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열왕기하 14:23-28
23 유다의 요아스 왕의 아들 아마샤 제 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왕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마흔한 해 동안 다스렸다. 24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그대로 본받았다. 25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하였다. 이것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의 종인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요나 예언자에게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26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이 너무 심하여, 매인 사람이나 자유로운 사람이나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 이스라엘을 돕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보셨다. 27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없애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을 시켜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다. 28 여로보암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전쟁에서 보인 능력과, 유다에 속하였던 다마스쿠스와 하맛을 이스라엘에게 되돌려 준 일들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
제목 : 부자가 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들어가며 :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힘겨운 삶의 한 가운데서 버거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의 두 다리에 힘을 주시고 마음에 담대함을 부어주시며 갈 길을 예비하시는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주간에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이 떠돌았습니다.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입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IS, 미국, 유럽국가 등등이 뒤얽힌 정부군과 반정부군 간의 전쟁이지만 결국은 정의로 포장된 탐욕 때문이지요. 국가적 탐욕과 개인적인 탐욕, 그런데 그 탐욕 때문에 고난 받고 죽어가는 이들은 아무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사람들입니다.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난민들이 그저 살기 위해 난민선을 타고 지중해를 떠도는데 유럽으로 유입된 난민이 35만 명이고 이중 2643명이 지중해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지난 세기 유럽의 강대국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식민지 침략정책의 후과가 이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난민들이 유럽 선진국으로 몰려드는 것을 보면서 결국 죗값은 반드시 받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옳고 그름으로 위장되었지만 결국 수많은 무고하고 무죄한 사람들에 대한 살육으로 이어지는 이 참담한 난리가 끝나고 모든 하나님의 자녀와 피조물들에게 사랑과 행복이 가득차기를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들어가서 : 이스라엘과 유다, 그냥 통틀어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추앙받는 왕은 누구일까요? 물론 다윗왕일 것입니다. 성서는 다윗왕을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왕으로 선언합니다. 다윗왕은 여러 가지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음에도 가장 완벽한 지도자상으로 그려졌고 장차 오실 메시아도 다윗왕과 같은 존재일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이 다윗의 믿음을 소재로 많은 설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실제로 다윗이 완전한 지도자였을까, 아니면 처음으로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 통합하고 제국을 건설한 힘있는 왕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지도자의 이미지로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입니다. 전무후무한 강대한 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한 왕이라는 이미지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솔직한 제 느낌입니다. 게다가 성전중심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첫 성전을 건축한 인물이니 신앙심도 좋게 보였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이스라엘, 유다의 역사에서 넘사벽,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그러면 다윗을 제외하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국가적인 성공을 거둔 왕은 누가 있을까요? 보통 솔로몬, 아합, 여로보암 2세와 헤롯대왕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스라엘을 매우 강력한 국가,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나라로 만들었거나 아름답고 성대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선 솔로몬을 들 수 있겠습니다. 솔로몬은 잘 아시다시피 아버지 다윗왕이 이루어놓은 대제국의 국력을 이어받아 문화와 부의 최고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열왕기상 4장 20절 이하를 보면 영토, 궁궐의 하루 식량, 마굿간과 군마 수 등등 솔로몬이 누린 부귀와 영화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겠지요?
아합왕은 두로,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하여 두로의 협력으로 큰 경제적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해 중개무역과 통행료 수입으로 엄청난 부를 얻어 사마리아에 새 수도를 건설하였습니다. 아합에 의해 완공된 사마리아는 당시에 견줄 것이 없는 탁월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두로에서 사들인 상아 장식물을 많이 부착하여 국가적 부유함을 반영하였습니다. 또한 이스르엘 궁전을 보수하였고, 중요한 도시들의 방어시설을 강화하였으며 450마리의 말을 수용할 마사를 갖춘 므깃도의 마굿간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아가 아합은 외교적으로 유다와 혼인정책을 통해서 남북의 평화시대를 이끌었고, 그 자신은 두로의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국제적 안정과 무역의 활성화를 도모했으며 국내적으로는 이스라엘 주민과 비이스라엘계 주민의 갈등을 해소함으로써 국민 화해의 시대를 이룩했습니다.
주전 700년대의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래 통치한 왕으로 군사,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솔로몬왕 못지않게 이스라엘 최고의 황금기를 누린 왕입니다. 주변 강대국 앗수르와 아람(다마스쿠스)이 위축된 틈을 타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유다를 복속시켜 남방으로의 영토확장을 꾀했습니다. 여로보암은 ‘하맛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솔로몬 때의 영토와 흡사한 넓이의 광대한 땅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경제적으로도 크게 번영하여 길거리에 떨어진 은덩어리는 쳐다 보지도 않는 부귀를 누렸다고 하며 넘치는 물질이 성전에까지 흘러들어와 매일같이 엄청난 제물을 바치는 성대한 종교행사가 벌어지곤 했다고 합니다.
