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따라 사는 삶" , 고린도전서 12:4-7, 남기평 전도사

by 좋은만남 posted Jun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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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따라 사는 삶

 

 

고린도전서 124-7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번 주는 정말 할 말이 많은 주간이었습니다.

지구인의 최대 축제라고 하는 월드컵이 브라질에서 개막했습니다. 개막 후 지상파 방송은 월드컵 특집방송으로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송에 톱뉴스는 월드컵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브라질의 치안 상황을 걱정하며,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은 안전할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치안이 안 좋은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브라질 월드컵을 계기로 마약퇴치를 한다는 명목으로 2년 동안 빈민가의 2천명이 목숨을 잃고, 물가는 2배가 올랐으며, 축구공은 아직도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이 만든 축구공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방송하지 않습니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방송의 톱은 세월호로 채워졌었지요. 한 달 전에는 지상파 방송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관피아 척결과 안전불감증인 대한민국에 대해서 걱정하고, 하루 빨리 이 문제들을 시정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후속대책이나 유가족들의 처후문제 등에 대한 일련에 것들은 방송되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꼼꼼히 언론을 살펴보지 않는 이상 이에 대한 정보는 알기 어렵습니다. 요즘은 온 방송사가 세월호를 잊으려고 작정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새로운 총리후보자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번 강행한 내각의 물갈이도 지방선거의 반성과 눈물이 한낱 쇼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트주의로 쪄든 자기 사람 챙기기이고, 또 한번의 불통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을 봐도 그렇습니다. 축구 대표팀의 선수 선발에 있어서 홍명보 감독은 자기 사람 챙기기에 급급했고, k리그에서 펄펄 나는 선수는 외면한 채, 뛰지도 않는 해외파를 중용했습니다. 한국의 전형적인 병폐나 인습이 전반에 깔려 있어, 어찌 손을 써볼 수가 없다 라는 절망적인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밀양 송전탑 반대를 9년간 해오던 사람들이 무자비한 공권력 앞에 손 쓸 틈도 없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 땅에 정의가 있는지,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가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는 이번 주였습니다.

 

윤성근 성도님의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에서 헌책에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8월의 첫날입니다. 여름이라 그런지 무척 덥습니다. 바깥엔 남자 애들이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혼자 이렇게 서클룸에 엎드려 책을 보니 미안한 감이 듭니다. 세상이 무척이나 우울해 보입니다. 내일은 밝아질까요? / 1980년 어느날

 

저 또한 이번 주, 교회 사무실에 앉아 있기에 미안한 한 주였고, 앉아 있으면서 세상을 관망하니, 세상이 무척이나 우울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의지하는 신에게 물었습니다. 내일은 밝아질까요? 우리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정의가 도려내어진 이 세상, 어떤 마음을 품고 내일을 준비하며 오늘을 살아가십니까? 간절한 기도 아니면 간절한 염원 혹은 간절한 행동을 해보셨습니까? 만약 없다면, 이번 주부터라도 삶의 기도가 간절하게 이뤄지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또한 이 땅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기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며 행동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는 4-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 곧 교회의 머리가 되고 우리는 몸이 됩니다. 몸에는 여러 가지 기관들이 있습니다. 그 각 기관들을 지금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팔이 되고 어떤 이는 발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2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각 지체가 담당해야 할 역할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몸의 각각의 기관들이 제 역할을 하듯이, 우리가 감당해야할 역할 또한 다양합니다. 곧 은사가 다양할 수 있지요. NIV 성서에는 은사를 gift라고 말합니다. 재능이라고 해석해야할 것입니다. 재능, 섬김, 일의 성과는 성령, 주님 그리고 하나님이 개입해야지만 가능하다 라고 고린도전서의 바울은 말합니다. 다시 몸의 비유로 돌아오면, 우리의 몸은 뇌의 여러 부분에 협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 협력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몸은 실수를 하거나 보통의 사람보다 다르게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뇌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면, 식물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만큼 뇌의 협력은 중요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가 뇌의 협력이라면, 이를 통해서 우리의 지체가 유기적일 때, 우리는 은사, 섬김, 일의 성과의 형태로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기적으로 일어나지 않은 이상 몸에는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문제는 당연히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같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활용되는 순간 미로슬라브 볼프의 삼위일체와 교회에서 언급한대로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은사 속에서 활동한다면, 그는 암묵적으로나 명시적으로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고백되어야 하며, 이러한 은사적 행위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바로 구원자이자 주님으로 고백된다. 모든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구체적 현현이듯이, 모든 은사적 행위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구체적 형식이다.

