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낯선 신앙 앞에 섰습니다" 요한복음 1장 40~42절 / 방현섭 목사

by 방현섭 posted Sep 0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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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40~42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와 형제간인 안드레였다. 41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하였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메시아''그리스도'라는 말이다.) 42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19)게바''베드로' '바위'라는 말이다.)

 

제목 : 전혀 낯선 신앙 앞에 섰습니다.

설교일 : 201454

[좋은만남교회 부활절 제3주일 낮예배 설교]

 

들어가며 :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들, 간절히 생환을 빌며 가슴 졸이는 실종자 가족들과 이 엄청난 참사 앞에 함께 아파하며 눈물 흘려 이웃이 되어준 모든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설교를 할 때는 먼저 가벼운 농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시작했는데, 오늘은 그렇게 하기가 많이 힘듭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자비가... 충만하게, 넘치도록 베푸시기를...’ 보통 이렇게 하는데, 오늘은 그렇게 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공허하게 느껴지고 또한 여러분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머릿속이 참 복잡합니다. 이런 복잡한 생각들을 오늘 설교를 통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들어가서 : 지난 수요일에 인제에 가서 부모님 농사 준비하시는 것을 도와드리고 어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광화문 광장을 지나쳐 왔는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데 난리가 났습니다. 교보문고 앞 모퉁이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선 사람들이 확성기에 대고 예수 믿고 구원 얻으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 사람은 어깨 띠를 두르고 작은 핸드마이크를 메고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또 소리를 지르면서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현수막이 전도본부였는지 핸드마이크가 그 앞으로 가면서 손을 흔들더군요.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물론 밝지 않았지만 하도 자주 보는 풍경인지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치더군요. 물론 저는 그런 식으로 전도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좀 안스러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런 하나님, 그런 천국, 그런 신앙, 그런 전도는 발을 붙일 곳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최근 그동안 익숙했던 신앙과 이별하고 전혀 낯선 신앙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2014416일을 맞아 더이상 415일의 그 교회가 될 수 없게 돼버렸습니다. 세월호라는 한 여객선이 침몰하는 참사가 발생한 날입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한국호라는 배가 침몰한 날이기도 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저는 이날이 세월호, 한국호뿐만 아니라 한국교회호, 한국식 신앙호라는 배도 역시 침몰한 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침에 보니 사망자 242, 실종자 60명으로 집계가 되었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하는데, 예수와 관계없이 아이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이고, 그런 참상을 보면서 지금 우리 가족이 함께 있는 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5일까지의 천국과 지옥은 16일부터는 천국과 지옥이 아닌게 돼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물론 선장의 잘못, 선원들의 무책임, 당국의 안일한 행정, 해경의 독선 등등등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원인들이 계속 터져나오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런 것들보다 왜 하나님은 그들을, 그 어린 생명들을, 오로지 대학입시라는 경쟁구조 안에서 죽어라고 공부만 해대던 그 어린 것들의 생명을 그처럼 허무하고 고통스럽게 거두어 가셨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은 왜 하나님은 어른들에 비하면 무죄한 그 아이들이 물속에 빠져 바닷물을 마시며 익사하고, 공기가 없어 질식하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바라만 보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셨는가, 왜 평범하게 남에게 해꼬지 한 번 하지 않으면서 평범하게 살아온 서민들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드린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셨는가, 전지전능하신 분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악한들은 왜 그냥 놔두셔서 이런 사단을 내는가, 평균수명의 1/5밖에 살지 못한 아이들의 목숨은 거둬가면서 왜 자기의 잇속을 위해 기꺼이 타인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죽음으로 내모는 이들은 오히려 더 떵떵거리면서 사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사고를 지나면서 많은 목사들이 누가복음 134-5절의 말씀,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 어린 생명들의 죽음을 설명하려고 합니다만, 솔직히 전혀 위로도 되지 않고 이해도 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동안 우리가 믿고 의지해왔던 하나님, 정의롭게 사는 이에게 명예를 주시고, 간절히 기도하는 이에게 응답하시며, 죄인까지도 기꺼이 사랑하시는, 억울하게 고통 받는 이들의 생명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2014416일 이후에는, 저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안계십니다.

저는 아시다시피 매우 냉소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고를 접하고 고등학생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저도 그만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부끄럽고 화가 났습니다. 나의 기도가 그들을 살려내지 못한다는 것에 절망하였고, 내가 믿고 전도하는 하나님이 별로 자비롭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답답하였습니다. 하나님에 관해 내가 확신했던 것들이 다 무너져 내렸는데 앞으로도 여전히 목사로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기도가 달라졌습니다. 보통 기도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혹은 습관적으로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는 말로 시작하지요? 그런데 저는 이제 그런 말로 기도를 시작할 수가 없게 돼버렸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기도했지만 수백 명의 어린 생명들이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계신 그런 신이라면 결국 우리가 속은 것이거나 그런 신은 애초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믿은 것이고 무엇이 우리를 속였던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왜 속았던 것일까요?

그러나 이런 낯선 신앙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2천 년전 사람들은 예수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라는 틀 속에서 유대교의 풍습을 따르며 평안하고 익숙하게 잘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예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를 만난 후 그들은 전혀 새로운 아침을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바로 그 도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형제였는데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라가서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형인 시몬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는 앞으로는 너를 시몬이 아니라 게바, 베드로, 반석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십니다.

