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위로
8.나 같으면 하나님을 찾아서, 내 사정을 하나님께 털어놓겠다.
9.그분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하신다.
10.땅에 비를 내리시며, 밭에 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11.낮은 사람을 높이시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며,
12.간교한 사람의 계획을 꺾으시어 그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신다.
이번 주는 꾸물꾸물하고 후텁지근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주도는 장마라고 하지요. 생각해 보면, 벌써 장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더운 습기를 버텨야 되는 날이 온 것입니다.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날이 온 것입니다. 시간이 그렇게, 지금 이 시간에도 흘러가고 있습니다. 안현미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포츠 뉴스를 보다가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아파트 위층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를 듣다가
밤 열시 한전 검침원의 전화를 받다가
보온밥통의 마른 밥을 푸다가
서른이 온다
공자가 가라사대
삼십이립이라고?
내일의 뉴스는 오늘의 뉴스와 다르지 않고
미래는 죽음으로부터 생성되며
죽음조차도
주어진 테두리 안에서만 온다
설운,
드디어
서른
삼십이립은 “서른 살에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라는 뜻입니다. 서른살 언저리가 된 지금, 문뜩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여러 가지 질문과 함께 말이지요. 지금 내가 사는 이유, 그리고 살아야만 하는 이유, 아니면 무엇을 위해 충실하게 사는지를,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지를 혹은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시간의 흐름은 나의 완력이나 의지로 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되돌릴 수도 없지요. 이것이 바로 숙명이고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이 주어진 환경입니다.
이번 주를 살아내셔야 되는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시는지요? 또는 이 아까운 시간 속에서 이번 주에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요? 바라건대, 이번 주를 살아내시는 여러분들은 시간 속에 속박되시는 그런 사람보다, 시간의 흐름에서 해방되어 좋은 시간을 소유하시는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구절은 이 구절만 따로 떼어 놓고 봤을 때에는 정말이지 주옥같은 문장이고,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이번 본문은 전체적인 맥락으로 봤을 때, 이와는 다르게 해석되거나 받아드려져야 합니다. 우선 욥에 대해서 설명해야겠습니다. 다들 주지하듯이, 욥은 황당하게도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로 인해서 본인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욥은 참됨을 시험받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과 재산을 잃고, 자신의 몸도 욕창에 걸려서 잃기 직전에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욥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욥의 세 친구는 이 소식을 듣게 되고 위로하기 위해서 욥을 찾아오게 됩니다. 욥기 2장 11-13절에 나타납니다.
11.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이 이 모든 재앙을 만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달래고 위로하려고, 저마다 집을 떠나서 욥에게로 왔다.
12.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13.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13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레 동안 욥과 함께 있으면서, 욥의 상태를 보고 아무 말도 못하는 친구들을 보게 됩니다. 먼저, 세 친구가 도착하는 순간,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욥은 너무나 괴로워서 이렇게 외치기 때문입니다. 욥기 3장 1-3, 20절에 잘 나타납니다.
1.드디어 욥이 말문을 열고,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2.울부짖었다.
3.내가 태어나던 날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더라면, '남자 아이를 배었다'고 좋아하던 그 밤도 망해 버렸더라면,
20.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그리고 고민 끝에 엘리바스가 말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욥기 4-5장에 길게 나와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먼저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엘리바스가 세 친구 중에서 가장 연장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바스가 욥보다 나이가 많은지는 성서에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모릅니다. 욥기에서 이러한 정보는 없지만, 추측하건대, 엘리바스는 위로를 하다가 그의 위로가 훈계조로 변하는 것으로 봐서 아마, 욥보다 연장자가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위로에서 꼰대로 넘어가는 이 때, 바로 그 순간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8.나 같으면 하나님을 찾아서, 내 사정을 하나님께 털어놓겠다.
9.그분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하신다.
10.땅에 비를 내리시며, 밭에 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11.낮은 사람을 높이시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며,
12.간교한 사람의 계획을 꺾으시어 그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신다.
상상을 해봅시다. 내가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와 앉게 되고, 자식은 다 잃고, 몸쓸 병에 걸려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엘리바스의 위로가 마음에 와 닿으십니까?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이러한 위로가 가당키나 할까요?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이러한 위로가 가당키나 할까요? 죽을 병에 걸린 이에게 이러한 위로가 가당키나 할까요? 이에 욥은 이렇게 답합니다. 6장 1-3절입니다.
1.욥이 대답하였다.
2.아, 내가 겪은 고난을 모두 저울에 달아 볼 수 있고, 내가 당하는 고통을 모두 저울에 올릴 수 있다면,
3.틀림없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니, 내 말이 거칠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엘리바스를 포함한 세 친구들의 위로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무고한 자가 고난당하게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므로 욥은 자기 잘못 때문에 불행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변호사가 되어서 욥은 하나님이 정당하게 벌하신 죄인이라는 사실을 욥에게 믿게 만들려고 했고, 욥을 다시 그들 나름대로의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그들의 목적으로 욥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욥이 스스로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와 자기가 범죄했다고 자백한다면 하나님이 그를 다시 받아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잘 나타내주는 말씀이 욥기 4장 8-9절 말씀입니다.
8.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9.모두 하나님의 입김에 쓸려 가고, 그의 콧김에 날려 갈 것들이다.
