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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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 169~11

9 [예수께서 이레의 첫날 새벽에 살아나신 뒤에, 맨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이다. 10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것과, 마리아가 예수를 목격했다는 말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다.

 

제목 : 그들이 경험한 부활

 

들어가며 :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첫 열매가 되심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부활주일 아침에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오늘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이 땅위의 모든 인류와 생명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설교를 오래하면 할수록 어려운 설교가 절기설교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오늘 제가 설교하는 주일이 부활절이 되어 피하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강단에 섰습니다. 성탄절이고 부활주일, 추수감사주일이고 이게 다 생활의 일부가 돼버리니 특별한 의미부여가 쉽지 않습니다만 부디 은혜로 받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이 앞에 예쁘게 장식된 부활절 계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로 계란을 주고받는 풍습이 생겼다고 하는데 왜 그 계란에 색칠을 하였을까요? 이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십자군 전쟁 때의 일이랍니다. 로잘린 부인은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듣고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틈을 이용해 재산을 가로챈 후 로잘린을 마을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녀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마음씨 착한 로잘린 부인은 마침 부활절을 맞아 마을 어린이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의 나무를 하나씩 정하렴. 그리고 나무 밑에 둥지를 만들어 놓아라. 그러면 둥지에 예쁜 알이 들어있을 꺼야." 로잘린은 둥지에 형형색색의 그림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글이 적힌 달걀을 놓아두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신기한 표정으로 색달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소년이 달걀을 들고 친척집을 가던 중 길가에 쓰러진 부상병을 만나 부상병에게 달걀을 주었는데 부상병은 달걀에 적힌 글씨와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답니다. "이것은 내 아내 로잘린의 그림인데. 그리고 이것은 우리 집 가훈이 아닌가!" 바로 로잘린 부인의 남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재회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고 그때부터 부활절 달걀은 '사랑'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이지요? 오늘 여러분도 이 계란을 가지고 가시면서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전에 나오는 부분의 5-8절은 [5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6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7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8 그들은 뛰쳐 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을 성서에서 보면 난하주에 이런 글이 쓰여있습니다. ['마가복음서의 긴 끝맺음'(16:9-20). 이 긴 끝맺음 대신에 '마가복음서의 짧은 끝맺음'만을 가진 사본들도 있다...]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9절부터 20절은 원래 마가복음에 쓰여 있던 부분이 아니라 한참 뒤에 첨가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즉 마가복음은 원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기록하지 않았고 그냥 돌아가셨고 매장되었는데 안식 후 첫날에 가보니 무덤이 텅 비어 있었다는 이야기로만 끝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전하는 복음서는 네 개가 있습니다. 다 아시는 대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중 가장 먼저 쓰여진 것이 마가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마가복음을 기초로 해서 각자가 가진 자료를 첨가하여 자기들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복음서를 집필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이 복음서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복음서라고 보는 것이 대다수 신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가복음에 169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이 들어있지 않고 나중에 발견된 성서번역에는 있지만, 그 내용이 마가복음이 오히려 다른 복음서들을 참고해서 작성한 교리문답서 같은 느낌이 난다는 것입니다. 처음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하여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직후에는 예수님이 금방 다시 재림하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굳이 복음서 같은 기록을 남길 필요가 없었고 재산 팔아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재림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대한 재림은 없었고 재림이 더 늦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을 직접 모셨던 제자들도 하나둘 순교하거나 늙어가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잊힐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생기면서 마가를 시작으로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런 마가복음에 당연히 있어야 할 부활의 이야기는 쏙 빠져 있고 그냥 무덤이 비었다고만 언급하고 책이 끝난 것입니다. 부활의 이야기는 마가복음보다 10년 혹은 15년 뒤늦게 쓰여진 마태와 누가복음에서야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마가복음이 기록되었던 70년경부터 80년경까지만해도 예수님의 부활이 잘 알려진 사건이라거나 기독교의 공식적인 사건, 보편적인 신앙의 고백은 아니었다는 뜻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 사후 약 50여년이 지나서야 부활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과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그런 방식의 부활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구나 다 알아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제자는 하루 종일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데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였고 도마도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자기의 불신을 깨달은 게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가 했던 말을 하시자 그제서야 알아봤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무덤에 가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던 마리아도 그게 예수님인줄 모르고 시신이 어디있는지 알려달라며 횡설수설하였습니다. 