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7장 11-17
11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14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하였다. 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제목 : 공감의 예언자
설교일 : 2014년 9월 7일
[좋은만남교회 성령강림 후 제 13주일 / 왕국절 제 2주일 낮예배 설교]
들어가며 :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8천만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하나님이 베푸시는 풍요와 여유, 그리고 나눔이 이 땅 위에 몸 붙여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동포들 위에 임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말씀을 시작하면서 명절에 어울리는 시를 한 수 읊겠습니다. 작자미상이긴 하나 아마도 며느리 신분의 여성이 지은 것 같습니다.
저번제사 지나갔네 두달만에 또제사네 / 할수없이 그냥하네 쉬바쉬바 욕나오네 / 제일먼저 나물볶네 네가지나 볶았다네 / 이제부터 가부좌네 다섯시간 전부치네 / 허리한번 펴고싶네 한시간만 눕고싶네 / 남자들은 티비보네 뒤통수를 째려봤네 / 주방에다 소리치네 물떠달라 지랄떠네 / 제사상은 내가했네 지네들은 놀았다네 / 절하는건 지들이네 이내몸은 부엌있네 / 이제서야 동서오네 낯짝보니 치고싶네 / 손님들이 일어나네 이제서야 간다하네 / 바리바리 싸준다네 내가한거 다준다네 / 아까워도 줘야하네 그래야만 착하다네 / 피곤해서 누웠다네 허리아파 잠안오네 / 명절되면 죽고싶네 일주일만 죽고싶네 / 십년동안 이짓했네 수십년은 더남았네
이 시를 들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어떤 분은 ‘딱 내 얘기네’ 하시는 분도 계시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어떤 분은 ‘저렇게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거나 또 어떤 분은 ‘그러게 시집을 잘 가야지’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남편들은 이 시를 가볍게 듣지 말아야 할 줄로 믿슙니다! 이번 명절에 명품가방은 하나 못 사주더라도 ‘고생했습니다’ 한마디 따뜻하게 해주고 꼬옥~ 안아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시는 남편들, 아들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내의 마음을 남편이 몰라주는 것만큼 서러운 것은 없을 겁니다. 반대로 남편 마음 몰라주는 아내만큼 야속한 것도 없을 겁니다.
예수님이 나인이라는 성에 가시는데 성문 앞에서 장례행렬을 만나셨습니다. 보아하니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이었습니다. 과부이지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안이었는지, 아니면 동네 인심이 좋았는지 또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었던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다행히 무척 을씨년스럽고 적막할뻔 한 장례식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과부여인을 보시고는 가엾게 여기셨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그 여인을 가엾게 여기셨을 까요? 그것은 외아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잃은 여인의 아픔을 바로 자기 아픔처럼 공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마음을 동정심,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이 연약한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는 연민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상대방의 마음을 그대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성경 뉴인터내셔널버전(NIV)으로 13절 말씀을 보니 “ When the Lord saw her, his heart went out to her“라고 번역돼 있습니다. went는 go의 과거형이죠, 그런데 여기에 out이 붙으면 이건 ‘완전히’라는 강한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보았을 때 예수님의 마음이 완전히 그녀에게로 갔다’, 즉 예수님의 마음이 그 여인에게로 아주 가버렸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은 그 여인의 마음과 똑같게 된 것이죠, 공감입니다.
