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받는 삶의 비결" 창세기 22장 6-14 / 방현섭 목사

by 방현섭 posted Aug 0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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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 226-14

6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7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8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9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11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 여기 있습니다."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14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제목 : 복 받는 삶의 비결

설교일 : 201497

[좋은만남교회 성령강림 후 제 17주일 / 왕국절 제 6주일 낮예배 설교]

 

들어가며 :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누리며 또 생명력 넘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은혜를 구하며 세우신 교회에 나온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기를 빌며, 또한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셔서 억울한 마음, 분한 마음, 서운한 마음을 위로하시고 그 기도의 제목을 들어 응답해 주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오늘 설교 제목을 복 받는 삶의 비결이라는, 매우 부흥회적인 제목으로 잡아보았습니다. 설교 준비하면서 보니 제가 이런 복 받는다느니, 은혜를 입는다느니 하는 내용의 설교를 별로 안 했던 것 같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하나님의 복을 거부한다거나 하나님의 복을 믿지 않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 알고 계셨지요? ,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목숨 붙어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복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우리는 신앙의 언어로 하나님의 복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아브라함이 독생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복 받고 복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따라 은혜 은혜 하고 순종하여 아들까지도 하나님께 바치고자 해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 이야기라고 어쩌면 방목사가 변절했나보다 하시거나 혹은 들어보나 마나 뻔한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일단 변절한거는 아니고요, 오늘 말씀도 아들까지 기꺼이 바치 정도로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얼마 전 남기평 전도사님이 알면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이 본문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수요성서대학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강의를 하시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교훈을 주시고 영감을 주셨습니다. 그 영감을 나누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교회학교에서부터 너무나 자주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 말씀을 들으면 머릿속에서 한 편의 드라마가 저절로 떠오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그저 순종의 이야기, 순종하면 복 받는다는 가르침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설교자들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무엘서의 문구와 더불어 도무지 하나님의 뜻이 이해할 수 없어도 무조건 믿고 순종하라는 설교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가 교회학교에서 배웠던 그대로 한 편의 동화처럼 그대로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깊은 상징을 담아 표현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날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이고 어떤 계기 때문인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신제사는 가나안 사람들의 풍습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사람을 때로는 자기 자식을 수천도나 올라가는 뜨거운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해서 태워 죽여 제물로 바치든지, 아니면 동물을 잡아서 바치는 것처럼 제물로 바쳤습니다. 가나안 지역은 비옥한 토지를 경작하는 농경문화가 일찍이 발달한 곳이었고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농사꾼들이었는데도 그 귀한 사람을 제사로 바쳤던 것입니다. 왜 사람을 제사로 바쳤을까요?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인 바알, 몰렉, 아세라, 밀곰 등이 비를 내려주지 않거나 태양을 뜨겁게 비춰주지 않으면 풍작을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장 귀한 것을 잡아 신에게 제물로 바쳐서라도 풍작을 기원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신제사는 풍작을 거둬 더 많은 것을 거둬들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탐욕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사람이건, 자기가 낳아서 키운 자녀건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식들까지도 자식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제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 우상숭배, 물질에 대한 탐욕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시대에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도 인신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처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농사꾼인 가인이 아니라 목축업을 하던 아벨의 제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유목생활을 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고, 결국 독생자 예수를 인간의 대속물로 보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신제사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농경문화, 농사꾼들의 탐욕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제사가 아닌 인신제사의 못된 풍습을 따라 배웠고 그렇게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을 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신제사를 원하시지 않았지만 인간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질 때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잘못 섬기고 결국 하나님 신앙이라고 믿지만 결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목숨을 끊으려고 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고 인신제사를 막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아니라 동물로 제사를 지낼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제야 아브라함의 눈이 띄였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의 잘못된 신앙이 눈을 뜨고 참된 하나님의 신앙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을 그저 탐욕을 채우기 위해 드리는 제사의 제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 인간이 귀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탐욕이 아니라 사랑, 물질이 아니라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탐욕을 채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만한 분도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귀히 여기시며 살리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고 탐욕을 위한 제물이 되는 시대만큼 불행한 시대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른 것이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는 헛된 신앙이 주류가 된다면 그 종교는 종말을 향해 치달리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는데 벌써 6개월이다, 이젠 지겹다, 그만하고 경제 살리자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월호에 희생된 이들이 사실은 탐욕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 아닙니까? 가나안의 바알신앙, 인신제사와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또다시 세월호 때문에 경제가 죽어간다며 그 유가족들까지도 제물로 삼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뿐입니까? 용산참사, 쌍용자동자, 밀양과 청도송전탑, 재능교육, 강정마을, 가리왕산, 골프장 공사모두 인간을 탐욕의 제물로 삼는 현장입니다. 인신제사의 시대에 우리 신앙이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신앙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복은커녕 끝없는 재앙과 재난, 사고와 위기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가며 : 이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큰 민족이 나오게 될 것이고 후손이 바다의 모래보다, 하늘의 별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순종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탐욕을 위해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천박한 제사문화, 거짓된 하나님 신앙을 변혁해서 전혀 새로운 인간존중의 종교문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오늘같이 인간의 생명마저 탐욕의 제물로 삼는 이 불행한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르게 신앙할 줄 아는 기독교인으로 거듭난다면 우리 자신은 물론 온누리 인류가 함께 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