이런 정황을 볼 때 예수님은 명백하게 예수님 자신으로 부활해서 그 부활의 소식을 만천하에 알리고 활동하시다가 40일만에 승천하셨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신앙적 상징과 영적인 교훈을 담고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부활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던 이들이 갑자기 예수님의 부활을 뒤늦게 고백하면서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왜일까요? 우리는 신앙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후에 제자들의 삶은 재림예수를 기다리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하였고 곧이어 엄청난 박해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이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는 오히려 예루살렘의 초토화와 성전파괴라는 결과로 나타났고, 많은 이들이 끌려가 죽음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을 것이고 배교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암담하고 참담한 상황 앞에 그들은 고난과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아내게 되었고 부활의 기대로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견뎌낼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부활은 그들에게 이야기나 설교로 들려지거나 교리로 교육된 것이 아니라 50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경험하고 발견하고 바로 자기들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기다렸던 이들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고백되었고 현실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매일 같이 죽음을 마주하고 공포에 떨던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면서 그들 자신이 부활한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통해 곧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그들은 죽음도 이기고 부활도 이기고 두려움도 극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대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당당한 부활이었고 저항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따르는 이들의 부활이 현실 가운데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부활은 의미가 있고 실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첫 번 부활절을 지낸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자신들의 부활을 경험한 것이고 그것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백 번 천 번 계속 된대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경험한 부활이 바로 예수의 부활, 바로 그것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가며 : 오늘은 예배 시작하면서 한 달 동안 실천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습니다. 제가 드디어 좋은 일을 하나 했습니다. 강남에 미팅이 있어 다녀오는 길에 지하철역 입구에서 파는 빅이슈라는 잡지를 구매하였습니다. 이 잡지는 사실 저에게는 별로 필요 없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지만 샀습니다. 그 이유는 이 잡지가 노숙인들의 재활을 위해 만들어졌고 또 판매하는 사람이 노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책 표지에는 작은 글씨로 책 값 5,000원 중 2,500원은 홈리스 판매원에게 돌아간다고 적혀 있습니다. 노숙인의 삶을 생각해봅니다. 단순히 게으르고 무책임하기 때문에 노숙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가장 쓴 맛을 보고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자포자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을 회복하기 위해 이 잡지를 들고 거리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 사후 50년만에 부활을 고백하게 된 이들의 모습이 바로 이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들을 위해 내사 사준 5,000원짜리 잡지가 그들을 부활하게 하는 힘이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다시 일어서려는 모습이 저에게도 위로가 되고 자극이 됩니다. 결국 우리 모두의 부활이 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관계의 한 가운데 바로 예수님, 예수님의 부활이 있다고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노숙인들 외에도 또 절실하게 부활을 갈망하는 이들을 봅니다. 지난 주에는 세월호 단원고 희생자 부모들이 삭발을 했습니다. 그중에는 엄마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여자에게 머리카락은 단순하게 머리카락만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그 장면을 사진으로 보는데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과연 그들에게 지금 무엇이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말하듯이 지금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미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게 포기하지 않고 부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활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의 부활의 힘을 얻습니다. 부활은 자신과 이웃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발견하고 경험해야 하는 부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부활을 우리의 삶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기도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부활은 설교나 이야기, 교리공부로 배우거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50년을 살면서 부활을 새삼스레 발견하고 부활을 누렸듯이 이제 우리도 부활을 우리 삶을 통해서 발견하고 삶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를 부활의 신세계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제 나와 우리의 부활로 완성돼야 합니다. 활을 바로 우리의 부활로 경험해야 합니다. 바로 나의 부활로 예수님의 부활을 완성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발견하고 그 부활을 나의 부활로 삼는 것입니다. 죽음의 시대, 상실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로 나의 부활로 이루어내시는 여러분께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자비와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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