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워서 들리는 말
고린도전서 14장 10-12절
10.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뜻이 없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11. 내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딴 세상 사람이 되고, 그도 나에게 딴 세상 사람이 될 것입니다.
12. 이와 같이 여러분도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니, 교회에 덕을 끼치도록, 그 은사를 더욱 넘치게 받기를 힘쓰십시오.
비가 올 것처럼 후텁지근 날씨가 계속되는 마른장마 기간입니다. 올해는 장마가 너무나 늦어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저수지가 이곳저곳 바닥을 드러내는 것만큼 시름이 깊어가는 2014년 한복판 여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쌀 수입이 전면 개방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우리 땅에서 짓는 우리 쌀을 보거나 맛보기 더 어려울 전망이고, 점점 더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 벼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걱정거리를 넘어서 생존문제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농부들은 걱정거리는 점점 더 쌓여 가고 걱정거리만큼의 빚이 양 어깨을 더욱더 짓누르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르신들이 이 나라 대통령 탓 혹은 욕을 안 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뭄이라도 해결되게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해도, 걱정입니다. 바로 국회 앞과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세월호법 개정과 진상조사위원회 요구안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단식농성 중이시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몇몇 몰지각한 사람들을 이들을 폄하하기에 바쁩니다. 이 폄하는 도를 넘어서, 이들의 태도에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공지영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 미카엘 수도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과연 예수가 다시 온다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내 생각에 예수가 다시 온다면 그들이 가장 먼저 나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릴 거야.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지하에 감금하겠지. 아니다. 현대에서는 그런 방법이 아니다. 그건 비난받을 확률이 너무도 높아. 제일 좋은 건 미디어를 이용해 그를 바보로 만드는 거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트집 잡아 기사를 내겠지. 그가 한 집에 초대되어 갔는데 걺은 여자 막달라 마리아를 동반해 물의를 빚었다. 심지어 그녀는 사치스럽게도 200만 원짜리 향유를 그의 발에 부었다. 평소 그들은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라고 해놓고 말이다.
향유의 상표가 추적되고 가격이 공개되고 향유 좌파라는 말, 아니 향유 예수라는 말이 나올지도 몰라. 일부 네티즌들은 그 향유만 팔아도 가난한 아이들 30명의 한 달 급식비가 될 거라고 질타했다고 보도하겠지. (중략) 혹은 일부에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는 부적절한 관계라고 하는 소문이 있으나 아직 알려진 바는 없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를 잘 안다는 지인의 말에 따르면 그 둘 사이에 아이가 있다고도 한다.
(중략) 처음에는 예수를 좋게 생각하던 사람도 이건 좀 심한데, 오늘은 좀 많이 나갔군 하다가 그 이미지가 쌓이게 되지. 그리하여 한마디로 매일매일 예수의 행적 중 트집 잡을 것만 콘텍스트에서 떼어내 그 이미지를 쌓아놓다 보면 결국 그는 또라이로 귀결되지.. 그렇게 말이, 그렇게 죽이는 것이 현대의 살인이지. 현대의 십자가는 미디어야, 십자가형은 미디어형이고.
평균 이하의 장관 후보자들, 다시금 현재 휴전되었지만, 언제 다시 공습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습 등 여러모로 우울하고 희망 없어 보이는 잔인한 7월 중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어떻게 이번 주를 보내셨는지요.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에서 자유로우셨는지요? 아니면, 괴로워하고 자신의 힘없음에 한탄했는지요? 우리네 일상은 우리 바로 앞에 삶의 과제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에 대해서 절망하고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이번 주간을 지내시면서, 최선을 다하지 못함에 절망하지 말고,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 나를 위로하시고, 또한 절망하고 안타까워하지 말고 아직 절망하거나 안타까워하기 이르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은 ‘주어서 들리는 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주어야만 들리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0.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뜻이 없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NIV 성경을 거칠게 해석하면 이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의심할여지 없이, 이 세계에 온갖 종류의 언어들이 있지만, 이 중 어떤 것도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방금 우리가 읽었던 것처럼 고린도전서의 바울은 수많은 종류의 말이 있다 라고 말합니다. 말의 범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말의 종류는 수백 수천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먼저, 언어의 큰 맥을 정하는 언어계가 있고, 각 나라를 대표하는 말이 있고, 각 지방을 대표하는 말 그리고 부족어가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10대들이 통칭해서 쓰는 용어, 각 전문 직종이나 공동체에서 쓰는 용어 등이 각각 다 다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은혜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일반에서 쓰는 뜻과 교회에서 쓰는 뜻이 다릅니다. 다음 한국에 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 사랑으로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 2) 인류에 대한 신의 사랑 인데, 후자가 교회에 쓰는 단어이지요.