 

재능과 섬김 그리고 일의 성과의 원인, 즉 근본적 이유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며 신앙고백의 구체적 형식이 아니고, 그 원인이나 이유가 나 자신이 되는 순간, 지금 기독교 정체성을 갖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졸렬하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다입니다. 이 대답은 지금의 한국사람들 특히 비기독교인들을 질리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명확한 은사를 발견해야 함은 물론 우리는 대답할 방법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성령이 운행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성령이 무엇입니까? 사전적 정의로는 하느님의 영을 뜻하며 신자들이 영적 생활을 하도록 근본적인 힘이 되는 본체라고 정의합니다. 성령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근본적인 힘이 됩니다. 이는 은사, 섬김 그리고 일의 성과를 나타낼 때 근본적인 힘이 됩니다. 이에 미로슬라브 볼프는 삼위일체와 교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사는 언제나 단순히 전제될 수 없는 성령의 구체적 행위에 의존한다.

 

성령이 구체적인 행위를 할 때 성령의 결과물이 은사, 섬김 그리고 일의 성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오늘 본문 7절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성령의 구체적인 행위가 은사, 섬김 그리고 일의 성과로 나타난다면, 이 모든 것이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이익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의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공동이익을 NIV 성서에서는 common good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편파적으로 해석한다면, 공공의 이익 또는 공적인 이익, 더 편파적으로 해석한다면, 서민의 이익, 평민의 이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서 사는 삶은 바로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142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함께 모이는 자리에는, 찬송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통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일을 남에게 덕이 되게 하십시오.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는 주변을 돌아봐야 됨은 물론 주변인들에게 공감하지 않고서는 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앨버트 놀런의 오늘의 예수에서 공감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의 체험을 가장 잘 묘사하는 단어는 공감일 것이다. 옥스퍼드영어 사전은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과 동일화하는 능력... 그리하여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들과 우리가 연대해 있음을 점점 깨달아 가도록 이끈다. 공감은 연민보다 넓다.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고통받지 않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공감할 수 있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행복한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행복한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랑하며,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투쟁하는 사람과 함께 투쟁한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진 존재인 그들과 감정을 나눈다.

 

성령이 나타나는것은 NIV에서 manifestation of the spirit으로 말합니다. 곧 성령의 현현 혹은 명시된다 라는 것입니다. 곧 성령이 가시적으로 곧 눈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의 이익은 도모할 수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정체성을 가진 우리의 은사, 섬김 그리고 일의 성과 또한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또한 manifestation은 정치적 용어로 쓴다면, 시위나 데모를 뜻합니다. 공공의 이익, 공적인 이익, 서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치적 성령은 우리에게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것을 드러내고 구체적으로 명시하라는 것입니다. 시몬느 베유는 중력과 은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웃을 도와야 한다. 나의 자아가 사라지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도가 이웃을 돕게 되기를!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평등의 사회적 개념은 정의를 의미한다. 정의롭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관계 없이 인간과 민족들 사이에 평화는 실현되지 않는다. 평등의 윤리적 개념은 연대성, 곧 형제-자배 간의 사랑인데, 이는 휴머니즘이 기독교적 방법으로 설명하는 필라델피아이다. 이는 순수한 이상주의인가? 아니다. 나는 그것이 인류의 생존을 위한 현실 그대로의 사실주의라고 믿는다.

 

몰트만은 살아 숨쉬는 생명의 영을 통해서 가능하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성령에 따라 사는 삶이 머리 속에 머무는 생각이 아니라, 충분히 행동으로 옮기리 수 있는 사실주의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성령의 행위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좁은 의미에 공동의 이익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은사, 섬김 그리고 일의 성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것은 공감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 공감을 통해서 근본적인 힘이 생깁니다. 이 때 우리는 무언가 이끌리듯이 내가 없어지고 그 안에 하나님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나를 위한 삶도 아니고, 내 가족을 위한 삶도 아니고, 내 교회을 위한 삶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없어지는 길이기에, 무척이나 힘든 길이고,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한 충동을 벼리고 틈틈이 톱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는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성령을 따라 주변에 공감하고 주변 모든 이들에게 나의 은사, 섬김, 일의 성과가 드러나는 기회를 차지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