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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당한다는 것

 

베드로전서 412-14,16

12.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3.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4.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16.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오늘은 이렇게 야외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여기는 호명호수입니다. 다행히 날씨가 좋고 햇빛도 비치니, 야외활동하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이렇게 좋은 날도 이번 주 주보 표지는 세월호 관련 이야기입니다. 봄나들이를 세월호참사가 얼마 지나지 않은 기간이어서 그리고 전국가적 추모기간이었기에, 미뤘는데, 어쨌든 오늘 이렇게 호명호수에 왔습니다. 그런데 세월호 문제는 해결될 기미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유가족이 생때를 쓰고 있다고 정부와 여당은 그렇게 이들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식 40일차를 이어가던 끝에, 쇠약하진 몸을 이기지 못하고 김영오씨는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팽목항 앞에 바다와 파도 그렇게 세월호를 삼켰듯이, 동시에 정치와 종교가 무능함의 쓰나미로 잠겨버렸습니다. 나희덕 시인은 아홉 번째 파도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여기 닿았다.

바다 저편에서 밀려온 유리병 편지

 

20121231

유리병 편지는 계속되는 파고를 이렇게 전한다.

 

42피트 쌍용자동차

75피트 현대자동차

462피트 연남대의료원

593피트 유성

1525피트 YTN

1837피트 재능교육

2161피트 콜트-콜택

2870피트 코오롱유화

 

부서진 돛대 끝에 매달려 보낸

수많은 낮과 밤, 그리고 계절들에 대하여

망루에서, 광장에서, 천막에서, 송전탑에서, 나부끼는 손들에 대하여

떠난 자는 다시 공장으로, 공장으로

남은 자는 다시 광장으로, 광장으로, 떠밀려가는 등에 대하여

밀려나고 밀려나 더 물러설 곳 없는 발들에 대하여

154000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전류 또는 전류에 대하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불빛에 대하여

사나운 짐승의 아가리처럼

끝없이 다른 파도를 몰고 오는 파도에 대하여

결국 산 자와 죽은 자로 두동강 내는

아홉 번째 파도에 대하여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젖은 종이들, 부서진 문장들

 

그들의 표류 앞에 나의 유랑은 덧없고

그들의 환멸 앞에 나의 환영은 부끄럽기만 한 것

 

더 이상 번개를 통과시킬 수 없는

낡은 피뢰침 하나가 해변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나희덕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파도들이 있습니다. 시인이 언급한 파고는 20148월인 오늘 더 높아져만 갑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파도는 한 번만 치지 않습니다. 이번 파도가 다음의 파도를 부르고 계속해서 파도를 부릅니다. 이것은 비유이지만, 우리는 아홉 번째 세월호 파도를 아주 쌔게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 번째, 열한 번째 파도를 맞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해변가에서 맞는 파도는 파도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바다 속에 잠재되어있는 파도가 더욱 무서운 법이지요. 이 잠재된 파도를 막기 위해서는 다시금 파도를 이겨내고 그다음 파도 또한 이겨내는 힘을 길러야겠습니다. 그래서 세월호참사의 올바른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제가 계속해서 우울한 이야기를 했지만, 여기 오늘 모인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아홉째 파도뿐만 아니라 열 번째, 열한 번째 파도도 기꺼이 이길 수 있는 멋진 기독교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옆 사람과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난 파도를 이겨냅시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전서 412-14, 16절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저자는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12.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2절은 누구에게나 시련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련의 강도는 어디까지나 다르겠지요. 그렇다고 이 시련의 무게를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가 느끼는 한 그 시련이 자신에게는 최고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2절은 모든 문장을 수동태로 쓰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당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시련을 당하고 이상한 일을 당하고 놀람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하게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은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가해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잊어 먹습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시련을 당하거나 시험을 당하거나 이상한 일을 당하거나 놀라거나 하는 것은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이는 갑의 행포나 고참의 행포나 꼰대의 행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역지사지로 생각했을 때에는 누군가에게는 시련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왜 한번도 유민 아빠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가해자는 기억하지 못 할뿐이고, 평생 피해자가 되어보지 못한, 그리고 평생 을이 되어보지 못한 그녀는 이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지요. 아무것도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 세상의 절대 다수가 을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저자는 이어서 13-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3.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4.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것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다 라고 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일 수 밖에 없습니다. 13절에서 동참을 NIV에서는 ‘participate’라고 말합니다. 참여하다, 동참하다라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가자를 participant라고 사용합니다. 곧 내가 고난을 당할 수도 있지만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참가자 혹은 그 일원이 되어서 그 고난을 공감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곧 그들의 관점을 가지고 그들이 주변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지금 당도해있는 고난을 그들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의미의 동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전제가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에 참석하고 이로 인해서 모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바로 예수처럼 살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입니다. 믿으십니까? 예수처럼 살아야 된다는 것은 굳이 되풀이해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약자를 위해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그리고 연대가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에 동참하며, 모욕당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머물러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6.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곧 세상에 부끄러워하지 말라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언컨대,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이 부끄러움은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고난을 행하는 이들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부끄럽다NIV에서 ‘ashamed’라고 했는데, 부끄러워, 창피한, 수치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많은 것 중에 일부를 나눌지 모르는 사람들은 창피해할 줄 알아야하며, 자신을 돌아보며 수치스러워할 줄도 알아야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한완상은 예수 없는 예수교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는 뜻을 새삼 주목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이지 앞세워 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따르미는 십자가 자기와 십자가 앞세우기 간의 차이를 뚜렷하게 분별하고 그 차이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세우기는 십자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용하여 자기탐욕을 채우는 짓거리입니다. 사사롭게는 개인의 부를 가져다주는 종교적 부적으로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십자가로 보석을 만들어 자기신분 상승을 과시할 수도 있겠습니다.

 

십자가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행동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같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십자가가 우리의 고난이라면, 우리 각자가 지고가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아울러 좋은만남교회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이번 주간을 보내시면서, 우리의 십자가 그리고 고난이 무엇인지 생각하시고, 기꺼이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과 모욕을 받아서, 하나님 한 분만이 주시는 기쁨과 복을 받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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