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셨습니까?
창세기 3장 1-6절
1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4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오늘은 1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리고 기다림 초가 하나 밝혀지며,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강림절 첫째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2014년 11월 한 달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그냥 저냥 보내기에는 이번 11월 한 달도 제법 길었고, 곳곳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 이번 주에는 쌍차와 마찬가지로 YTN 해직기자들이 징계무효소송에서 기각이 결정이 나와 이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고, C&M 노동자들은 아직도 전광판 위에 올라가 부당한 해고를 알리기 위해서 사측과 싸우는 것도 버거운데 심지어 지금 칼바람과 추위에 맞서고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아직 해결하지 못한 노동쟁의현장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이들이 있어 부정의하고 각박한 세상에 정의로운 세상이 필요함을 알리는 유일한 빛이 되고 있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시처럼 말입니다.
울지마
사랑한 만큼
슬픈 거니까
울지마
슬픔의 힘으로
가는 거니까
울지마
네 슬픔이 터져
빛이 될 거야*
- 박노해, '슬픔의 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되도록 슬픔의 힘보다는 즐거움과 미소 가는 것이 좋지만, 강자들에게 딱 맞춰진 세월와 세상이 야속합니다. 이들에게 희망의 아기 예수가 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네 삶이 넉넉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도 팍팍합니다. 이 팍팍한 삶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목요일 예수살기 후원의 밤에서 한 초대가수가 들국화의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곡을 부르면서 내 마음 한켠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이 시대에 나에게 또한 주변인들에게 노래만이 위로가 되는구나, 라는 생각에 고민스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버스타고 집에 오는 내내 이 노래를 들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 깊이 묻어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힘든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이 시간 노래가사처럼 옆 사람을 위로하면서, “후회 없이 사랑합시다”라고 인사 나누었으면 합니다.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이번주간 후회 없이 사랑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은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남자와 여자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선악과로 잘 알려진 나무와 그것 주변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 이후, 본격적으로 성서 속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에덴동산의 행복은 이 오늘 본문의 사건 이후로 사라집니다. 그동안의 행복은 뒤로한 채, 성서는 계속해서 자연 속에서 생존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평생 인간이 땀을 흘리고 고생해야지만 살 수 있는 시지프의 굴레 속처럼 지난한 서막의 시작입니다. 바로 그 시작은 오늘 본문 창세기 3장 3절에 나오는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 때문입니다. 자 이제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평화롭고 아무런 걱정이 없던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찾아와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그 대화가 1-3절입니다.
1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뱀은 히브리어로 나하쉬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파충류를 말할 때 쓰입니다. 그리고 NIV에서는 뱀은 ‘serpent’라고 하는데, 보통 뱀보다는 음흉한[교활한] 사람, 악의 있는 사람을 가르치는 뜻으로 쓰이거나 악마나 사탄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의 뱀은 교활한 자, 사람로 해석해서 성서를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나하쉬는 바로 파충류입니다. 파충류는 변온동물이어서 주변 환경에 적응을 잘합니다. 또한 와 포유류의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말 추운 곳은 살지 못하지만 사막에서도 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파충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어른은 파충류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오늘 본문의 뱀일 때가 많다,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어른들은 현실감각이 뛰어납니다. 현실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은 눈치가 백단이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고, 그 시대의 체제와 규율에 잘 녹아들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조금만 벗어나게 되면 바로 구분되고, 분류되고 시작합니다. 그 분류는 간단합니다. 해야 되는 것, 하지 말아야 되는 것으로 구분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효율입니다. 효율이 중요시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효율들이 우리 현실을 더욱 각박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체제가 그렇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심지어 효율은 힘에 따라 때로는 원칙마저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4절처럼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대원칙을 어긴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대원칙들을 어긴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예수처럼 살지 않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안 갖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방감이 더 클 것입니다. 수능시험이 얼마 전에 끝났습니다. 모든 고3들은 해방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고3들이 완전한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2014년이 지나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청소년이라는 딱지를 띨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당하게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성인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해방감이 더 큰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원칙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혹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배운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육기관이 초중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에 벗어나거나 이 사실을 망각하더라도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해방감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 해방감을 벗어난다고 해서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버젓이 살아 있습니다. 이어서 뱀은 여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말은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뱀의 말입니다. 해방감에 도치된 어른의 말이기도 합니다. 혹은 우리 주변의 어른들의 말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말들이 우리들에게 좋은 지침이 됨은 물론 사회생활에 나침반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6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6절에서 3가지 정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육체의 정욕입니다. 바로 먹음직도 하고, 에서 볼 수 있는데, 먹을 것을 배부르게 먹지 못한다는 것, 이는 생존과 관련되어 있지만, 이 생존을 벗어나는 순간 이는 유희나 놀이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버려지게 됩니다. 그 순간 죄책감은 사라집니다. 이어서 보암직도 하는,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눈의 정욕입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시각이 결정하는 시대입니다. 소비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 시각의 황홀입니다. 그래야지만 사람들은 이를 매력 있게 느끼고 이 이미지를 소비하게 됩니다. 우리들도 이미지를 판매하고 이 이미지에 목숨을 겁니다. 이것은 때로는 채면이고 우리들의 낯짝을 가리는데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지식의 정욕입니다.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에서, 볼 수 있듯이 얼마만큼의 정보를 소유하는가에 따라서 주도권이 달라집니다. 보통 정보의 양은 계층이 비례합니다. 곧 권력과 연결됩니다.