시몬은 시몬으로 성장하고 결혼하고 고기 잡으며 삼십여 년 이상을 잘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서 더 이상 시몬이 아니라 게바,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시몬이었던 어제와 베드로가 된 오늘은 전혀 다른 차원이고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었고 편안했던 유대교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습니다. 그가 유대교를 통해서 알았던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만난 전혀 다른 하나님이 이제 그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나선 베드로는 예수 때문에 공동체에서 쫓겨났고 목숨을 위협받았으며 결국 순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시몬이 베드로가 되는 그 순간, 그는 전혀 낯선 신앙 앞에 홀로 서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1517년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을 겪으면서 더이상 과거의 신앙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믿어왔던 교황의 신적 권위, 성모 마리아의 신성, 각종 성사의 현실적 권능은 도전 받았으며 가톨릭교회의 제도와 권위를 더 이상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어제와는 전혀 다르고 낯선 신앙의 방식을 선택하였습니다.

또 한 차례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게 됩니다. 기독교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르네상스라는 인본주의적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인간이 가진 능력에 도취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야말로 신을 찾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도구라고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성적인 인간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수억 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상을 겪으면서 인간 자신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특별히 2차대전에서 유태인 학살을 경험하면서 가연 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신은 왜 인간의 고통에 침묵하고 있었는지, 그동안 믿었던 신, 하나님이 어떤 존재였는지 새로운 질문과 대답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는 유태인을 학살하였습니다. 그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 수용소에서는 매일 같이 수백 명의 유태인들이 갖은 방법으로 죽어나갔고 그 육신은 한두 장의 비누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지요. 하루는 유태인들 몇 명이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어린 아이도 포함돼 있었답니다. 교수형이 시작되었는데 성인들은 몇 분 후에 숨이 다 끊어졌는데 아이는 몸무게가 작아서 그런지 숨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허공에 매달려 캑캑거리면서 고통을 당할 뿐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유대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에 계시냐? 어디에 계시길래 지금 저렇게 고통스럽게 죽지도 못하고 있는 아이의 신음을 외면하느냐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렇게 울부짖는데 한 아이가 허공에 매달려 허우적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에 계세요, 하나님이 저기에 함께 목매달려 계세요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유태인들은 함께 고통당하고 함께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고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저도 제가 목사로서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대답, 지금 온 국민이 다함께 빠져 있는 이 트라우마와 상처에 대한 설명이 이 정도밖에 없습니다. ‘함께 고통당하고 함께 죽어가시는 하나님밖에는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는 영성이 부족해서 그런지, 이번 사고가 너무나 참혹해서 섭섭한 마음이 커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신앙의 방식,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구원이라는 것이 그저 죽음 이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이 시시콜콜 사사건건 우리의 삶에 개입하면서 감내라 떡내라 하시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기도한다고해서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삶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아멘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의 자아가 너무 자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믿었던 신앙의 방식과 원하건 원하지 않건 결별해야 하는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그럼 이제 어떤 신앙의 방식을 개척해야 할까요? 그것은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역사의 매 순간마다 새로운 신앙은 고통을 수반하였고 신자들을 갑자기 부모 없는 고아처럼 내팽개쳐버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신자들은 매번 그 도전을 통해 전혀 새로운 신앙의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장성하여 부모의 품을 떠난 성인이 부모의 뜻과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묵묵히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삶을 사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러나 우리 자신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과 신앙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신앙은 요행이나 도움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 우리 자신의! 최선의! 노력!을 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자각해야 합니다.

 

나가며 :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과 결별하는 것은 대단히 두렵고 아픈 일입니다. 신앙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이들이 그동안 믿고 고백했던 하나님과 결별하고 새로운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고아처럼 내팽개쳐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신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고백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믿지 못합니다. 아브람이었던 아브라함이 그랬고, 시몬이었던 베드로가 그랬고, 사울이었던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 길이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그래도 그렇게 새로운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더욱 진지하고 진실하며 스스로 동의하는 신앙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혼란스러운 때, 암흑과도 같은 시절을 통해 새로운 신앙의 고백을 만들어 가시는 여러분께 새롭게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참극 앞에 신의 역할, 신의 위치, 신의 능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신은 더이상 사사건건 우리의 죄를 묻거나 상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다. 전지전능성도 머르겠다. 그럼 어디에? 함께 익사하면서 고통을 당했나? 그건 2차대전 당시의 고백이다.

예수는 친히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로 인간의 고통스런 삶이 끝난 것도 아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온전히 죽음 이후 영혼의 구원에만 국한하는가?

신은 더이상 우리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것같다. 우리는 하나님 지켜주시고 도와주세요, 믿습니다 하면서 섭리와 도움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으로 우리가 깨어서 우리 스스로 어려움으로부터 탈출하고 벗어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기도하고 기다린다고 해결되지 않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를 키워주신 어버이, 우리가 제대로 어른 노릇하게 키워주시고 은퇴하여 여생을 즐기는 우리의 부모, 나의 아버지 어머니, 오히려 내가 챙겨드려야 할 노년이 되신 것은 아닌가?

신이 신 되는 것은 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달려뻐린 것은 아닌지?

이 침극 앞에 우리는 우리가 누구임지 보고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신은 누구이며 그 신과 우리는 무슨관계인지 진지하게 다시 묻고 관계를 새로 맺고 정체성 질문을 다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