것은 피로를 가시게 하고 엔돌핀 솟게 만듭니다. 우리 주변에는 더위를 감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 제가 설교했던 2300일을 넘게 투쟁해 온 재능노조원들이 그렇고, 지금도 청계광장에서 단식농성을 이어가는 신학생들이 그렇고, 여타 길거리에서 생존과 더불어, 생명, 평화 정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저는 몽상가나 생활인에 불가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반성으로 시작해서 반성으로 끝을 내고 있습니다.

 

하종강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지난해 파업 때처럼 열심히 살아본 적은 없습니다.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미리 짐작했지만, 어렵다고 피해 간다면 이다음에 아이 앞에 당당한 아버지로 설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느 조합원 말대로, 잃은 것은 돈이요. 얻은 것은 인생이지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올 해 여름이 무척이나 더울거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위는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이것 말고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무엇을 감수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달게 받아드리겠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이번 주 살아가실 때 한 가지라도 나 보다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자기의 생명, 평화, 정의 보다는 우리의 생명, 평화, 정의를 위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신명기 저자는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1.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바로 율법입니다. 이것은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율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율법은 우리들에게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 때에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유효한 하나님의 명령은 이 자리에 있습니다. 제 뒤에 있지요. 생명, 평화, 정의, 진리입니다. 이 생명, 평화, 정의, 진리가 이룩되라 라는 명령은 이 지상에서 가장 난해하고도, 너무나도 보편적인 명령입니다. 그래서 저들 나름대로 해석함은 물론 이를 오용해서 사용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이룩되었다 라는 과거형이 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명령이 또 다른 명령으로 변경되거나 사라져야 됨은 물론 이에 불이행으로 억울한 죽음이 더 이상은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와 같은 명령을 아주 특별한 사람이 짊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있는 우리들이 짊어 질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이를 12-1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2.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13.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엄기호의 단속사회라는 책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은 힘을 잃어버렸다. 고전적으로 해석하면 말은 현실을 뚫는 힘이 있다. ‘현상을 뚫고 그 뒤에 감춰진 본질을 간파하는 힘 말이다. 말은 현실을 간파할 때 그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이에게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말은 현실을 뚫는 힘이 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막강한 힘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힘은 한 명일 때보다 두 명일 때 더 힘을 발휘하고 사람이 많을수록 그 힘은 배가가 됩니다. 말을 통해서 사람을 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입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에 있다 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도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4.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 14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입 속 혀처럼 가까이, 가슴 속 심장처럼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니 바로 행하십시오!

 

여러분들은 말의 힘을 믿으십니까? 말은 사람이 있어야지만 가능합니다. 이곳에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말의 힘이 있습니다. 한 명이든, 3명이든 백명이든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이 생깁니다. 우리는 여기에 말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말의 힘을 믿기 때문에 여기 모인 것입니다. 저는 말이 발설되는 순간, 하늘로 흩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귀 속에는 누군가의 무의식 속에 박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막강한 힘을 발휘할 거라 믿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08-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9.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0.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말을 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좋은 말, 좋은 기도, 좋은 설교는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여러 갈래 중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의 힘은 말하는데서도 나타나지만, 들음에서도 나타납니다.

 

다시 한번 단속사회에서 엄기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글과 말을 팔아먹고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은 이야기. ‘은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듣는자리에 가깝다. 때로는 신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곁에서 듣는 이야기는 고통 혹은 슬픔에 찬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이 이야기들은 논리정연하기보다 오히려 비명과 한숨, 절규와 한탄이 뒤죽박죽 섞인 이야기들이다. 누군가의 곁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특히 신앙인이라면(좋은만남교회), 우리 주변에 을 지킨다는 것은 곁의 말에서 우리들의 말을 찾아야하는 것이고 우리의 말로 반드시 말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앎의 의무이기도 하고, 신앙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는 뼈 있는 말로 나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곁의 말을 무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말할 의무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다시 우리네 일상의 말만 되풀이하게 됩니다. 이는 뼈 없는 말입니다. 뼈 없는 말은 아프게 다가오지 못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뼈 있는 말은 의무와 책임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말의 뼈가 있다 라는 말을 하지요. 이 말은 내 귀에 들어왔을 때, 쉽게 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지요. 뼈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뼈는 잘 썩지 않습니다. 뼈 있는 말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순간 꼭 흔적으로 남습니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그의 설교 성경적인 기독교에서 한탄하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먼저 나는 묻고 싶습니다. 이런 기독교가 지금 어디에 존재합니까? 어디에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습니까? 주민들이 모두 이처럼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입니까? 주민들이 모두 한 마음 한뜻이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무엇인가에 부족을 느끼도록 방치되어 있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민들의 마음이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자비로운 마음과 친절한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몸에 지니고 있습니까?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말 혹은 행위로라도 정의, 자비, 진리를 거역하지 않고 모든 점에서 자기들이 사람들에게 바라는 대로 그렇게 모든 사람을 대해 주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과 합치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슨 타당성을 가지고 그 나라를 기독교 국가라고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상에는 이제까지 한 번도 기독교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웨슬리의 물음에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만큼 뼈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뼈 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걸어야 합니다. 즉 나 자신을 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5.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우리의 것을 걸 때, 비로소 말의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고, 뼈 있는 말 즉, 행동, 신앙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통해 희망을 모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뼈 있는 말을 하는 순간, 내가 희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루쉰은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된다.

 

말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사람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습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말도 있고 사람도 심지어 정신적 지주도 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 자신한테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이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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