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 누가복음 4,16-21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17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18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19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제목 ; 행복의 조건은? 함께!
들어가며 : 우리 삶의 목표이자 과정이시며 삶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함께하시며 힘과 용기를 주심에 감사하며, 이 귀한 은혜가 우리의 생에 충만하게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신문의 상담란에 상담편지를 보냈습니다. “정말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저희 아버지께서 너무 교회에 빠졌습니다. 이거 어떻게 고치는 방법이 없을까요? 정말 너무나 괴롭습니다. 매일 밤마다 아버지께 설교를 들어야 한다니…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너무나 불쌍해요. 매일 새벽과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이렇게 교회에 나가고 있어요. 제발 교회에서 벗어나는 법 좀 가르쳐 주세요.” / 그러자 며칠 후에 답이 달려 나왔습니다. “음… 아버님이 교회에 빠지셨다구요? 당신은 정말로 행운아입니다! 저희 아버진 불교에 빠져서, 지금 산에서 안내려오신지 10년입니다! 교회에 빠진 게 정말로 행복한줄 아십시오! 아버지, 보고 싶어요. T_T” 교회에 푸~욱 빠지셔서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신 줄 아는 여러분들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새해를 맞아 많이들 덕담을 주고 받으셨을텐데 여러분이 가장 듣기 좋던 덕담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행복하라는 말이 참 좋았습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여러 가지 조건들을 담고 있어 어떤 한두 가지 의미로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행복한 삶에 대한 갈망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저도 항상 여러분에게 설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신앙의 목적은 행복이라고요! 천국이나 지옥, 상급이나, 면류관 뭐 이런 것들도 다 이승에서건 저승에서건 행복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주제입니다. 그토록 열심히 기도하는 이유도 행복을 위한 조건을 채워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혹은 저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러다보니 헌신이나 나눔, 희생, 십자가 뭐 이런 개념들이 교회 안에서조차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도 우리 교우들이 모두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시기를 바랍니까? 행복하시고 싶습니까?
그래서 제가 행복의 조건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전제조건은 성서에 다 적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서의 내용은 우리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신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시기 위해 해주신 말씀임을 믿어야 합니다. 믿습니까? 그 중에서도 오늘 읽은 말씀이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구약성서 이사야의 61장의 말씀을 예수님이 읽으시며 그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선포를 하시는 부분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은혜의 해, 희년을 선포하는 말씀이라고 하는데요, 그 내용의 대상은 가난한 사람, 포로 된 사람, 눈먼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거론은 되지 않았겠지만 아마도 예수님이 가깝게 하셨던 창녀나 병자, 세리들도 포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럼 나는? 나는 은혜의 해의 혜택을 영원히 입을 수 없다는 말인가? 왜 나는 은혜의 해를 누리는 혜택에서 빠져있는가? 나에게는 희년이 필요 없다는 말인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영적으로 보면 우리도 가난하고 병들고 눈멀고 포로된 자이겠지만 어쨌건 우리는 이 말씀이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느낌은 좀 덜 들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자녀들의 행복을 바라시면서 주신 말씀에 가난한 자, 병든 자, 장애를 가진 자, 포로되고 억눌린 자들의 해방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은혜의 해라고 하셨을까요? 은혜는 특별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텐데 말입니다. 그럼 보통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은 은혜의 자격에서 제외되었다는 말이며, 은혜의 해는 그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전체적인 행복이 그 사회의 평등과 정의, 혹은 덜 행복한 부류들의 삶에 의존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함입니다.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행복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동흡이라는 사람이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로 청문회를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하였습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공부 열심히 하고 나름대로의 처세술을 발휘해서 승승장구하고 권력을 얻고 높은 지위를 얻어 넉넉하게 먹고 살만해졌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만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인생의 결론은 망신망신 개망신입니다.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 살아온 이들의 말로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삶에 또 얼마나 많은 국민들의 행복감이 상처를 받았습니까? 결국 행복이라는 것은 서로서로 의존돼 있고 연결돼 있습니다.