예수님의 목회는 공감의 목회였습니다. 군대 귀신 들려서 무덤에 사는 사람을 볼 때, 열두 살 난 딸이 죽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이 개보다도 못한 존재라며 자비를 구하는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만났을 때,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그 삶의 변화를 열망하던 삭개오를 만났을 때, 그리고 심판의 날을 앞두고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안타까워하고, 불쌍히 여기고, 가슴 아파하면서 때로는 통곡하기도 하셨다고 성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감의 순간에 예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는 무슨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죽어서 빴빳하게 굳었던 청년의 시신에 생기가 돌고 일어나 말을 하고 그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을 발견해야 합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기적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기적인지 모릅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까? 최근 뉴스를 보니까 한국의 자살률, 자살증가율이 압도적 1위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자살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되지요. 이게 지금 교회와 교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가족과 이웃과 공감하면 죽음이 우리 곁을 떠나고 생명이 충만하게 되고 이 세상은 정말 살만한 세상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생각할 때 죽었던 청년이 다시 살아난 기적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사람들의 마음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공감의 순간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찬양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 즉 자신들을 돌보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버림받지 않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다고 찬양하며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감과 소통의 모습을 보여주셨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공감하고 소통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누군가와 공감하고 있으며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과 어느 누구와도 공감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의 질이 얼마나 다를까 하는 것! 그 공감의 기적, 소통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제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요즘 공감, 소통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푸른 기와집에 사는 높으신 분이 책임지고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제는 말을 바꿔서 그건 국회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합니다. 언제든지 만나서 이야기를 듣겠다고 하지만 지금 유가족들은 17일째 노숙하면서 만나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사망한 사람이 294명, 아직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사람이 10명입니다. 벌써 150여일이 되었는데 진상규명도 안 됐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습니다. 4인 가족이라 쳐도, 사망자 실종자 304명이면 지금 깊은 슬픔에 빠져있는 가족만 천여 명에 이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밝혀달라고 단식을 하고 노숙을 하면서 요구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단식하다 죽어버려라, 제대로 단식하면 40일씩이나 견딜 수 없다, 이혼자이고 노조원이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단식하고 있다, 시체장사 그만 해라, 이젠 지겹다, 민생이 어려운데 그만해라’ 하면서 비아냥거리고 비판합니다. 또 어떤 청년들은 단식장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폭식투쟁을 한다고 모였습니다. 또 대통령 제부라는 사람은 ‘세월호단식 실체규명 실험단식’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제대로 단식했는지 검증하겠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공감하지 못해서, 공감능력을 잃어버려서 그렇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아들딸, 부모님, 연인을 잃은 이들이 어떤 심경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저렇게 비아냥거리고 욕설을 해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아픔이 자기 가족의 일이라거나 자신의 일이라 해도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절대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그런 아픔을 겪지 않고도 아픔을 당한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일 것입니다. 이런 시대의 구원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공감과 소통이 구원이고 불통이 이시대의 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대를 초월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이웃과, 타인과 공감하는 것,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공감의 기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가며 :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제가 함께 농사를 지어 가을에 추수를 하고 수확물을 나눠가졌습니다. 분배한 날 밤 형이 잠자리에 들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동생이 아이들도 많고 동생이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별로 없고 하니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밤에 몰래 일어나서 자기 낟가리에서 한 짐을 져다가 동생의 낟가리에 얹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동생도 밤에 생각해보니 형님이 농사짓는데 더 많이 일하신 것 같고 또 형님인데 더 많이 갖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벌떡 일어나 자기 낟가리에서 또 한 짐을 가득 지고 형님 낟가리에 갖다 놓았지요. 이 이야기 다 아시지요? 어떻게 됐습니까? 이게 공감입니다.
명절을 지낸 후에 이혼률이 급증한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동서가 동서를 서로 조금씩만 이해하고 서로의 처지에 대해 공감해준다면 달라집니다. 서로의 처지를 생각하고 공감하면서 이해하려고 소통하는 마음이 바로 명절의 마음입니다. 공감할 줄 알면 가족모임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또 이 명절에 가슴 아프게 지내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 실종자 가족이 그렇고 외국인들이 그렇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떨어져 사는 가족, 남북이산가족, 노숙인들 등등이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들과 공감한다면 우리 자신에게나 또한 아픔을 가진 이웃들에게 이 명절이 더욱 풍성해질 겁니다.
과부의 죽었던 아들이 되살아난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큰 예언자가 났다고 흥분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생각해봅니다. 큰 예언자는 기적 때문일까, 아니면 공감하는 마음 때문일까? 저는 공감의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적은 한번 일어나면 끝나는 일회적 사건이지만 공감의 마음은 어느 시대에나 사람 사이에서 기적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감의 마음이 더욱 큰 기적이자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능력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공감의 큰 예언자라고 찬양하였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도 공감의 예언자가 되어 이 시대에 생기를 불어 넣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공감의 예언자가 되어 가족과 이웃 앞에 서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