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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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 가는 길

 

창세기 22:1-6

1.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3.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4.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5.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 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6.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요 며칠은 가을하늘로 주변세상이 푸르렀습니다. 특히 지난 월-, 경주의 푸른 산과 강 그리고 코스모스 군락을 보면서, 내 눈과 마음을 치유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역시 자연의 색은 인간의 마음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까지도 같은 색으로 물들게 합니다. 그래서 값없이 주는 은혜가 바로 이것이 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종일 내내 가슴에 달린 노란리본을 보면서 무언가 답답한 마음과 뭔지 모를 속 쓰림이 찾아왔습니다. 허수경 시인의 시의 사랑의 불선이라는 시처럼 말입니다.

 

너는 왜 위가 아프니 마음이 아프지 않고

그래서 이렇게 묻잖아 약은 먹니 술은 안 마시니 지워진 길도 길이니 얼굴이 아플 때도 있니 너 누구에게 맞았니!

 

그래서 돌아본다 조용필이나 고르며 일테면 나는 물고기 비늘 많은 물고기 가시 많은 물고기 가거도에 가면 멸치를 잡을 수 있을까요

 

마음끼리 헤어지기 싫어 할 때 견딜 수 없는 몸은 마음으로 돌아온다 에이 바보같이 에이,

마음의 어깨 마음의 다리 마음의 팔이 몸을 안는다

 

약은 먹니 그래그래 너는 아가리의 심연을 아니

근데 왜 바보같이 맞기만 했을까

몸의 마음이 너를 때렸니 가기 위해

돌아오기 위해?

허랑허랑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고백은 아무 효력 없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효력이 발생해, 사랑하는 당사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합니다. 애도와 연대 그리고 공감이 사랑표현의 하나의 방식이라면, 세월호 사건뿐만 아니라 도처에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지금은 지난한 과정 중에 있지만 언젠가는 큰 힘이 발위될 거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적어도 하나는 가슴 속에 아리거나 꺼내고 싶지 않을 아픔들이 있으실 겁니다. 이 가슴 속에 있는 아픔을 사랑의 힘으로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는 한 주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많이 알려진 말씀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는 사건이고, 이 사건 이후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여러 복들을 약속받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이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첫 부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21장을 살펴봐야하지요. 21장 전반부에는 이삭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바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이삭으로 인한 사라와 하갈의 갈등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이스마엘이 장자였습니다. 이삭의 등장이후로 집안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물로 인한 아비멜렉 사람들과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 갈등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은 본토 아비 친척 집을 떠나 블레셋 지방으로 오게 되는데, 아비멜렉이 이 지방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당연히 그 지역과 나라의 왕에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지요. 아브라함은 이 갈등을 새끼 양 일곱 마리를 주면서, 어찌 어찌 화해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갈등 봉합이 맹세나 화해로 그 앙금이 눈 녹듯이 깔끔히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민자였기 때문에 말 못할 사연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이 모든 것들이 이삭이 태어난 뒤부터 연달아 일이 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과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이었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절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1절과 같이 하나님에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말 없이 그 다음날 짐을 챙기고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왜 아브라함은 인신제사를 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이 당시의 배경의 보자면, 가나안의 이방인들은 재난을 극복하고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인신제사를 올렸습니다. 이렇게 살펴보고 나면, 아브라함은 이삭이 생기고 나서 가정 내의 갈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갈등을 이삭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의 풍습대로 인신제사를 생각할 수도 있었다라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1절로 다시 한번 돌아오면 시험이라는 단어가 보입니다. 70인역에서 헬라어로 이를 페이라스모스로 쓰고 있는데, 이 뜻은 유혹, 시련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인신제사의 유혹에 사로잡혔을 가능성도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인신제사로 갈등을 봉합하려고 하던, 하나님의 명령이던지 이 상황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성서에서도 증언하듯이 아브라함은 그렇게 사흘을 땅만 보고 갔을 것입니다. 이는 4절을 보면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4.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사흘 동안 땅만 보고 걸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신제사의 유혹이든 하나님의 명령이든 결국은 모리아 산에 올라가는 순간 이삭은 죽는 것입니다. 이삭이 죽는 걸 알면서 그 길을 걷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브라함의 3일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암기한 사람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러나 이 이야기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었을까?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헤겔을 이해하기란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이해하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고들 한다. 헤겔을 넘어서서 나아가기란 하나의 기적이지만, 아브라함을 넘어서서 나아가기란 가장 쉬운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에 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할 때면 전혀 속수무책이 되어버리고 만다. 순간마다 아브라함의 생명의 내용인 저 무서운 역설이 눈에 뜨이고, 순간마다 나는 퇴짜를 맞고, 아무리 정열을 기울여도 나의 생각은 거기로 해치고 들어갈 수가 없고, 머리카락 한 올의 폭 만큼 나아갈 수 없다. 나는 어떤 전망을 얻어 보려고 근육 하나하나를 긴장시켜 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마비되고 만다.

 

광화문 광장에서 24일 동안 단식한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정청래는 단식을 마치면서, 이런 말을 했다라고 합니다. 저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마음을 1/1000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그들 마음을 해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들에게 그냥 한없이 빚을 진 느낌입니다. 인간의 도리로서 그리고 이제 부모된 한 사람의 입장으로서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평생 빚진 마음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삭도 이 날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내 자식이 죽을 줄 알면서 가는 길은 어떠했을까요? 그렇다면 불리할 줄 알면서 가는 길은 어떠할까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는데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상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감정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심정은 누구도 세월호 유가족들이 제일 잘 알 것입니다. 이 알면서 가는 길,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6절 마지막에 창세기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NIV 성경은 이렇게 나옵니다.

 

the two of them went on together.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리 중 두 사람이 함께 앞으로 (계속) 나아갔습니다. 이 둘 다 알면서 그 길을 함께 올라갑니다. 그 길을 알면서 함께 올라가게 됩니다. 모리아 산까지 올라가는 동안 이 둘은 동반자이고 각 자의 역할을 충실히 즉, 한 사람은 등짐, 한 사람은 칼과 불을 들고 각 자의 역할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직 하나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하나님과 이삭으로서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시험을 히브리어로는 바한이라고 합니다. 이는 시험하다라는 뜻보다는 증명하다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올라간 것은 증명하기 위해서 올라간 것입니다. 모든 갈등의 시작이 이삭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이 모든 것들이 이삭이 죽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신제사는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인신제사는 본인 자체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 내려가는 순간, 시험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됩니다. ‘알면서 가는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내에 갈등이 있지만 해결하기 위해서, 지역 내에 갈등이 있지만 해결하기 위해서 가야 합니다. 해결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해결의 열쇠는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입니다. 실패하려고 가는 길이고 불편하지만 가는 길이고 억울하지만 가는 길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아픔은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이 제일 잘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아픔을 당하거나 고난을 받은 이들의 마음을 적어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적어도 예수 따르미라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중세 여성 영성가 노리치의 줄리안이 사랑의 계시에서 세 가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지만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라고 하지요. 세 가지는 이렇습니다. 참된 통회의 상처, 깊은 동정심의 상처,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열망의 상처입니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인의 역사 곧 사랑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품고, 그 상처를 안고 상처를 받을 줄 알면서 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사랑입니다.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알면서도 가는 길을 걸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갈등과 갈등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필요한 곳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레비나스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먼저 하시죠, 선생님!” 우리가 먼저 함께 걷는 이 길을 걷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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