헤롯대왕은 예수님 당시의 헤롯왕이라 불리던 헤롯 안티파스의 아버지로 로마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을 33년간 통치하면서 화려한 예루살렘을 만들기로 유명하였습니다. 헤롯대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확장하는데 성전의 광장을 “남북으로는 미식 축구장 다섯 개, 동서로는 미식 축구장 세 개의 크기로 확장”하고, 지주 벽을 작은 것은 2~5톤, 큰 것은 50톤에서 400톤에 이르는 돌들로 세웠답니다. 이 확장사업이 얼마나 아름답게 이루어졌던지, “고대 전체에 걸쳐서 그리고 성전이 파괴된 후로도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은 ‘헤롯 성전을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구조물이 어떤 것인지 보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말해왔다”고까지 할 정도니 얼마나 물질이 풍요롭고 대단한 시대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네 왕은 물질적으로 가장 성공하였고 경제적 부를 성취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또한 성서로부터 지독한 평가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왕이라는 평가만이 아니라 악한 왕의 대명사, 못된 것으로 끝판왕이라는 악명까지 얻었습니다.
솔로몬의 전성기는 그의 세대로 끝났고 이후부터는 극심한 정체기 혹은 쇠퇴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의 대표 르호보암을 위시한 일단의 무리들이 르호보암에게 와 요청한 내용을 보니 솔로몬이 일궈낸 그 놀라운 건축과 문화, 부귀 영화는 결국 백성들의 노동을 폭력적으로 착취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금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셨습니다. 이제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지워 주신 중노동과 그가 우리에게 메워 주신 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 (열왕기상 12장 4절)
백성들에 대한 그의 폭력적 통치는 결국 제국을 둘로 분열되게 만들었습니다.
아합왕은 이런 국가적 번영과 정치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부정적으로, 아니 최악의 왕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저지른 잘못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입니다. 아름다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나봇에게 누명을 씌워 처형하고 그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비단 나봇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합은 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은 인물인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의 물질적 번영 뒤에는 부자들의 잔혹하고 무자비한 착취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땅을 탐욕스러운 부자들에게 빼앗기고 생존을 위해 자식들을 종으로 파는 지경에 까지 갔습니다. 그것도 신발 할 켤레 값으로요. 이 당시 활동한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부자들의 착취와 부당한 축재를 비판하였습니다.
끝으로 헤롯대왕은 전형적인 독재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선 “외국 용병들과 비밀경찰로 완비된 ‘강력한 억압 정권’을 세워, 그에게 반대나 저항이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제사장을 자신이 임명하여 통제하였고 국회 같은 산헤드린을 장악하였으며 백성들을 동원해 웅대한 궁전과 호화별장을 건축하였습니다. 후임 통치자 문제에 대한 우려 때문에 두 아들까지 처형하고 굶주린 농민을 쥐어짜 세금을 받아내고, 그것으로 자신과 가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독재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장황하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를 만들었던 네 명의 왕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여러분에게 이스라엘 역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가장 부강하고 호화롭고 넉넉하고 풍요롭고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었다는 왕들을 성서는 하나같이 악한 통치자, 나쁜 지도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시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부자는 더욱 큰 부자가 돼서 국부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착취당하고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는 소유마저도 빼앗기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서의 세계관, 하나님 신앙의 세계관이 결코 아닙니다. 세속적으로 가장 성공한 것 같은 왕은 신앙적으로는 가장 패악한 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 하나라도 결코 착취당하거나 약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골고루 나누어 받을 수 있는 나라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서는 2015년을 사는 오늘의 기독교인들인 우리에게 매우 큰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왕, 지도자, 대통령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즘 들어 일본의 한반도 강점이 근대화에 공헌을 했고 현재의 부귀영화가 일본의 강점에서 비롯되었기에 일본을 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부쩍 많이 합니다. 그저 부자로 만들어 주고 잘 먹고 잘 사는 게 장땡이라는 천박한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발언들입니다.
우리는 지난 2007년 12월 개신교 장로를 대통령을 세웠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동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국민들을 모두 돈방석에 앉게 해줄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가 한 회사의 실질적 소유주냐 아니냐의 문제로 시끄러웠고 그가 자기 입으로 그 회사는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영상이 공개됐음에도 그는 다시 자기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사탕발림에 더 깊은 탐욕으로 빠져들어 간 것입니다. 온 나라가 탐욕에 미쳐 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5년 후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국가부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금수강산은 멍들었으며 사람들의 삶은 한없이 팍팍해지기만 했습니다. 10년간 쌓아온 남북 간의 신뢰는 깨졌고 소위 컨테이너벽으로 민주주의는 짓밟혔습니다.
요즘 새로이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헤롯대왕처럼 전형적인 독재자였지만 그가 백성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었다는 선동에 그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방식으로 말한다면 그는 악한 왕,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난 지도자였음에도 단지 경제발전이라는 한 가지만을 놓고 그를 좋은 지도자, 그리워할만한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성서라면 결코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가며 : 돈,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한 왕들은 악한 왕으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들이 국가를 풍요롭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풍요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라는 명령을 저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성서는 결코 그들을 칭찬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 그 왕들을 칭송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어떤 지도자를 원하고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기독교가 더 앞장서서 나쁜 지도자를 그리워하라고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하나님 신앙의 역사는 물질숭배와의 투쟁의 역사입니다. 자본주의가 진리가 된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치열한 전쟁의 한 가운데 서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이 하나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지도자를 세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탐욕이 아니라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여러분, 그리고 인간을 살리는 지도자를 얻기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있으실 줄로 믿으며 사랑과 자비 또한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