이 3가지, 육체와 눈 그리고 지식의 정욕을 다 소유했을 때, 지금 이 시대에서는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 3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면 눈이 밝아져 세상을 한 눈에 자기 식으로 보아도 상관이 없고, 세상이 돌아가는 읽는 눈을 손쉽게 가지게 됩니다. 또한 선악을 판가름하는 기준도 이 3가지를 가진 자에게 있습니다. 너무나 매력적인 열매입니다. 이 세상의 어른들은 이 3가지를 쫓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아니 주입시킵니다. 이 3가지가 삶을 이루는데 있어서 필요하다, 라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이 되는 순간, 계층이 생기고 차별이 생기고 구별이 생깁니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하나님 되어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소모품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내가 전능해지는 순간, 내 주변인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거나 능력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삶의 지표가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존 웨슬리는 믿음의 성장을 아이 단계부터 어른 단계로 구분합니다. 어른단계의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는 믿음인데, 이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도록 이끌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이끄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인으로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정욕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어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어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뱀은 어떻게 간교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에덴동산에서 말입니다. 이 물음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물음의 블랙홀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정확히 악의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는 지금 우리 주변에 현존하는 악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악의 기원을 벗어나 이번 이야기 안에만 머물게 된다면, 뱀의 질문에는 의도가 있었고, 그 의도대로 여자는 움직였고, 그렇게 에덴동산에 쫓겨나게 됩니다. 뱀의 의도대로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원죄라는 신학적 해석도 나타나게 됩니다. 웨슬리는 원죄에 갇힌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졌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사명은 바로 하나님 형상에 회복입니다. 따라서 어른이 된 우리들에게 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첫 걸음은 열매를 먹은 이후입니다. 그리고 악의 현존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생 2권에서 이런 대화가 오고 갑니다.
왜 그 수를 거기에 뒀는지 설명해봐.
그냥.
바둑에 그냥이란 건 없어.
어떤 수를 두고자 할 때는 그 수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계획이 있어야 해. 그걸 ‘의도’라고 하지. 또, 내가 무얼 하려고 할 때는 상대가 어떤 생각과 계획을 갖고 있는지 파악해야 해. 그걸 상대의 ‘의중’을 읽는다고 해. 왜 그 수를 거기에 뒀는지 말할 수 있다는 건 결국 네가 상대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형세를 분석한 안목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된다는 뜻이야. 그냥 두는 수라는 건 ‘우연’하게 둔수인데 그래서는 이겨도 져도 배울게 없어진단다. ‘우연’은 기대하는 게 아니라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오는 선물 같은 거니까.
열매를 먹은 순간, 우리는 해방감에 휩싸이게 되고, 어른이 됩니다.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곧 무엇을 배우는가가 중요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신앙생활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먹었고, 어떻게 하나님처럼 되는 줄 알지만 이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적어도 어른 단계에 신앙인으로서 말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좋은만남교회 성도님들은 어른이 되셨습니까? 이번 주간 진정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