무한경쟁 시대를 살면서 앞뒤 안보고 오로지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달려온 인생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하겠습니까? 그러나 결국은 젊고 유능한 신인에 의해 밀려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의 인생이었습니다만 그래서 우리가 진정 행복한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얼마전 한겨레에 보도된 기사를 보니 현대자동차 안에서 정규직에 의한 비정규직 비하와 탄압이 심하다고 합니다.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면서 인간적인 차별과 모멸까지도 당한다는 기사였습니다. 나이 어린 사람이 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반말에 욕설까지 한다는 부분은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한 작업장에서 함께 일하면서 정규직 비정규직 나누어 모멸을 하고 모욕을 하는지 말입니다. 과연 정규직 노동자들은 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을 보면서 자신들은 우월하다는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정규직의 행복은 결국 비정규직의 행복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비싸고 맛있는 밥을 먹고 나왔는데 거리에 널부러져 있는 노숙인들을 보면 진미를 먹은 속이 거북해 집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먹을 것을 훔치다가 잡혀 재판을 받는 사람의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던데, 그런 뉴스를 접하면 왠지 세끼 먹는 것이 미안해지는 것이 사실이죠. 어쩌다 나들이를 나온 장애인들을 보면 그들에 대한 안스러움과 더불어 내가 지금 누리는 건강이 복권과 같이 우연한 것임을 새삼스레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의 행복이 결코 우리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 이웃의 불행을 마주보면서 내가 행복감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만의 행복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성서를 꿰뚫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을 보면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고아와 과부를 특별해 챙기고 보살피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처한 동포를 도우라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기도 하겠지만, 그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포의 고난과 아픔을 나 몰라라 한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그 사회에 관철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음도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고, 돈 없는 사람의 판결이라고 함부로 하지 말며, 뇌물을 받고 재판을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장사꾼들은 저울추를 속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도덕과 정의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한 사회는 결국 그 구성원 모두가 다 불행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에 이런 불의는 척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뭘 먹고 뭘 입고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을 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마태복음 6:33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백성, 우리의 이웃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먼저 고민하고 그것을 구할 때 하나님은 이 모든 것, 즉 우리의 행복을 더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 용산참사 4년을 맞았습니다. 여전히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용산 얘기를 하면 아마도 우리교회는 맨날 이런 얘기만 하느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번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용산철거민들은 극빈자층도 아니고 몇 천, 몇 억씩 권리금 내고 들어가 장사하던 상가세입자였습니다. 그들이 그런 사태를 맞고 공권력이 묻지마 진압을 펼치고 철거민들이 감옥에 가고 과잉진압 경찰은 면죄부를 받고 사회적으로는 철거민들을 개발을 방해하는 불순세력으로 매도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이 과연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까요? 아마도 이런 일 이후에 사람들은 언제 나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는 패배감과 공포감, 그리고 폭력적인 정부와 기업에 순종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암울한 현실이 그 날의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 이웃의 행복은 함께 연결돼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가며 : 가톨릭 신부님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요즘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넘어오는 신자들이 많은데 이들을 가만히 보면 처음에는 자기와 가족, 자기 미래와 사업 뭐 이런 것들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한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그들의 기도가 이웃과 사회를 위한 기도, 타인을 위한 기도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나의 행복은 나만의 행복으로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나의 이웃, 나의 동포, 인류의 행복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우리 이웃들의 행복을 빌어주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혼기에 꽉찬 처녀가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가 혼기가 꽉찼습니다. 신랑감을 보내 주셔요." 그런데 도대체 응답이 없다고 친구에게 말하니 친구가 그 까닭을 말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는 응답이 잘 안되고,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잘 응답된다고요. 그래서 아가씨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하던 기도를 이웃과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엄마가 딸을 시집보내야 한다고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제발, 사위감을 보내주셔요. 아멘.“
사랑하는 좋은만남교회 교우 여러분, 현대의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삽니다. 그래서 교회도 나오고 하나님도 믿고 또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행복과 다 연관되어 있도록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 나의 행복은 이웃의 행복과 함께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와 우리 가족의 행복만이 아니라 우리 이웃, 어려움을 당하는 타인들의 행복을 위하여도 기도하고 또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마음을 쓰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