언어로 말할 수도 있지만,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이런 말들이 아니라, 우리 주변말이나 주변언어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과 달리 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말하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도 우리의 말이 있고, 그들도 우리와 다른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은 상황과 역사를 듣지 못한다면, 또한 열심을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주목해 볼 것은 NIV 성경에서 10절 후반부를 강조하기 위해 부정문을 두 번이나 써가면서, 왜 뜻이 없는 말은 하나도 없다 라고 말을 했을까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일생생활을 중에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뜻 없이, 아니면 의미 없이 들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NIV 성경은 이 성경구절을 고민해 보라고 강조하는 것 일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성공한 기업가입니까? 저명한 학자입니까? 영성 깊은 성직자입니까? 아니면 미디어입니까? 확실한 건, 내가 귀 기울이고 있는 곳에 나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내가 귀 기울이지 않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오늘 본문 11절의 말씀처럼 되고 맙니다.
11.내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딴 세상 사람이 되고, 그도 나에게 딴 세상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종종 겪게 됩니다. 특히 우리에게 수학용어나 경제학 용어를 말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아니면, 각 회사의 용어를 듣게 되거나 나와는 전혀 다른 말을 듣는 경우가 생기면, 아무런 흥미 재미 등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이 저의 설교(특히 성경풀이나 삶의 이야기)나 더 나아가 사회 주변의 이야기(억울한 이야기)들이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일반 사람들에게 정말로 흥미 없는 이야기는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노숙인들의 이야기, 장애인들의 이야기, 노동자들의 이야기, 청년들의 이야기 그리고 북한이야기 등 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11절 말씀에서 ‘알다’라는 단어를 NIV에서 ‘grasp'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파악하다, 이해하다, 잡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 때에는 책을 읽어서 알 때도, 미디어를 통해서 알 때도 있지만, 우리가 손아귀로 무언가를 잡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뼈져리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경험하면서 아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오늘 본문 제목처럼 바로 주어서 들리는 말입니다. 곧 노숙인들의 이야기, 장애인들의 이야기, 노동자들의 이야기, 청년들의 이야기 그리고 북한이야기 등은 우리가 주어서만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땅바닥에 무언가를 줍기 위해서는 허리를 꼿꼿이 세워서는 주울 수 없습니다. 반드시 허리를 굽히고 주어야 하지요. 바닥에 있는 생명을 관찰하거나 생명을 돌볼 때에도 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필경 우리는 몸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이 들립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허리 숙이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나와 다른 공간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에 말을 듣기 위해서 그 사람의 눈높이에서 대화해야 한다는 법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말씀처럼 우리는 “나는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딴 세상 사람이 되고, 그도 나에게 딴 세상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 어느 한 시골 마을에 오셨던 예수라는 젊은 청년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주어서 들리는 말에 경청하고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키가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에게 허리를 숙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키 작은 사람은 물리적으로 키 큰 사람과 높이를 같이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에만 대화가 가능하고 관계 내에 서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곧 양심이 느끼게 됩니다. 버티는 힘이 생기는 거지요. 이를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여기 모인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얼마만큼 허리를 숙이고 말을 들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모쪼록 예수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2. 이와 같이 여러분도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니, 교회에 덕을 끼치도록, 그 은사를 더욱 넘치게 받기를 힘쓰십시오.
NIV에서 ‘교회에 덕을 끼치도록’을 ‘gifts that build up the church’으로 말합니다. 이를 해석하면 교회를 세우는 은사입니다. 곧 주어서 듣는 말을 듣고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바로 교회를 세우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세우는 자들은 이들의 말에 기울이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꿈꾸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바로 이것입니다. 은사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값없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세상이 주는 스펙이나 자신을 치장하는 어떠한 무엇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가 되고, 사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내가 얼마만큼 귀를 기울이거나 허리를 숙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주는 은사가 넘칠수록 세상과는 반대됩니다.
오늘 본문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게 말한다면, 여러분의 입을 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가 있고, 그 언어들은 저마다 누군가에게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면, 그 언어는 내게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열심히 참여하고 하면서, 어찌하여 교회 안의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이번 주를 살아가시면서,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에 이야기 주의를 기우려 교회를 교회되게, 가정을 가정되게 종국에는 생명, 평화, 정의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밑거름이 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