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다.
창세기 26장 19-33절
가뭄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이렇게 비가 왔지만, 가뭄을 해갈하기에는 부족하다라고 합니다. 그래도, 요 며칠 밤에 비가 내려서 잠은 시원하게 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주의 비가 반갑지만은 않았습니다. 바로 지난 목요일이 세월호 참사가 난지 100일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부 방송을 제외하고는 세월호 침사에 대한 보도보다 유병언 부자들에 죽음과 검거 소식에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추궁과 후속조치 없이 오직 유병언 부자로 모든 것을 마무리지려거나 무마하려는 꼼수로 밖에 비치지 않습니다.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먼저 간 이들에 억울함을 풀어줄 성역없는 진상조사입니다. 이들은 적어도 세월호에 갇혀서 죽은 이들이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을 뿐입니다. 세월호 추모시집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에서 고은 시인은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번주간을 지내면서 저는 제가 정말 감정적인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 주는 교회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 우울의 바다 속 심연 빠져서 헤어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정치권들의 행태들을 보면서 과연 그들에게 양심은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양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기본적으로 양심은 지킨다고 말하지요. 따라서 적어도 지금 우리에게 양심은 버티는 힘이고, 지지하는 힘입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이런 상황에 버틸 수 없고, 이들을 지지할 수 없지요. 장마 기간인 이번 주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어떻게 양심을 지키셨습니까? 또한 이번주간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 버티고 지지하셨는지요? 새로운 한 주간을 맞이하는 이번 주는 올바른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이 때문에 버티시고, 이를 지지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오늘은 이삭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상당히 긴 성서구절을 다함께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삭이 우물 판 이야기지요.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토착민들과 이주민들의 갈등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갈등은 26장 전체에 걸쳐서 나오고 있습니다.
자, 먼저 오늘 본문 이전에 말씀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이삭이 살던 곳에 흉년이 들어서 블레셋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블레셋에는 아비멜렉이 왕으로 있던 곳인데, 이 땅인 그랄 평원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이삭의 아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성서에 나오기로 리브가는 상당한 미인이기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지요. 이 때 이삭은 아버지와 똑같은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자기의 아내를 누이라고 그랄 지방 사람들에게 소개합니다. 그러면 그랄 지방 사람들이 아내를 취하기 위해서 자기를 죽이지 못 할 거라는 잔꾀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비멜렉이 창문 넘어 이삭과 리브가가 껴안는 장면을 보고 놀라, 이삭에게 진위여부를 묻고 아비멜렉은 이삭과 리브가가 그랄 평원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줍니다. 시간이 흘러 이삭은 부자가 되고, 힘이 강성해 지자, 아비멜렉이 16절과 같이 말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말하였다. "우리에게서 떠나가시오. 이제 당신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오."
그래서 이삭일행은 그랄 평원 외곽으로 쫓겨납니다. 다시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서 우물을 팝니다. 샘이 터졌지만, 그랄지방 사람들이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첫 번째 우물을 에섹, 곧 다툼의 우물이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도 빼앗기지요. 두 번째 우물을 싯나, 불화의 우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브엘세바로 거처로 옮기면서 우물을 팝니다. 그 우물에는 샘이 터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브엘세바로 내몰렸다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브엘세바 뒤에는 바로 네게브 사막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밀리면, 이집트로 가던가 사막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살길이 막막해지지요. 어떻게든지 브엘세바에서 정착할 수 있게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물에서는 샘이 나오지 않습니다. 샘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곳은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어딘가로 이동하거나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할 시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우물을 판 그곳에는 다툼이 없었기에 르호봇이라고 불렀습니다. 르호봇은 활짝 트인 곳, 넓은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이삭을 찾아옵니다. 26-27절입니다.
아비멜렉이 친구 아훗삿과 군사령관 비골을 데리고, 그랄에서 이삭에게로 왔다. 이삭이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이 나를 미워하여 이렇게 쫓아내고서, 무슨 일로 나에게 왔습니까?"
이삭은 위협적으로 느꼈습니다. 바로 왕과 정치대표, 군사령관을 다 데리고 왔기 때문인데, 이 셋의 조합만 보더라도 범상치 않고, 긴장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조합입니다. 이삭의 말투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왜 이렇게까지 압박을 주느냐로 들립니다. 나는 더 이상 갈 때가 없다 라는 것이지요. 어찌된 일인지 뜻밖에 제안을 합니다. 그 제안은 바로 평화조약을 맺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물에 샘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이삭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해석해 보자면, 그랄평원에서의 생활은 첫 단추부터 삐꺽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말로 시작했고, 오해가 풀렸지만, 그 오해가 그 지방 사람들 전부에게 풀린 것은 아니리라 추측됩니다. 그래서 그곳에 정착하고 있었지만, 이삭을 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지방 토호세력도 아니고 이방인이 부자되었다는 것은 그 지역 왕인 아비멜렉으로부터 엄청난 해택을 받지 못하면,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장 큰 해택은 아브라함 시대에 사용했던 우물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떠난 뒤에 그 우물은 그곳 지방사람들이 사용했겠지요. 그런데 그들은 억울하게 이삭이 온 뒤 우물 사용권을 빼앗긴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이 부를 늘릴 수 있었던 엄청난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방사람들은 이삭을 더욱더 시기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면서 이들을 비판하는 시선들이 이와 같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이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삭처럼 부자 되는 사람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다툼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삭이 하는 것마다 이들이 방해를 놓기 시작하고 우물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싸움과 다툼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삭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방식으로는 이웃과 더불어 살 수 없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우물에서 볼 수 있듯이 우물을 이름 활짝 트인 곳, 넓은 곳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마당 개념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각 집의 마당은 누구에게 열린 공간이고 축제의 장소입니다. 집안의 경사가 있으면, 너나 할 것 없이 마당으로 초대해서 다같이 음식을 나누고 호흡합니다. 이삭은 주변인들과 호흡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인생의 교훈은 후회와 실패에서 온다고 합니다. 곧 지나가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삭도 오늘의 본문처럼 일을 겪고 나서야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이 삶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나가야 알 수 있고, 인생살이를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가 보입니다. 그렇다고 이 지나감이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각 자, 지나감의 의미와 체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활짝 트인 곳, 즉 마당에 나와서 서로의 지나감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대화로 가능합니다. 대화하지 않으면, 아무도 이 지나감에 대해서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김범수의 “지나간다”를 들어보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아비멜렉과 이삭이 평화조약을 맺는 것에 있습니다. NIV에서는 이를 agreement라고 하는데, 바로 협정과 조약에 차이를 알아야만 합니다. 협정은 서로가 논의해서 성명서나 발문으로 남기는 것이고, 조약은 문서에 의한 명시적 합의입니다. 바로 조약이 강제성을 띠는 것입니다. 따라서 협정은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조약은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후조치가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아비멜렉과 이삭은 평화조약을 맺고 있습니다. 아비멜렉과 이삭은 자신의 실패를 보면서, 이 실패를 다시금 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 자의 지나감에 대해서 활짝 트인 곳, 마당에서 평화를 맹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약은 어떤 이에게는 화해의 움직임이고 어떤 이에게는 평화의 움직임입니다. 때로는 문서에 나오는 명시적인 움직임이 화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군가를 처벌하는 것보다 돈을 받는 것보다 해택을 주는 것보다 더 좋은 화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조약이후로 지금까지의 실패는 적어도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도 이번 주간을 살아가시면서, 지나감을 통해서 무언가를 배우고 이를 통해서 모든 이들과 좋은 대화와 조약(각서)을 맺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