이러한 논리는 어디서 많이 듣던 논리입니다. 기존의 교회들이 기복신앙으로 말하는 것이고, 우리민족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무속신앙도 이렇습니다. 또한 우리는 드라마에서나 소설에서나 여러 이야기에서 권선징악을 통해 배웁니다. 그런데 공평하시고 자애로운 하나님께서 과연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이런 방식으로 자녀들을 심판하시는 걸까? 를 고민해 보아야겠습니다. 욥은 세 친구에 대한 위로와 충고들을 하나 하나 반박하게 됩니다. 이 반박은 불경건해 보이고, 욥은 하나님을 부정하듯이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도전합니다. 욥기 31장 3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35.내가 한 이 변명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까? 맹세코 나는 사실대로만 말하였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시는 대답을 듣고 싶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36장에서 바로 하나님이 대답하시지 않고, 간격을 두고 38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욥에게 대답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응답은 곧바로 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제2 금융권의 대출처럼 곧장 원하는 자에게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기다려야 될 때도 있고, 답이 유보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 전제일 때에는 더욱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꼭 내려져야 합니다. 내리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고, 답을 내려지지 않을 때에는 자의적으로 내 주변에 있는 표징을 억지로 해석하거나 나의 의견이 하나님의 의견으로 둔갑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답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욥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감리신학대학교 구약학자 이환진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라고 끊임없이 질문한 바로 그 욥을 하나님은 옳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기존의 가치체계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틈을 메우고 끊임없이 반항하는 그의 태도를 하나님은 옳다고 여기신 것이다. 끊임없이 “왜?”라고 질문하는 욥에게 하나님은 “옳다!” 말씀하신다. 하나님에 대하여 또는 하나님에게 진실을 말했다고.
욥은 하나님에게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그리고 대답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하지요. 그런데 욥의 항변과 불만들이 다 해소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볼 때에는 그 답들이 영 석연치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욥에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은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라는 것이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위로 또한 욥을 위로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까지 위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땅의 위로가 있는 걸까요? 다시금 욥 태도에서 답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욥의 태도에서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를 찾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참된 위로는 무엇일까요? 적어도 참된 위로로 가는 길의 시작은 절망의 상황이나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이고,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현실에서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 과연 본인의 잘못 때문에 욥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 것입니다. 보통의 위로가 필요한 이들은 사회적으로 구조적으로 공동체적으로 가정적으로 소외되거나 사회적 죽임을 당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참된 위로는 ‘왜’라는 단어를 그들 안에서 살아나게 하고 그 질문에 답을 찾아 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욥은 마지막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답합니다. 욥기42장 5절입니다.
42.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위로는 귀로 듣습니다. 귀로 듣는 위로는 지금의 화나 분노에 대해 위로되거나 안정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화나 응어리는 풀리지 않습니다. 위로가 귀로만 듣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참된 위로는 이 보다 더 나아가 눈으로 위로해야 됩니다. 듣는 위로는 위로로 끝나지만, 참되는 위로는, 즉 눈으로 보는 위로는 치유가 됩니다. 정해신 박사는 세월호 트라우마, 외상 후가 아닌 아직도 외상중이라고 주장하면서, 세월호 관련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치유적 해법이 있을까요.
=세월호 참사에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과 구조를 샅샅이 밝혀내는 일에 나서는 것입니다. 해경, 청와대, 안전행정부, 국회의원, 협회,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 언론사와 언론인들, 일베 등 이 참사에 결정적인 책임이 있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준 사람들을 끝까지 찾아내서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요구해야 합니다. 나치를 척결하듯 집요하게 끝까지요. 꼭 광장에 나가지 않아도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진행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떼죽음으로 몬 이 끔찍하고 추악한 구조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집단살인에 가담한 사람들이 여전히 사회를 장악하는 세상에서 생존자와 유족들은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런 독소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치유의 본질입니다. 정신과 의사가 1 대 1 심리상담을 1천 시간 하는 것보다 1만 배는 더 치유적인 일입니다. 그거 외면하고 심리치유 센터를 짓고 심리치유 사업비 1천억원을 들인들 아무 의미가 없어요.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과격한 정치적 주장처럼 듣는 사람도 있겠어요.
=그렇지 않은 거 잘 아시잖아요. 유가족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 자식이 억울하게 죽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완전히 달라졌다면 ‘고맙다. 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네 동생이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산다’ 이런 맘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만 아이를 편안하게 놓아줄 수 있어요. 마음의 이치이고 치유의 근본 법칙입니다. 정치적 주장이 아니에요.
이렇게 본다면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참된 위로는 치유인 동시에 원점에서 시작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몰트만은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에서 참회의 세 가지 행위에서 세 번째 마지막 행위를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선한 일을 통한 사죄 배상은 오늘날 가능한 한 원상복구를 위한 중요한 시도이다. 이는 당시 우리 독일 민족의 희생자들이었던 민족들을 자유롭게 하는 행위의 ‘속죄의 징표’이다. 그리고 자유롭게 하는 행위는 당시 우리 민족의 희생자들이었던 민족들에게 ‘속죄의 징표’이기도 하다. 이는 가인의 표인데, 가인의 표는 경고의 표인 동시에, 보호의 표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타살이라고 정의한 사건에서 참된 위로는 우리가 가인의 표를 얻는 동시에, 이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수를 인정하고 또 한번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이것 또한 눈으로 위로하는 방법입니다. 이번 주 살아가시면서 참된 위로를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